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을 향해 돌을 던져라
영국의 퀴어감독 데릭 저먼(1942∼94)은 끊임없이 세상을 향해 흘러든 예술가였다. 르네상스 시대 정신을 사랑했을 뿐 아니라 스스로 르네상스 맨이었던 그는 화가로 출발해 불꽃같은 영화를 만들었고 글을 책으로 묶었으며 누구보다 아름다운 꽃과 나무를 가꾼 탁월한 정원사였다. 이성애적 질서와 자본주의적 논리의 지배를 묵시록적 징후로 바라보았던 데릭 저먼에게 영화는 실락원을 찾아 헤매는 몸부림이거나 그가 창조한 파라다이스였다. 문화학교 서울은 11월1일부터 14일까지 데릭 저먼 감독의 장편 전작과 실험 정신의 첨단을 엿보게 하는 단편, 뮤직비디오까지 총 26편을 서울 아트시네마에서 상영하는 회고전과 두 차례의 강연을 마련했다. 탐미적이면서도 통렬한 데릭 저먼의 영화세계를 온전히 탐험할 수 있는 이번 기회는, 황홀한 도피와 차가운 각성을 선사할 것이다.
에이즈 합병증으로 숨지기 1년 전, 데릭 저먼은 <BBC>의 인터뷰에 응했다. “당신이 어떻게 기억되길 원하나요?” 이미 쇠약해진 감독은 예사롭지 않은 마지막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글쎄요, 증발하는 것도 근사할 것 같습니다. 내가 자아낸 거미줄을 다 갖고 사라지고 싶어요. 완전한 소멸, 그것이 나의 소망입니다.”
하지만 흔적없이 잊혀지는 것은 이 다재다능한 예술가가 제대로 해낼 수 없는 몇 안 되는 일 중 하나였다. 실험, 반골, 액티비스트…. 데릭 저먼을 요약하는 수사들은 하나같이 뜨겁기만 했다. 저먼은 투사였다. 20여년의 커리어를 통틀어 주류영화 산업 외곽에 머물며 영화문법을 실험했고, 영국사회의 동성애 혐오증을 영화로 공격하는 동시에 대처 정권의 동성애자 탄압에 저항하는 데모 대열에도 앞장섰다. 그가 싸우는 방식은 단호했다. 영국의 국가적 정체성에 이의가 있으면 아예 권위의 심장부인 교회와 왕조의 역사를 게이의 시선으로 고쳐 썼고, 주류 내러티브 영화형식에 대한 도전은 마지막 작품 먼<블루>에서 급기야 75분의 코발트색 화면과 내레이션으로 수렴됐다. 그러나 데릭 저먼을 전통에 침뱉은 반항아로만 규정하는 것은, 심각한 오해로 이어질 수 있다. 전통은 저먼에게 영감의 저수지였다. ‘르네상스 삼부작’으로 불리는 <희년> <템페스트> <에드워드 2세>를 비롯한 그의 영화들은, 르네상스 회화, 셰익스피어와 크리스토퍼 말로의 문학, 벤자민 브리튼의 음악, 대영제국 수립 이전의 영국 역사와 풍광에 거의 전적으로 소재를 의존한다. 저먼은 자본주의가 황폐화하기 이전의 잉글랜드를 그리워했고 엘리트 예술을 사랑했다.“나는 만들어진 가짜 혁명가다. 나이 먹을수록 점점 더 전통을 믿게 된다. 나는 강간당한 전원과 도시보다, 관목과 꽃이 우거진 옛날의 들판을 믿는다”라고 말했던 데릭 저먼의 낙원을 지탱하는 두 기둥은 언뜻 반목할 것처럼 보이는, 퀴어 감수성과 노스탤지어였다. 데릭 저먼은 급진적인 동시에 근본주의자였다는 점에서 충실한 래디컬(radical)이었다. 데릭 저먼의 장편 전작과 중·단편, 뮤직비디오를 한데 모은 회고전이 열린다. 당신은 그의 명성에서 무엇을 기대하는가? 호모에로티시즘의 절정? 형식의 혁명? 역사의 재해석? 황홀한 이미지의 향연? 다음은 작은 참고가 될지도 모르는 짤막한 노트다.
