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태극기 휘날리며> 현장 급습 [1]
2003-10-02
글 : 이영진
사진 : 이혜정

천기(天氣) 거스르는 영기(映氣)로, 영화는 이렇게 단련된다. 전국 19곳 로케이션, 악천후와 싸우며 막바지 촬영 중인 <태극기 휘날리며> 살인적 강행군의 현장을 가다

<태극기 휘날리며>에 대해 알려진 것은 많지 않다. 강제규 감독이 4년 만에 메가폰을 잡았으며, 장동건과 원빈이 한국전쟁이라는 파국의 상황에 휘말리게 되는 형제로 출연하며, 순제작비 140억원 규모의 초대형 전쟁영화라는 것. 이게 전부다. 지난 2월 크랭크인한 뒤 7개월이 지났다. 일본인들의 촬영장 방문 이벤트에 한 차례 문을 연 것을 빼곤 아직까지 촬영현장을 공개한 적이 없다. 그런데 태풍 매미로 9월 말에 공개할 예정이었던 평양 시가지 세트의 상당 부분이 파손됐고, 촬영현장을 둘러볼 수 있는 시점도 10월 중으로 또 미뤄졌다. 목마른 자가 우물을 찾듯, <씨네21>은 제작사가 원치 않는 방문을 강행했고 가까스로 그동안의 고생담을 듣고 촬영현장을 엿볼 수 있었다. “아직도 안 갔어?”라며 어깨로 툭툭 쳐대던 강제규 감독의 면박을 외면하고 얻은 짧은 염탐기.

도계(道界)가 따로 없다. 범람으로 인해 모래밭으로 변해버린 농경지가 경상북도로 들어섰음을 표지판보다 먼저 알려준다. 간혹 보이는 촌부들은 찢기고 꺾인 비닐하우스를 다시 세우느라 허리를 좀처럼 펴지 않는다. 그리 다를 것 없는 차창 밖 풍경이 계속 이어진다. 허망함을 지우기 위해 끝없이 놀리는 몸 사위가 안쓰럽다. 시치미떼고서 환한 얼굴 짓고 있는 하늘이 어찌 밉지 않을까. 어쩌면 그들의 굽은 등은 마른하늘을 향한 침묵 시위를 벌이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상념은 그러나 오래지 않았다. 졸았던지, 버스는 어느새 목적지인 경남 합천에 불청객을 토해놓는다.

서울을 출발한 지 5시간. 영화 <태극기를 휘날리며> 제작진은 이곳 합천에 석달 전부터 둥지를 틀고 있다. 그리 반갑지 않을 방문객을 마중나온 이성훈 프로듀서는 “가끔 서울 올라가면 숨이 턱턱 막힌다”며 “이젠 이곳이 고향처럼 느껴진다”는 말로 인사를 대신한다. 촬영을 끝내자마자 다음 촬영장소로 이동하기 바빴던 제작진에게 한여름, 혹독한 시련을 안긴 합천은 남다를 것이다. 세차라곤 모르는 먼지투성이 차에 올라타 합천호 근처로 20분가량 내달리자 이내 2만평 부지에 조성 중인 세트장이 모습을 드러낸다. 제작진은 미군의 공중폭격 장면을 포함하여 극중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전투가 벌어질 평양 시가지를 짓고 있다.

“쇠파이프가 바나나 껍질 벗겨지듯 망가졌다”

외지인의 침입이지만 어느 누구도 눈길을 주지 않는다. 인부들 한 무리는 절단한 철근을 용접해서 구조물을 세우는 데 또 한 무리는 망치질로 합판을 이어 외관을 두르는 데 여념이 없다. 늦은 점심인지 새참인지 모를 국수를 말아먹던 무리 또한 쉬지 않고 웅웅거리는 발전기의 채근에 이내 몸을 일으킨다. 애초 평양 세트는 완성되어 있어야 했다. 태풍 매미만 아니었다면 평양 세트장은 지금쯤 대규모의 취재진 앞에서 위용을 뽐내고 있었을 것이다. 예고없이, 난데없이 몰아쳐 20여채의 가옥을 망가뜨린 광풍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세트를 가로질러 남쪽으로 향하니 태풍에 의해 사지절단당한 세트들이 흉측한 모습을 드러낸다.

