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3회를 맞은 인디다큐페스티발은 올해 행복한 고민에 휩싸였다. 이제 국내 유일의 다큐멘터리영화제로 자리매김한 이 행사의 메인 프로그램이랄 수 있는 국내신작전이 유난히 풍작이어서 상영작 선정에 어려움이 많았던 것이다. 프로그램팀의 최종 결정은 가능한 한 많은 작품을 선보이자는 것. ‘실험, 진보, 대화’의 슬로건에 부합한 신작전의 작품들은 장·단편 19편으로 예년보다 풍성하지만, 이 작품들을 모두 선보이기 위해선 작품당 1회 상영으로 한정해야 하는 난점이 있었다고 한다(예비 관객은 관람 계획에 참고하시길!). 올해 국내신작전 상영작들에서 두드러지는 특징은 사회의 다양한 시공간에서 펼쳐지는 사건들을 다각도에서 포착한 작품들, 짧게는 수개월에서 길게는 10년까지 오랜 세월을 투자한 작품이 유난히 많았다는 사실. 뉴스와 드라마를 차용하는 등의 형식적 시도도 부쩍 대담해지고 다양해졌다는 것이 프로그래머의 전언이다. 이번 인디다큐페스티발은 국내신작전 외에도, 해외에서 화제가 된 신작 다큐멘터리들을 소개하는 ‘올해의 초점’, 독창적인 작품세계로 미국의 가장 중요한 독립영화작가로 평가받는 ‘로버트 크레이머 회고전’, 미국 공영방송 <PBS>의 독립다큐멘터리를 소개하는 ‘P.O.V 특별전’ 등으로 꾸려진다. 특히 ‘P.O.V 특별전’과 연계해서는 포럼이 마련돼 공영방송과 독립 다큐의 만남이 가져올 시너지 효과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는다. 오는 10월25일부터 30일까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리는 이번 행사는 헤르츠 프랑크의 자기 성찰적인 작품 <플래시백>으로 시작해 비전향 장기수들의 내면에 바짝 다가간 김동원 감독의 역작 <송환>으로 막을 내린다.
인디다큐 페스피벌 상영작
<송환>
최근 비전향 장기수 김선명씨의 삶을 다룬 홍기선 감독의 극영화 <선택>이 공개돼 화제를 모으고 있지만, <분단을 넘어선 사람들> <풀은 풀끼리 늙어도 푸르다> 등 독립 다큐멘터리 진영의 카메라는 이미 오래전부터 비전향 장기수들을 지켜봐왔다. 그리고 소문만 무성하던 김동원 감독의 10년에 걸친 기록 <송환>이 드디어 완성됐다. <송환>은 1960년대 남파돼 30년간 옥살이를 한 조창손씨 등 ‘비전향’ 장기수들과의 첫 만남, 요양원 생활, 봉천동에서의 독립생활, 변혁운동 참여 등을 거쳐 남북 화해무드를 타고 이뤄진 송환운동과 송환 이후 북한에서의 삶 등을 아우른다. 대단한 신념을 지켜낸다기보다는 그저 자기 자신으로 살고 싶었다는 장기수들의 이야기 뒤로는 남과 북 사이에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둘러쳐진 거대하고 견고한 벽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내일 곧 통일이 이뤄지기라도 하는 듯 언론이 호들갑을 떨고 있을 때 장기수 북송 현장엔 납북자 가족, 전몰군경 유가족의 항의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한눈에 보여주는 풍경이 아닐 수 없다. 촬영기간 10년, 촬영인원 10명, 촬영한 테이프 500개, 기록된 시간 800시간, 최종 편집본 159분. <송환>과 관련된 이런저런 숫자들은 그냥 숫자가 아니다. 단순히 다큐멘터리의 소재로 접근했다면, 대상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절절하지 않았다면, 그 오랜 시간과 공력을 투자하기란 불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학교>
민주화 투쟁이 학교 밖에서만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학교>는 재단이사장의 횡포에 대항해 무려 12년간 지속돼온 학원 민주화 투쟁을 따라잡은 다큐멘터리다. 1990년 성낙돈 교수의 부당한 재임용 탈락 사건을 계기로 촉발된 투쟁은 학생은 물론, 교수, 교직원, 동문까지 합류한 것이었지만, 매듭은 수월하게 맺어지지 않았다. 재단이사장이 물러서지 않았고, 자신의 족벌 세력을 동원해 학교 운영권을 독식하려 한 것이다. 그 지난한 투쟁의 기록을 공개한 뒤에 영화는 2부에서 이 학교의 설립 초기사로 거슬러올라간다. 그리고 덕성여대를 설립한 차미리사씨의 공적이 충분히 알려지지 않았던 연유가 훗날 민주화 투쟁에 원인을 제공한 이사장의 가족사와 직결돼 있었다는, 기막힌 반전을 공개한다. 결국 문제의 이사장이 물러나고 관선이사가 일부 파견되는 것으로 일단락된 이 투쟁의 역사는 관계자들의 인터뷰와 기록 화면으로 구성돼 있다. 변화된 학교의 상황에 따라 사람들의 입장이 각기 어떻게 달라져왔는지, 과거는 현재와, 현재는 미래와 어떤 상관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꼼꼼히 포착하고 있다.
