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矛盾의 두 남자, <황산벌>의 박중훈+정진영
2003-10-08
글 : 김혜리
글 : 박혜명
사진 : 오계옥

장기판이라도 준비할 걸 그랬나? 내심 그렇게 후회했다. <황산벌>의 ‘쌍웅’ 박중훈과 정진영에게는 장이야 멍이야 주고받을 게임의 규칙이 필요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두 배우가 몰고온 공기는, 온도도 냄새도 몹시 달라 경계선에는 엷은 구름이라도 엉길 듯했다. 박중훈이 빠르게 물으면 정진영은 느리게 대답하고 정진영이 뒤로 몸을 기대면 박중훈은 앞으로 몸을 기울인다. 박중훈은 ‘공중 돌아 뒤후려차기’ 같은 개인기로 영화 한편을 혼자 감당하는 일에 이력난 프론트맨이고, 정진영은 색깔 다른 여러 배우와 영화를 맞들고 리듬을 타는 일에 통달한 베이스 주자다. 황산벌 전투가 계속되는 동안 ‘12시간 촬영 12시간 휴식’의 노동조건을 계약서에 명시한 박중훈은 촬영지 부여까지 바지런히 출퇴근하며 전열을 가다듬었고, 정진영은 ‘군막’에 아예 유숙하는 쪽을 택해 그의 부인이 일주일에 한번 정진영을 서울로 불러올리는 <그것이 알고 싶다>를 고마워할 지경이었다.

완성된 영화 <황산벌>에서 계백과 김유신이 마주 서는 장면은 딱 두신뿐이었지만, 정진영의 표현대로 두 배우는 러닝타임 2시간 내내, 아니 영화를 촬영한 3개월 내내 서로 지긋한 눈싸움을 벌이는 심정이었다. 그러나 두 장수가 들려주는 멋진 전투의 요건은 멋진 합창의 요건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비록 “이 창을 받아부러라!” “내 칼을 받아라카이!” 같은 호통은 오가지 않았으나, 용장(勇將)과 지장(智將)이 나눈 한담은 충분히 팽팽했다.

#1 1987년 흥행 1위와 1998년 흥행 1위

박중훈(이하 박) | 우리 처음 만난 게 1998년 겨울이던가? 스크린쿼터 캠페인을 동숭동 소극장에서 했는데 뒤풀이 회식에서 인사를 나눴지. 서울대 나온 영화배우란 존재가 대단한 의미는 없다 해도, 조그만 의미는 있는 것 아니에요? 사실 70, 80년대엔 영화하던 사람들이 못 배운 사람 취급 받았는데 영화시장이 커지면서 인재들이 들어오니 나는 좋았어요. 그런데 우연히 공동의 선배가 있는 걸 알았죠. 고교 선배인 형이랑 정진영씨가 대학 시절 스포츠(학생운동)를 하면서 무척 친했나봐. (웃음) 그러던 즈음 영화인들이 모이는 아리랑 축구단에서 수비수와 공격수로 뛰게 됐고.

정진영(이하 정) | 배우로서도 내 전공은 수비수야. 박중훈씨는 공격수고.

박 | 황산벌 전투에서는 계백이 수비하는 쪽이지만 영화에서 드라마를 끌고 가는 역할로 보면 공격수에 가깝지. 정진영씨는 축구에 비유하자면 홍명보 같은 수비수가 되길 원하는 것 같아요. 나는 죽어도 수비를 못할 거라는 느낌이 있거든요. 마구 뛰어서 골을 넣고 싶어하는 스타일이지. 그렇게 같이 축구하고 생각나면 술마시다가 <황산벌>에서 제대로 만났지. 그런데 나를 영화에서 처음 본 건 언제예요?

정 | <그들도 우리처럼>인가.

박 | 아니, 그럼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를 안 봤단 말이에요?

정 | 안 봤는데.

박 | 그 당시 굉장히 흥행했던 영화인데? ‘스포츠권’에서는 안 좋아했나? 1987년 흥행 1위인데? (진정하고) 나는 <약속>으로 정진영씨를 처음 봤고 직접 얼굴을 본 건 청룡영화제 조연상 타는 모습을 객석에서 본 게 처음이네. 거 참, 기억력 좋다. 이거, 이야기하다보니 후끈 달아오르네.

#2 비우고 싶은 욕심과 채우고 싶은 욕망

박 | 정진영씨는 갖고 싶은 게 없어 보여. 돈이나 인기도 그렇고, 딸 하나 있었으면 싶지 않냐고 물어도 실제로 없으니까 잘 모르겠다고 하고. 그렇다고 현실에 순응에 자족하는 부류로 보이지도 않는데 묘해요.

정 | 나는… 잘 모르겠어. 뭘 갖는다는 생각을 별로 못해요.

박 | 모든 것을 소유할 수 없다, 그런 이야기예요?