“쇠파이프가 바나나 껍질 벗겨지듯 망가졌다.” 세트 시공을 책임지고 있는 강보길 부장은 경력이 30년이지만, 이런 규모의 피해는 이번이 처음이었다면서 고개를 내젓는다. 태풍의 위력은 실로 엄청났다. 9월13일 새벽 2시까지 4시간 동안 합천 일대를 강타한 태풍은 세트의 유리창을 모조리 박살낸 것은 물론이고, 남쪽 일대 세트를 일거에 무너뜨렸다. 세트 부지를 둘러싼 철책이 반쯤 뉘어진 것은 그야말로 약과였다. 3t 무게의 철골 구조물이 날아가 옆 구조물을 덮쳐 무너뜨린 광경을 이튿날 아침 마주하고 제작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침묵뿐이었다. 세트 안에 소품을 채우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제작진이 추산하는 피해액은 3억4천만원. 3일 동안 실어나른 잔해만 15t 대형 덤프트럭으로 10대 분량에 이른다. 정부의 보상에 기대를 걸고 있지만, 태풍으로 인해 빠듯해진 제작일정은 어쩌지 못한다. 잦은 비로 인해 8일 동안 작업을 못한 상태에서 재해를 맞았으니 엎친 데 덮친 격이다. 10월 초까지 복구작업을 마치기 위해 현재 제작진은 애초 시공 때보다 3배나 많은 인력을 투입한 상태다. 구조물을 세우는 팀들의 작업이 모두 끝나야 시대 분위기를 내는 미술팀이 들어오는 것이 순서지만, 지금으로선 그럴 만한 여유가 없다. 미술팀, 세트팀 모두 비상상황. 50명에 이르는 팀원들이 이곳 세트 복구에 매달리고 있다.

이쯤에서 강제규 감독을 비롯한 스탭과 배우들이 궁금해졌다. 추석에도 타지에서 제를 올리고 촬영을 했지만, 연휴 끝무렵에 닥친 재앙을 이들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피해현장만 둘러보고 가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촬영을 진행 중이던 황매산 정상 아래 캠프를 찾았다. 산길을 30분 정도 차량으로 오른 다음 도착한 1100m 고지. 대형 군용 막사 주위로 30여개의 개인 막사들을 마련해놓고 북한군 진지를 기습 공격하기 위한 작전회의를 하는 장면을 촬영 중이었다. 잠깐 짬이 난 사이, 오가는 스탭들을 붙잡고 “태풍 피해가 크던데요”라고 말을 걸었지만, 다들 웃으며 “그 정도가 무슨 대수냐”는 응답이다. 108회 촬영을 넘긴 뒤, 스탭들은 번뇌를 깨치기라도 한 걸까. 느긋한 표정들이다. 7개월간의 촬영기간 동안 도대체 얼마나 고된 수행을 거쳤기에.

유난히 빠른 봄, 유난히 긴 장마

“촬영 전날 강원도 사북에 도착했는데 없어요, 눈이. 그새 다 녹아버린 거예요. 땅은 탄광에서 흘러나온 검은 물하고 뒤범벅이 된 상태였고. 휴일에만 촬영이 가능한 곳이니 다음 주말까지 기다릴 수도 없고. 매번 흩어져 있어 같이 회식 한번 하기 힘든 제작부 17명이 삽 들고 다 모였어요. 휴일이라 어디서 장비를 구할 수도 없었고, 밤새 삽질했죠. 진흙 걷어내고 그 위에 비닐 깔고 다시 보온천 덮고. 그런데 새벽 4시쯤 되니까 함박눈이 오는 거예요. 작업을 계속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난감했죠.”(제작실장 황현정)

