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로 부산 찾은 감독 가이 매딘
2003-10-22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인터뷰에선 거짓을, 영화에선 진실을

세계에서 가장 기괴한 영화를 만드는 감독을 꼽으라면 누구나 한번쯤 캐나다의 데이비드 크로넨버그를 거론할 것이다. 그러나 그 데이비드 크로넨버그는 “가이 매딘의 영화를 보지 않고는 진정으로 낯선 영화를 봤다고 말할 수 없다”고 상찬을 물렸다. 마치 뉴욕의 우디 앨런이 그렇듯, 가이 매딘은 좀처럼 캐나다의 위니펙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의 외출은 무척이나 이례적인 일이다. 그가 부산에 온 것이다.

새 영화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2003)로 부산영화제를 찾은 가이 매딘은 영화상영 전 무대인사에서 “나는 거짓말을 많이 하기로 소문난 감독입니다”라고 농담을 던지며 상상의 내기를 제의했다. 하지만 그의 농담은 거의 언제나 진담이다. 1930년대 대공황의 위니펙. 맥주회사 사장 포트 헌틀리 여사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 선발대회를 개최하고, 각국에서 선수들이 모여든다.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는 <김리병원 이야기>(1988), <대천사>(1990) 등 그의 전작에 비해 비교적 이해 가능한 수위의 내러티브이지만 여전히 그 번지는 흑백과 불쑥불쑥 끼어들어 촌스럽기 그지없는 극단의 컬러와 말릴 길 없는 상상의 소품들이 순식간에 관객을 시각의 몽유병자로 만들어버린다. 가이 매딘은 독특한 자신만의 영화형식으로 이야기를 짓는다. 그래서 그는 정말 거짓말쟁이이며, 이야기꾼이다. 원래 이야기꾼은 이야기를 잘하게 마련이다.

은행출납계원, 페인트공이라는 평범한 직업에서 영화감독이라는 독특한 직업으로 인생의 항로를 바꾸게 된 계기는. 일단 페인트공을 하면서 상상을 해볼 수 있는 시간이 많았다. 또 그리 훌륭한 페인트공도 아니었다. 나에게 페인트공이라는 직업은 삶에 대한 게으른 접근이었다. 나는 표면적인 것들만 손보는 것이었지, 구조적인 문제를 손보지는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허물어진 집이 있으면 몇년 동안만 보기 좋게 만들 뿐이었다. 그런 점이 나를 우울하게 했다. 그래서 구조적인 문제를 다루기 위해 영화감독이 됐다.

당신의 데뷔작 <죽은 아버지>에서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아버지는 자꾸만 돌아와 아들의 주위를 서성인다. 특별한 경험인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들려달라. 아버지는 신사였다. 누구에게도 욕을 한 적이 없다. 그러다 갑자기 돌아가셨고, 나는 거의 매일 아버지에 대한 꿈을 꾸었다. 나는 꿈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꿈속에서 아버지는 우리 가족이 아닌 다른 가족들과 살고 있었다. 물론 아버지를 꿈에서라도 본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었지만, 다른 가족을 더 좋아한다는 사실이 가슴 아팠다. 아버지는 꿈에서나 현실에서나 인내심이 많지 않았다. 내가 잘해주려고 하면 죽어버리거나, 다른 곳으로 가버리는 것이었다. 뒤에 알게 된 사실인데 누군가 가까운 사람이 죽게 되면 자신이 버려졌다고 느끼는 현상이 굉장히 일반적인 것이라고 한다. 난 아버지가 돌아가신 몇년간 꿈을 꾸면서 조금씩 그 슬픔을 표현한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이 한번에 많은 슬픔을 느끼는 것이라면, 나는 조금씩 오랫동안 슬픔을 느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식으로 꿈에서 많은 영감을 얻는 편인가. 첫 번째 영화 <죽은 아버지>에서는 대부분이 꿈에 의한 것이었다. 그뒤에는 기본적인 스토리만 가져오고, 영화화할 때는 나름대로의 논리를 만들려고 노력한다. 나는 원시적인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다. 그래서 이런 점이 내게는 매우 유용하다. 나는 치장된 영화를 만들지 못한다.

스스로 “인터뷰에서 거짓말을 많이 하는 감독”이라고 했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항상 진실만을 말하려고 한다. 그러고나서 곧장 숨기려고도 하지만…. 인간의 진실이라는 것은 복잡한 문제인 것 같다. 나에게는 사람들이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이 흥미롭다. 진실은 실제로 추한 면이 있다. 사랑을 한다는 것이 항상 아름답지는 않으니까. 히치콕과 루비치 같은 감독들이 이런 사실들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사랑이라는 소재를 다루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에는 많은 방법들이 있는 것이다. 인터뷰를 할 때는 사실 거짓말을 좀 하지만 영화에서만은 진실을 말하려고 한다.

위니펙을 떠난 적이 없다. 그곳은 당신에게 어떤 곳이기에 그토록 상상력을 자극하는가. 그렇다. 영화를 만들기 위해 위니펙을 떠난 적은 없다. 사실 위니펙만큼 잘 아는 도시가 나에게는 없다. 어느 거리의 나무벽이 헐거워져 있는지, 지름길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어느 집 개가 사람을 무는지, 그 모든 걸 알고 있다. 아마도 다른 도시에 대해서 이만큼 알려면 평생이 걸릴 것이다. 나는 이런 친화성이 좋다. 나 자신만의 신화 속에 살고 있는 것 같다. 친구들이 있기 때문에 좋기도 하고. 다른 지역에서는 이렇게 자세히 알 수가 없다.

