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정의하는 기준은 다양하고 복잡하다. 그러나 원리는 간단하다. 진짜 행복은, 나 자신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에 있다. 배우 정진영은 그러므로 행복한 사람이다. 스스로도 그렇게 말할 것 같다. 그는 현재를 받아들이고 미래에 무리수를 두지 않는 순리주의자다. 어떤 이들이 자기 욕심을 다 담아넣기에 심장 한쪽만으론 부족하다 느낄 때, 그는 욕심이란 걸 아예 염두에 두지 않는다. 단순히 “기질 차이”이기도 하겠지만, 배우를 생업으로 삼는 사람에게서 보기 드문 태도이기도 하다. 선택할 권력이 있는 듯 보여도 결국은 선택받아야 할 입장으로서, 욕심내고 박차를 가해 커리어를 가꿔도 늦은 출발을 메울 수 있을지 걱정스러울 때에, 여유가 넘쳐 보일 따름이다.
순리대로 살되 정진영은 수동적이거나 게으르지 않다. 영화와 연기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는 “공부한다”는 표현을 즐겨 썼다. <황산벌>의 김유신을 연기하기 위해서도 많은 공부를 했다고 한다. “원래 오래 생각해야지 답이 나와요. 계속 공부하죠.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모르던 게 보여요. 새로운 것도 나오고. 재밌어요, 공부하는 게.” 학창 시절, 쉬는 시간에도 엉덩이 붙이고 앉아 책에 얼굴 파묻던 친구가 이런 말을 했으리라. 그렇게 꼼꼼히 준비하는 성실함 때문인지, 그는 현장에서 떠오르는 즉흥적인 생각엔 별로 신뢰를 두지 않는다. “내가 반짝반짝하는 머리가 없어서 그런 것 같아요.” 천만의 말씀. 기질 차이다. 기질상 정진영은 “집중이라도 해야 간신히 하는” 것이다. 작품에 들어가 있는 동안은 친구들도 못 만나고 오로지 현장에 눌러앉아 있다.
그렇더라도 현장에서 감독의 디렉션이 달라지면 정진영은 어김없이 감독의 생각을 따른다. 배우가 아무리 영화를 잘 알아도 영화 전체를 보는 눈은 감독을 따를 수 없다는 것이 그의 믿음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도 그게 맞아요. 항상 감독의 생각이 더 옳았어요.” <황산벌>의 김유신 역은 그래서 연기하기가 수월했나보다. 선생님은 준비물과 다른 수업내용으로 학생을 놀라게 하기보다 학생의 준비물에 맞춰 수업을 진행하셨다. “인물을 해석할 때 감독님이 전적으로 내 의견을 수용해주셨어요.”
욕심은 부리지 않되 주어진 현재에 최선을 다하는 것. 이런 삶의 방식대로라면 그의 앞날이 눈부시게 화려한 배우의 인생과는 거리가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공격수의 매서운 공격력도 수비수의 현명한 수비력이 없다면 돋보일 수 없다. 공격 행로에 따라붙는 수비의 몸놀림을 놓치지 않아야 스포츠를 즐기는 재미도 배가 된다. 충무로에서의 자기 위치를 수비수라 인정하는 정진영도 어쩌면 자신이 빛날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을 본능적으로 아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결국은 순리주의자의 겸손한 변명이 따라붙지만. “사람은 자기 성격대로 살아야 돼요. 그렇게 살게 돼 있어요. 그게 운명이거든요. 운명을 못 바꾼다는 건 딴 게 아니라 성격을 못 바꾼다는 말과 같은 거예요. 자기 성격 때문에 어떤 특정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거고, 그러니까 그게 자기 운명인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