대장정의 노도를 맨 먼저 가로막은 건 이상기온이었다. 봄에 극중 겨울장면을 모두 찍어야 했던 제작진이었지만, 심지어 5월까지 눈이 녹지 않는다는 양구, 태백, 횡계, 인제 등 강원도에 주요 캠프를 설치한 터라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전주에서 촬영을 시작한 것이 2월15일. 2월 말, 중국의 참전으로 양민과 남한군이 밀려나는 장면을 찍기 위해 양구를 찾았으나 설산 대신 돋아난 연록의 새싹이 제작진을 당혹게 했다. 뭣보다 녹아서 질퍽거리는 땅 때문에 차량 이동이 불가능했다. 수킬로미터의 땅에 잔돌을 깔아 찻길을 만들어야 하는 고된 밤샘 작업은 3월 사북 촬영까지 계속됐다.

천기(天氣)의 심술은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기상이변이 잦아 애초 촬영 후보지에서 제외했던 대관령으로 눈을 찾아나선 제작팀. 하늘은 밑둥 뚫린 자루마냥 눈을 방사했고, 선발 제작진은 4km 정도의 진입로를 확보하기 위해 수차례 제설작업을 하면서도 녹지 않기만을 바랐다. 그러나 막상 촬영일이 다가오자 얼굴을 내민 태양은 수미터의 눈더미를 반으로 녹여버렸고, 급기야 촬영 당일에는 포크레인까지 가동해서 아직 녹지 않은 눈을 퍼다 담은데다 소금까지 뿌려야 할 정도로 변했다. 카메라도 흰눈이 조금이라도 쌓인 곳을 찾아다니느라 바빴을 정도다.

“합천에서 찍었던 두밀령 고지 전투장면은 너무 힘들었어요. 이 장면은 진석이 형 진태와 다시 만나게 되는 장면인데, 노멀한 대사가 하나도 없어요. 끊임없이 소리지르고, 화내고, 울부짖고 그러거든요. 그런데 계속되는 비 때문에 촬영은 연기되고, 감정은 자꾸 끊기고. 촬영장에서 감독님은 감독님대로 극중 감정이 최고조에 오르는 부분이다보니까 원하는 느낌을 얻기 위해서 반복해서 찍는데 저로선 힘들었죠. 서 있을 힘조차 없었으니까.”(진석 역 원빈)

7월 들어서면서 이번에는 우신(雨神)의 잦은 변덕이 제작진을 괴롭혔다. 한달 동안 촬영한 횟수는 고작 10회에 불과했다. 장마가 걷힌 8월 들어서도 호우는 계속됐다. 보조출연자 400명이 동원된 대규모 장면 촬영이 무산된 것만 두 차례. 일당과 장비를 계산하면 하루에 4천만원가량을 눈감고 헌납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스케줄과 예산에 적잖은 손실을 안긴 것이다. 오죽 마음이 급했으면 비닐하우스를 만들어 촬영을 진행하는 묘수를 내기에까지 이르렀을까. 한편, 5일 촬영에 1일 휴식이라는 강행군을 치러왔던 만큼 누적됐던 피로를 풀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크랭크업 날짜가 40일가량 늦춰진 위기상황을 맘 편히 받아들일 스탭과 배우들은 없었다.

5월까지 전체 촬영분량의 60%를 완수한 것이 그나마 유일한 위안이었다. 크랭크인 직전에 제작진이 제시한 촬영 스케줄은 살인적이라 할 만큼 강도가 높았다. 애초 제시한 촬영횟수는 135회. 9월 중순에 크랭크업한다고 했을 때 210일 만에 130회 이상을 소화해야 했다. 2주 정도의 장마와 다음 촬영장소로 이동하는 데 들어가는 소요시간을 포함하여 50일을 제하면, 160일 안에 135회의 촬영을 마쳐야 했던 것이다. 이성훈 프로듀서는 태풍까지 겹쳤지만, “6월까지 찍어놓은 분량이 많아서 개봉을 늦춰야 하는 상황을 막을 수 있었다”면서 “묵묵히 자리를 지켜준 스탭과 배우들의 공이 컸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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