확실히 ‘선수’들이다. 스튜디오 안은 시장바닥에 가까웠다. 이미숙, 배용준, 전도연 세명의 스타들을 돌보는 매니저, 스타일리스트, 코디네이터만 해도 적은 수가 아닌데, 기자만 4명에다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의 프로듀서와 마케팅 실무자까지 빼곡하다. 마침 점심때라 끼니를 거를 수 없어 옹기종기 모여 김밥을 나눠 먹는다. 배우는 배우대로 스탭은 스탭들대로. 그 틈에 좁은 탈의실에서 차례로 옷갈아입고, 농담도 하다가, 사진 촬영하고, 사이사이에 인터뷰도 한다. 지켜보기만 해도 정신이 없을 터인데 세 배우의 집중력이 대단하다. 깔깔거리며 웃다가도 조명이 터질 때만 되면 눈빛과 표정이 싸악 달라진다. 막 옷갈아입고 나와서 머리 다듬는 그들에게 어떤 질문을 던져도 건성어린 답이 없다. 특히 세 배우가 함께 카메라에 섰을 때는 심상찮은 공기가 흐른다.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뿜어내는 미묘한 경쟁의 기류. 소란스럽지만 흐트러짐이 없는 속도감으로 촬영과 인터뷰는 예상 밖으로 아주 일찍 끝났다.
이미숙과 전도연이 먼저 캐스팅됐다. 처음에 배우들보다 스탭들이 더 긴장했다. 보통 ‘기’가 센 배우들이 아니어서 파열음이 생기면 어쩌나 싶은. 이미숙은 웬만한 마초 따위는 순식간에 꼬꾸라뜨릴 만큼 현장을 사로잡는 카리스마가 있다. 전도연은 특유의 미소와 붙임성으로 현장 분위기를 자기 것으로 만든다. 배역도 맞서는 형국이다. 이미숙의 조씨 부인은 교활하지 않되 능수능란하게 사람과 상황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부릴 줄 아는 인물이다. 호기와 관능의 캐릭터. 전도연의 숙부인은 조용히 그러나 단단한 올곧음으로 홀로 세파를 견뎌온 여인이다. 지고지순의 캐릭터. 다행히 긴장은 곧 종료됐다. 처음 마주친 이미숙과 전도연의 ‘기’는 거셌으나 종류가 완연히 달랐다. 감싸고 안기면서 균형을 이뤘다.
배용준은 비록 영화는 처음이나 TV에서 생존력과 자기 영역을 키워온 근성있는 배우다. CF에서 환히 미소짓는 그는 한없이 부드러우나 이게 아니다 싶으면 무섭게 싸늘해진다. 그의 ‘터프’함이 이만저만 인내심을 발휘한 게 아니다. 드라마와 달리 영화현장은 배우를 한없이 기다리게 만든다. 게다가 이건 사극이 아닌가. 의관을 갖추고 서너 시간 기다리다 예스런 어투를 구사하다보면 답답하기도 하련만 ‘변신’에 성공했다는 게 주위의 말이다. 그는 악역 아닌 악역이다. 조씨 부인을 대하는 얼굴과 숙부인을 대하는 얼굴이 완전히 다르다. 여자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천의 얼굴을 지녔다. 학문에 능하고 무술에 뛰어나나 출세에 관심이 없으니 비범한 인물이기도 하다.
내공이 만만치 않은 세명의 ‘선수’들이 벌이는 게임을 곧 보게 된다. 그건 치명적인 사랑 게임이기도 하고, 시대를 초월한 생존 게임이기도 하다. 사대부 집의 은밀한 내당에서 벌어지는 관능어린 고전극을 보기 전에 세명의 ‘에너자이저’부터 만나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