당신 영화에서 위니펙은 항상 환상적이다. 위니펙 주민들은 당신의 영화를 보고나서 어떻게 반응하는가. 굉장히 냉소적이고, 또 무시하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그 상황 자체가 그런대로 좋다. 어느 곳이던지 한 사람이 너무 성공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내가 많은 성공과 부를 쌓은 것이 아니기에 아직은 살 만하다. 하지만 지금보다 더 성공을 하면 정말 좋아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위니펙에 있는 사람들이 돈을 들여 내 영화를 보는 것 같지는 않다.

농담인가. 진심이다.

근친상간의 내용이 많다. 최근작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도 역시 그렇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염두에 둔 것인가. <조심>을 만들고 나서야 그리스 비극을 읽게 됐다. 지금은 굉장히 좋아한다. 대개는 만화책을 읽는 듯한 느낌이다. 92년에 <조심>을 만들었을 때 근친상간의 경험자들이 토크쇼 등에 많이 등장했었다. 그들의 고통이 너무 심하다는 데 동감했었다. 그러면서 내 친구 조지와 나는 근친상간에 찬성하는 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일렉트라>는 읽어봤지만, 아직도 <오이디푸스>는 읽어보질 못했다.

동화를 좋아하는가. 당신 영화는 어른들에게 들려주는 동화 같다. 그렇게 생각해준다면 나로서는 고마운 일이다.

러시아 무성영화에 대한 오마주를 볼 수 있다. 특히 <세계의 심장>. 어떤 영향을 받았나. 그 영화를 만들기 전까지는 러시아영화를 본 적이 없다. 굉장히 지루할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보고나서는 그 몽타주에 매료되었고, 나도 할 수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영화의 빠른 속도가 정말 마음에 들었다. 나는 긴 숏 하나를 정성들여 찍는 것보다 많은 숏을 찍는 것을 좋아한다. 러시아의 영화를 보고나서 내 영화의 편집속도도 빨라지게 되었다.

러시아영화는 프로파간다영화이다. <세계의 심장>도 프로파간다영화이다. 토론토영화제를 ‘기념’하여 만든 영화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축하하는 영화를 만들어야 하므로 <세계의 심장> 역시 프로파간다가 되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렇다면 당신 영화에서 정치적인 제스처를 읽어도 되나?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의 마지막 결승전은 세르비아와 미국이다. 어느 영화에서나 그 사람이 그 나라를 대표할 소지가 있다. 나는 꼭 미국이 결승전에 남길 바랐다. 두 형제의 대립도 말하고 싶었고. 반복하지만 나는 영화에 있어서는 진실하려고 한다. 뉴스에서는 많은 것이 왜곡되지만 강대국이 약소국에 비해 권력을 더 갖는 것은 사실이다. 현재의 미국이나 19세기의 영국처럼.

오히려 그 점에 대해 정치적으로 보려는 시각을 놀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건 아니다. 나는 하나의 결론만이 있는 영화가 아니라 여러 접근이 가능한 영화가 좋다. 미국을 말한다는 것은 굉장히 민감한 문제이긴하지만, 어쨌든 그런 점은 내 영화가 말해줄 것이다.

이사벨라 로셀리니(포트 헌틀리 여사)를 여주인공으로 캐스팅한 이유는 무엇인가. 항상 그래왔지만 내 영화는 동시대의 다른 영화들과는 멀리 있다. 그 점에서 이사벨라 로셀리니만이 내 영화에 적절할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녀는 영화의 과거역사에 연결되어 있는 배우이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그녀의 아버지는 로베르토 로셀리니이고, 어머니는 잉그리드 버그만이다. 마치 50년 정도의 시대를 거슬러 올라간 듯한, 다른 시대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을 내게 주었다.

많은 영화에 몽유병자와 기억상실증 환자들이 등장한다. 이유가 있는가. 그렇다. 특별한 이유가 있다. <대천사>에서는 거의 모든 인물들이 몽유병자와 기억상실증 환자로 등장한다. 사람은 망각하기 때문에 살 수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을 다 기억한다면 너무나 자신이 싫어질 것 같다. 망각은 생존을 위한 것이다. 이것이 우리 자신들을 재밌게 보여주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원래 이번 영화에도 많은 몽유병자들이 등장하는데 한명만 남겨놓고 편집과정에서 줄였다. 실제 대공황 속에서는 가족부양의 어려움을 잊고 싶어하는 몽유병 환자나 기억상실증 환자들이 많았을 것이다. 너무나 우울해서 예전에 살던 어느 곳인가로 헤매는 사람들이 가득했을 것이다.

스크린의 주변을 흐릿하게 하는 효과를 왜 매번 선택하는가. 이런 효과는 <김리병원 이야기>를 할 때부터 사용했다. 있는 것이 없거나, 없는 것이 있는 것처럼 보여서 좋았다. 렌즈의 주변에 바셀린을 발라 이런 효과를 내는 것이다. <김리병원 이야기>를 촬영할 때 영화현장에 전선이 많았다. 19세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이므로 그것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희미하게 번지게 했다. 이것이 꿈을 꾸는 효과를 준다는 것을 알았고, 그 다음부터 계속 사용하게 됐다.

흑백만을 주로 고집하거나 컬러를 쓸 때에도 극단의 원색만으로 제한한다. 일단은 내가 무척 게으르기 때문이다. 모든 색을 다 따라잡는 것이 나에게는 힘들다. 컬러는 조심스럽게 사용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특정한 색이 의미를 갖게 되고, 잘못된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다. 나의 첫 번째 컬러영화 <조심>을 만들때 한번에 한 가지 색, 또는 두 가지 색만 사용한 것도 그 때문이다.

사진 조석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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