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추천작7편 - 전통과 전복이 공존한다
세바스티안 Sebastian
성 세바스티안은 보티첼리, 베르니니, 소도마 등에 의해 화살로 고슴도치가 된 미청년으로 묘사한 순교자다. 데릭 저먼은 군인임에도 신앙을 이유로 훈련을 거부하는 세바스찬과 그를 벌하는 상관 세베루스 사이의 긴장을 사도마조히스틱한 동성애 관계로 그렸다. 심신의 고통으로 팽팽해진 근육과 작열하는 태양 아래 사자들처럼 뒤엉킨 팔다리가 가히 남성 누드의 황홀한 향연을 이룬다. 모든 대사가 고대 라틴어로 촬영됐음에도 불구하고 에로틱하다는 평판에 힘입어 런던 개봉 당시 “파졸리니 영화의 흥행기록을 깼다”는 것이 감독의 자랑. 주로 부유한 동성애자들의 사재로 제작비를 충당한 것으로 알려졌고, 이탈리아 사르디니아에서 촬영하는 호사를 누렸다. 무엇보다 이 영화를 통해 스크린에서 자아가 대변되는 해방감을 느낀 게이 관객의 반응이 데릭 저먼의 의욕과 연대감을 크게 자극했다.
희년 Jubilee
엘리자베스 1세의 희망에 따라 천사 아리엘은 그녀를 미래의 영국으로 보낸다. 여왕이 도착한 해는 마침 엘리자베스 2세의 즉위 25주년(silver jubilee). 그러나 거리에는 축포 대신 총성이 난무하고 아름다웠던 영국식 정원은 플라스틱 꽃의 정원으로 바뀌어 있다. 여자 우두머리 보드가 이끄는 펑크 로커 지망생, 괴짜 역사가, 게이 커플의 공동체는 “진보가 낙원을 대신할 것”이라고 외치는 미디어 재벌, 경찰과 충돌한다. <비지터>식의 시간여행이 아니라 현대의 사건이 줄거리를 이루고 엘리자베스 1세의 쓸쓸한 시선이 사건을 바라보는 틀을 제공하는 식이다. 1970년대를 “우리 시대의 그림자”라 부르는 여왕의 대사는, 엘리자베스 1세의 치세를 황금시대인 동시에 ‘비극적’ 산업화의 여명기로 보는 감독의 역사 해석을 보여준다. 애덤 앤트가 키드 역으로 출연한다.
템페스트 The Tempest
1611년 쓰인 셰익스피어의 마지막 희곡을 재해석한 작품. 피터 그리너웨이의 <프로스페로의 서재>와 비교해볼 만하다. 딸 미란다를 기르며 외딴 섬의 독재자로 군림하는 프로스페로 박사는 자신을 축출한 동생의 배를 난파시킨다. 그러나 표류하다 섬에 밀려온 나폴리 왕자 페르디난드와 미란다의 사랑은, 프로스페로가 지배하는 질서를 흔들어놓는다. <스토미 웨더>가 축가로 불리는 포스트모던한 결혼 축하 파티가 압권. 이성애자 커플의 결합이 표면상의 결론이지만 판타지로 가볍게 처리된 인상. 경찰국가적 통제정치가 붕괴되고 성 역할과 노동의 분배가 해체되는 주변 스토리에 무게가 실린다.
카라바지오 Caravaggio
미술상 니콜라스 윌 잭슨이 제의한 작품으로 본래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에게 갈 프로젝트였다고 전해진다. 빛의 화가 카라바지오의 일대기를 임종하는 화가의 회상으로 풀어냈다. 카라바지오가 남성 모델을 그린 특별한 필치에서 확신을 얻은 데릭 저먼은 16세기 거장을 게이로 설정하고 신앙과 귀족의 물질적 후원, 섹슈얼리티 사이에서 그가 겪었을 갈등을 극화했다. 모델 라누치오와 그의 애인 레나 사이의 삼각관계가 기둥 줄거리. 카라바지오의 회화를 활인화로 감쪽같이 재현한 숏들이 유명하다. 역시 시대착오, 패스티시 기법을 적극 기용한 영화로 오토바이, 타자기 등의 현대적 소품들이 천연덕스럽게 등장한다. 데릭 저먼의 영화 중 가장 대중적인 부류다.
대영제국의 몰락 The Last of England
대처 정권을 ‘성공을 가장한 재난’이라고 부르며 혐오했던 데릭 저먼에게 1980년대 영국의 풍경은 폐허나 다름없었다. <대영제국의 몰락>은 대처리즘 치하 영국사회의 불모성을 묵시록적 이미지로 그린 영상시. 저먼의 홈비디오와 환경파괴를 기록한 필름, 스펜서 리와 틸다 스윈튼의 연기가 화면에 흐르는 동안 저먼은 T. S. 엘리어트와 앨런 긴즈버그의 시를 읽는다. 슈퍼8mm로 찍은 뒤 비디오로 옮겨 효과를 넣고 다시 35mm로 블로업했다. 저먼의 마돈나였던 배우 틸다 스윈튼의 숨막히는 아름다움만으로도 티켓이 아깝지 않다.
에드워드 2세 Edward II
“부왕이 서거했으니 나와 함께 왕국을 나누자.” 에드워드 2세는 즉위 즉시 총신 갸베스톤에게 편지를 띄운다. 통치보다 예술을 좋아하고 왕비를 버려둔 채 갸베스톤을 총애하는 에드워드 2세는 귀족의 불만을 사고, 모욕당한 왕비 이사벨라는 정부 모티머와 반란을 꾀한다. 부왕이 죽은 뒤, 모후와 모티머를 우리에 가두고 액세서리를 걸치고 춤추는 어린 에드워드 3세의 모습은 동성애적 질서의 궁극적 승리를 암시한다. 정치적 공간이 부재했던 전작에 비해 진일보했다는 찬사도 있었으나 크리스토퍼 말로의 풍부한 텍스트를 게이 인권 프로파간다로 전락시켰다는 비판도 따랐다. 명인 샌디 포웰이 담당한 의상도 눈요깃거리. 디자이너 드레스와 파시스트 군복, 막스 앤 스펜서 잠옷이 공존한다.
비트겐슈타인 Wittgenstein
오스트리아 언어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의 생애를 그린 작품으로 내러티브영화에 대한 데릭 저먼의 새로운 접근을 보여주는 수작이다. “안녕하세요, 저는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이고 천재입니다” 하는 소년의 자기 소개로 시작하는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자의 가정환경, 버트란드 러셀 밑에서 수학한 케임브리지 유학 시절, 세계대전 참전, 존 메이나드 케인스의 연인 조니와의 관계를 따라가며 세상을 논리로 요약하고 싶어했던 총명한 소년이 우주를 운행시키는 것은 불명확성임을 발견하기까지를 보여준다. 테리 이글턴이 쓴 시나리오가 들려주는 철학적 논증의 대사들은 종종 가장 감상적인 독백보다 깊은 감동을 준다. 거의 모든 신이 연극 관객의 시선에 해당하는 평면에 카메라의 시선을 고정했고, 인물과 사물 나머지 부분은 암흑으로 처리됐다. 데릭 저먼의 스타일을 증류시켜 요체만 깔끔하게 걸러낸 듯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