정 | 욕심이란 것이 허망해요. 욕심이 생기면 해결해야 하니 힘들고 피곤하잖아. 안 갖는 것이 나아. 그냥 생기면 물론 좋지. 돈도 딸도 있으면 좋지만 가지고 싶다고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내가 했던 영화에 애착이 강한 거야 이미 내가 행한 일이고 내 욕심이 반영되어 있으니 당연하지만. 나도 야심은 있어요. 그런데 그 야심이 지극히 나다운 것이라고 할까?

박 | 그러니까 풀어서 얘기하면 무슨 소리야?

정 | 나를 잘 돌보고 싶어요. 내가 스스로에게 떳떳하고 싶어. 나쁜 행동을 하고 싶을 때도 있지만 참고 안 하면 내가 떳떳하잖아.

박 | 그러니까 무엇을 소유하기 위해 무리수를 두고 싶지 않다? 계속 수필을 쓰시는데 제발 뜨거운 심장을 차가운 머리로 식혀서 설명을 해줘요.

정 | 내가 그것이 원래 잘 안 돼서, 끄응. 동근(<와일드카드>에서 공연한 양동근)이랑은 서로 무슨 말 하는지 재깍 아는데….

박 | 허어, 양동근 좀 만나봤음 좋겠네. 어쨌거나 나는 반대예요. 나는 욕심 때문에 오늘날 여기까지 왔어요. 더러는 탐욕과 과욕, 어쩌면 야욕까지 포함해서. 그건 욕심일 수도 야심일 수도 욕망일 수도 있는데 불혹을 바라보며 돌아보니 내가 너무 빡빡하게 살아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 면을 다스리는 것을 숙제로 삼고 있어요. 그런데 정진영씨는 가식도 아니면서 순리대로 물 흐르듯 사는 것 같아요.

정 | 그래, 난 순리주의자예요. 억지로 되는 일은 없다고 생각해. 익숙한 일이 좋고 새롭게 뭘 하는 걸 싫어해요. 어차피 살다보면 불가피하게 낯선 일은 다가오게 마련이니 되도록 안 하자주의야.

박 | 나는 배우고 타인의 인생을 사는 사람이니, 내가 모르는 방식, 다른 진실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면 궁금증이 솟고 기뻐요.

정 | 영화가 요구하는 새로운 일은 배워야지. 내가 목표를 갖고 억지로 한 일은 고등학교 때 대학 가려고 공부한 이후로 없었던 것 같아. 배우가 되어서 맡은 역할에 노력하듯 닥치는 일을 할 뿐이지. 그 뒷일은 어차피 모르는 거니까.

#3. 수비수의 피로와 스트라이커의 고독

정 | 기질적으로나 영화적으로나 나는 수비수인 것 같아요. 지금 충무로에서 나는 기능적으로 용도가 수비수예요.

박 | 오래 갈 거야. 골을 못 넣어도 되고. (웃음)

정 | 공격수에게 공을 계속 차주는 거죠.

박 | 그러다가 가끔 중거리슛도 때리고 말이지.

정 | 그래서 내가 상대방한테 어떻게 맞춰야 할까를 궁리하죠. 이번에는 중훈씨가 공격수다 하면 자 그러면 어떻게 할까 생각하고. <황산벌>에서 둘이 같이 나오는 장면은 단 두신뿐이지만 둘이 서로 마주보는, 끊임없이 서로를 의식하는 영화란 말이에요. 계백 역이 어떤 모양으로 나올지 몰라 사실 고민했죠. 처음에는 박중훈씨 특유의 코미디일 줄 알았어요. 그러면 어떻게 받아야 하나, 받아야지 또 받아치니까. 그런데 박중훈씨가 정극연기로 밀고 나오니 내쪽에서 오히려 코미디를 살짝살짝 넣어줄 수 있었어. 만약 박중훈씨가 코미디로 갔다면 내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겠지.

박 | 그렇게까지 생각한 줄은 몰랐는데.

정 | 많이 해온 역할이니까요. 이를테면 <약속>에서 나는 박신양을 보이기 위해 성립하는 역이었고 그뒤로도 계속 나는 포수고 저쪽이 투수인 위치에 있었어요. 그만큼 연기가 똑같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대비가 필요하니까 상대방을 관찰하게 되죠. 공격수가 되고 싶은 생각도 없지 않아요. 그런데 내게 맡겨진 포지션이 수비수이니 수비를 해야지. 그리고, 심지어 수비가 재밌어!

박 | 이윽고? 마침내? (웃음)

정 | 축구에 빗대면, 중훈씨는 저쪽 앞에서 골 넣으려고 왔다갔다 하잖아. 그 모양을 후방에서 보고 있으면 어쩐지 재밌어. 그리고 알아요? 뒤에서 보면 축구가 잘 보여. 어떨 땐 골 넣으려고 중훈씨가 애쓰는 거 보면, “야, 되게 힘들겠다. 왜 저리 넣으려고 그러지?” 하는 생각도 들어. (웃음)

박 | 방금 한 말로 공격수의 희열과 애환도 다 드러났네. 일단 힘들고, 골 넣으면 영웅되고 못 넣으면 야유받고, 게임 들어가기 전에 미칠 듯 부담되고. 크게 걸고 크게 따는 거지. <황산벌>은 정진영이라는 배우가 김유신을 연기함으로써 작품 전체에 신뢰감이 가고 영화가 우습게 안 보인다는 점에서 내가 수혜자이기도 해요. 즉, 둘의 모습이 포스터에 나갔을 때 내 캐릭터가 정진영씨의 존재로 인해 자리를 잡고 선명해지는 거죠. 나는 그런 배우와 있으면 나의 모자라는 부분이 채워지는 것 같아. 반면 태현이(<투 가이즈>에서 공연할 차태현) 같은 배우와 있으면 한없이 밝아지고.