<나는 다큐멘터리 감독이 되고 싶었다>
새로운 밀레니엄의 시작을 축하하며 흥성대던 2000년. 카메라는 ‘새천년’이나 ‘희망’과는 별 관계가 없어 보이는 부산대교 밑을 거닌다. 자신의 노천 침실을 공개한 노숙자는 소원이 “고통없이 죽는 것”이라고 한다. 진심을 담아서, 그는 그렇게 말한다. 부산대교 밑에서 함께 생활하는 노숙자들은 사소한 이유로 때론 이유없이 싸움을 벌이기도 하지만, 엄격한 대장을 중심으로 나름의 규율을 지키며 생활해나간다. 그리고 그들의 삶을 카메라에 담고 싶어하는 이에게, 아무 조건없이 그들의 가감없는 일상을, 그들의 삶과 죽음을 노출해 보인다. 2년이라는 세월이 흐르고, 그 사이 몇몇은 병이나 사고로 세상을 떠난다. 찬송가를 부르며 구원을 소망하던 이도, 다리 밑의 살림을 책임지던 여성 노숙자도, 그리고 감독을 ‘딸래미’라 부르던 대장도 떠나간다. 작품의 진정한 시작은, 그리고 의미는, 그들 삶을 피부로 느끼는 것이라던 대장의 말은, 그저 다큐멘터리 감독이 되고자 했던, 그래서 적절한 소재를 찾아 촬영하려 했던 감독에게 귀중한 유산이 된다.
<D-?>
<너희가 중딩을 아느냐>로 깜찍한 영상 반란을 일으킨 아이들 중에서 유일하게 그리고 꾸준히 필모그래피를 늘려가고 있는 유소라는 지난해 ‘대한민국 고3’이었다. 수능을 50일 앞둔 날부터 그는 자신과 친구들의 일상을 기록하기로 한다. 수업을 받고 도시락을 먹고 월드컵과 연애의 후유증을 논하고 모의고사를 치르는 순간에도 그는 카메라를 끄지 않는다. 선도부 가입 후보들의 자질 테스트인 ‘선도부 쇼’나 교실 컴퓨터의 포르노사이트 서핑 흔적을 둘러싼 추리 등의 코믹한 사건들도 벌어지지만, 수시모집에 합격한 친구들에게서 ‘오로라빛’을 보는 아이들은 수능일자가 다가올수록 불안하고 우울해지기만 한다. “애벌레가 있어. 다른 애벌레들이 어디론가 막 올라가니까, 그냥 따라 올라가거든. 그런데 올라가보니까 아무것도 없는 거야.” <꽃들에게 희망을>을 인용한 한 친구의 말을, 수개월이 지나 이제는 대학생이 된 유소라는 절감한다. 누구나 한번은 겪었음직한 수험생활이지만, 이처럼 진솔하고 밝고 예쁜 기록은 일찍이 없었을 것이다. 어둡고 고단한 시간 앞에서도 젊은 재능은 기죽지 않았다.
<메이의 미국>
베트남 소녀의 미국 체험기. 베트남 여고생 메이는 미시시피의 시골 고등학교에 교환 학생으로 가게 된다. 비교적 유복하게 자란 메이는 명랑하고 호기심이 많은 편으로, 미국 생활에 커다란 꿈과 기대를 갖고 있다. 미국인 가정에서 머물게 된 그는 불안정하고 우울한 그들에게 잘 적응하지 못한다. 게이 바에서 만난 친구, 젊은 흑인 부부, 베트남 이민자들과 어울리면서, 메이는 미국에 대해 그 자신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미국에서 대학에 진학하려던 계획은 잘 추진되지만, 엄청난 학비를 조달하는 것이 큰 문제다. 레스토랑과 네일 숍을 전전하는 메이의 얼굴엔 점점 그늘이 진다. <메이의 미국>은 드라마틱한 사건을 나열하는 대신 다양한 사람들과의 만남이 거듭되면서 내면의 변화를 겪어가는 과정을 따라잡고 있다. 꿈 많던 소녀에서 무력한 이방인으로 내려앉은 메이의 내면을 비추면서, 영화는 ‘기회의 땅 미국’은 순진한 환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역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