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태극기 휘날리며> 현장 급습 [3] - 강제규 감독 인터뷰
2003-10-02
글 : 이성욱 (<팝툰> 편집장)
“하나의 색깔로 단정할 수 없는 극한 상황 그린다”

어둠으로 몸을 가린 황매산. 해발 1100m 고지라 칼바람의 연속이다. 이방인은 얼굴을 싸매느라 정신없지만 200여명의 제작진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현장 분위기 처지지 않게끔 하려고” 항상 원색의 트레이닝복을 챙겨입고 촬영에 임한다는 강제규 감독. 폭파장면 촬영에 들어가기 직전, 배우들과 스탭들을 독려하며 꼼꼼히 리허설을 준비하던 그에게 불쑥 몇 가지를 물었다.

-태풍 때문에 피해가 크겠다.

=예산이 오버되고 일정에 다소 차질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처음에는 갑갑했지만 2시간 만에 맘 고쳐먹고 어떻게 하면 빨리 수습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걱정한다고 무너진 세트가 벌떡 일어나는 건 아니잖나. (웃음) 이번 일로 대세에 큰 지장이 있는 것도 아니다. 벌써 110회를 넘겼는데 이 정도로 뭘. 예산 걱정들 하는데 우린 최대한 줄여서 시작했고, 지금도 돈 쓰는 건 긴장하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라.

-순천 촬영 때 종일 비맞다 실신한 보조출연자들도 발생했는데 미동도 하지 않고 촬영을 진행했다고 들었다. 현장에서 포커페이스로 불리는데.

=그건 아니다. 감정에 충실한데 왜들 그러지. 요즘 힘들 때는 힘든 표정도 짓고 그런다. 오히려 전에는 내가 원하는 지점의 90% 정도가 안 나오면 만족 안 했는데 이번에는 80% 정도면 오케이한다. 나이가 들어서인가. 그 부족한 10%는 사실 내가 원하지 않아도 되는 것임을 깨친 것 같다.

-악천후 등 촬영을 위한 조건이 열악했는데.

=올해 여름에 촬영이 있었던 영화는 다 그렇지 뭐. 다만 우린 규모가 크니까 아무래도 손실이 클 수밖에 없다. 여정이 길어서 그런지 희비 교차가 컸는데, 어떨 땐 하늘이 우릴 돕는구나 싶다가도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촬영 들어가고 나서 성격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더 나간 것 같다.

-얼마 전 합천에서 진행했던 두밀령 전투장면의 경우 크레인이 무너지는 등 크고 작은 사고들도 있었다.

=그것보다 연출하는 입장에선 후반부에 나오는 클라이맥스 장면이라 더 힘들었다. 진석과 진태가 다시 만나는 장면인데…. 감정의 덩어리가 너무 크다보니까. 시나리오 쓸 때부터 이걸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들었다. 두려움, 그 말이 딱 맞는다. 촬영이 모두 끝나고 나면 ‘아, 그때 그랬지’ 싶을 텐데 지금은 여유가 없다. 그때 힘들었다는 생각밖엔 없다. 뇌가 모든 걸 지각하고 기억하지 못하는 거지. 지금도 머리가 멍하다.

-현장에서 많은 배우, 스탭들과 호흡을 맞추려면 여간 힘든 게 아닐 텐데.

=경주 촬영까지 끝내고 나니까 이제 이 정도면 끝을 보겠구나 싶었다. 촬영이 50∼60% 정도 진행된 때였는데, 배우나 스탭들이나 다들 육탄전이니 폭파니 하는 상황에서도 드라마 감정을 놓치지 않고 끌고가는 걸 확인했다. 힘들다고 내색하지 않고 같이 와준 배우들도 고맙고, 제작발표회 때도 한 말이지만 서로 믿고 110회 고지를 넘어준 스탭들이 고맙다.

-인물들의 갈등이 촉발되고, 심화되는 국면의 정점에 한국전쟁이 있다. 전쟁을 어떻게 그릴 것인지 궁금하다.

=그건 나도 궁금하다. (웃음) 분명한 건, 어떤 하나의 색깔로 단정할 수 없는 극한 상황을 그려내려고 했다. 회색이었다가 어느새 청록이 되는. 입체적이되 혼란스러운 느낌을 전해주었으면 한다. 캐릭터도 아마 이런 상황에 따라갈 것이고.

-한달 뒤면 촬영이 끝난다. 한시름 놓을 것 같다.

=무슨 소린가. CG 분량이 많다. 평양시가전이나 종로거리나 실제로 재현하기 어려운 부분을 보완해야 한다. 전투시 등장하는 비행기라든지 탱크도 좀더 늘려야 하고. 폭파장면의 규모도 좀 증폭시켜야 하고 할 일 많다. 여기에다 1950년의 시대상황도 같이 등장해야 하니까 쉽게 넘어갈 수 있는 장면이 없다. 카메라 3대 동원해서 지금까지 필름 30만자 정도 썼는데, 4주 안에 편집을 끝내야 하기 때문에 부담스럽다. 이러다 죽을 것 같다.

촬영 전에 둘째아이를 얻었는데. 백일도 못 챙겨줬다. 내년에 개봉하면 그게 선물이 될까. 같이 놀아줘야 하는데. 아빠 도리는 개봉한 뒤에야 가능할 것 같다.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