#4 그리고 김유신과 계백

정 | 나는 일단 찍은 영화는 웬만하면 예뻐 보여요. 1년쯤 지나야 객관적인 눈이 돼.

박 | <바이오맨> 같은 작품을 찍어봐야 아무리 자기 영화라도 안 좋을 수 있다는 걸 알 텐데. (웃음) 정진영씨는 대부분 수준이 고른 영화를 찍어서 그런 거죠.

정 | <교도소월드컵>도 흥행은 안 됐지만 좋아했어요. 명작, 걸작은 아니더라도 새롭게 볼 여지가 있는 독특한 영화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듣는 사람들이 “너, 왜 그러냐?”고 그러데. (웃음) <황산벌>은 감독님이 ‘참여영화’를 표방했죠. 자발적으로 건의하고 연구하는. 그래서 팀별 연습이 많았고 신라 진영은 연극배우 출신도 많아 따로 모여 연습하고 술마시고 재미나게 찍었어요. 기자시사회 때 배우들이 그렇게 우르르 온 것도 다들 주인의식을 갖고 있어서예요. 역의 비중이나 편집된 양과 무관하게 진심으로 영화를 좋아하는 거지. <황산벌>은 박중훈씨보다 내가 먼저 출연을 결정했고 계백을 누가 하면 좋을까 이야기가 오가는 걸 봤죠.

박 | 내 캐스팅을 반대한 사람이 꽤 있었다던데요? 하긴, 당시로는 일반적인 캐스팅은 아니었으니까.

정 | 그때는 코미디가 너무 강해질 거라고 생각했겠지.

박 |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진지한 인간인데, 웃기는 재주가 많이 확대된 것 같아요.

정 | 원톱 코미디영화에서 보여준 개인기가 뇌리에 아직 남아 있으니까.

박 | 정진영씨가 파트너라서 좋았어요. 쓸데없는 경쟁이나 에너지 소모없이, 저쪽이 살아야 나도 존재 의미가 있다는 점을 공감하면서 작품 이야기를 할 수 있었으니까 미더웠지. 우리가 눈만 뜨면 김유신과 계백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니지만 여러 차례 깊은 대화를 하면서 “이쪽 진영은 이렇게 하고 있다”고 신호를 준 셈이죠. 예컨대 막판에 “김유신, 좀더 비열하게 가야겠다” 그런 말 했잖아요? 연기에 대한 본인 계획을 밝히면서 그걸로 나도 감을 잡으라는 깊은 뜻이었죠?

정 | 음, 꼭 감을 잡으라는 것은 아니었고 그냥 술먹다가 한 이야기 아니었나? (웃음)

박 | 패장이라서인지, 계백에 관해선 의외로 자료가 많지 않더라구요. 아주 간단한 팩트만 있으니 그것을 손상시키지 않는 전제하에 인간다움을 집어넣었죠. 처자를 죽였다는 사실이 너무도 단호하니까 인간적인 흔들림을 집어넣었죠. 용맹하고 우직한 장군을 머리 나쁘다고 보는 편견이 있는데 난 계백을 그런 식으로 보지 않았어요. 하지만 처자식을 죽인 것은 끝내 억지로 연기했어. 나 역시 아들 하나에 딸 둘을 키우는 아버지라 그 장면을 생각할 때면 아이들 자는 모습 보기가 힘들었지.

정 | 김유신은, 목표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지략 뛰어난 장군이죠. 가야파로 신분의 한계가 있는데, 대장군에 오르고, 김춘추에게 누이를 용의주도하게 시집보내고. 권력 최측근을 맴돌며 당나라군에 쌀배달도 가고. 황산벌 전투 7년 뒤 고구려를 무너뜨릴 때도 쌀배달을 가죠. 역사를 보면 ‘태대각간’이라고 김유신만 가진 벼슬이 있어요. 왕이 될 수 있는 인물이 왕이 안 된 거지. 이를테면 JP 같은 사람인데 굉장히 무서운 인물이에요. 그런 남자지만 계백한테는 콤플렉스가 있었을 거야. 측은해하면서도 두려워하는. “니 계백이 무서워 그러는 거 아이가?” 하는 대사 내가 넣자고 한 거예요. 콤플렉스가 보여야 이야기의 각이 나올 것 같았거든. 계백을 참수한 다음의 표정과 감정도 사실은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보는 기분이었을 거라고 상상했어요.

박 | 살리에리와 모차르트, 그 이야기 처음 들었을 때 참 감동했지.

정 | 이거 하다보니 재미있네. 자장면 시켜먹으면서 계속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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