성장기 - 커밍아웃 그리고 사실적 회화에의 정착
데릭 저먼은 1942년 런던 교외 노스우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영국 공군 소속 폭격기 조종가였기에 가족은 공군 기지에서 살았다. 갇혔다고는 말할 수 없어도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기지 생활은 고립된 것이었다. 아버지는 특별한 증세는 없었지만 전쟁을 통해 알게 모르게 훼손된 사나이였고 어머니는 단조로운 일상을 깨는 일이라면 뭐든 반기는 성품이었다. 데릭 저먼이 특히 좋아한 식구는 할머니였는데, 그녀가 고아 출신으로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저먼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네살부터 정원 가꾸기에 몰두했고 7, 8살 무렵 게이 성향을 깨달았다. 저먼은 학교에서 미술 공부를 시작했는데, 화실이 학교 본관에서 물리적으로 떨어진 건물에 있었던 까닭에 은연중 예술가라는 직업에 도피의 의미를 부여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1950년대의 커밍아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저먼은 20대 초반 성적 취향이 같은 친구들을 만났고 이들과 이내 ‘게이 마피아’ 같은 친근한 동아리를 이뤘고 런던으로 이주했다. 모더니즘이 유행하던 시기에 슬레이드 미술학교에서 공부한 화가 데릭 저먼은 미술사조란 사조는 다 맛본 끝에 결국 사실적인 잉글랜드 풍경화에 정착했다. 고교회파(High Church)의 화려한 예배의식에 매혹되고 장식 취향이 강했던 데릭 저먼에게 추상회화의 세계는 참을 수 없이 건조하게 느껴졌다. 데릭 저먼은 훗날 사회비판적 영화, 반문화적 영화를 만든 감독 중에서도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아방가르드 모더니즘 어느 쪽에도 기울지 않은 특수한 사례로 주목받았다. ‘진짜’ 세계와의 접촉, 감촉할 수 있는 구체적인 사물의 아름다움은 저먼에게 처음부터 중요한 것이었다. 발레와 오페라의 무대미술감독으로 일하던 저먼은 켄 러셀 감독의 <악마들> <잔혹한 메시아>의 디자이너로 영화계에 입문했다. 그리고 누군가 들고 온 홈무비카메라로 파티의 여흥삼아 찍어본 3분짜리 비디오를 계기로 영화감독의 길에 들어섰다. 물론 이후로도 그림을 팔아 영화 제작비를 충당하는 일은 있었다.
아마추어리즘 - 예술은 창작자의 사적인 일기
1976년 첫 장편 <세바스티안>을 연출했을 때 데릭 저먼은 장편영화 만들기 공정에 밝지 못했다. 그러나 데릭 저먼은 개의치 않았다. 슈퍼 8mm 비디오로 6년간 작업한 저먼의 미학은 홈무비의 그것이었다. 첨단기술의 고급스런 구현이나 상업영화의 매끈하고 자신만만한 제작과정은 마지막까지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는 스탠 브래키지가 그러했듯 영화를 사적인 일기처럼 여겼고, 배우부터 스탭까지 정해진 몇몇 친구들과 일하는 친밀한 작업을 즐겼다(사실 스탭이 곧 배우인 경우도 흔했다). <세바스티안> 촬영 당시, 데릭 저먼과 친구들은 이탈리아 로케이션 촬영으로 예산을 다 써버린 상태에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생일 연회를 찍어야 했다. 친구 집으로 몰려간 일동은 런던의 아파트를 순식간에 로마 궁전으로 바꿔놓았다. 벽에는 폼페이 벽화를 그리고, 바닥은 핑크빛 대리석처럼 보이도록 칠했고 의상은 입을 사람들이 준비했으며 귀족의 장신구는 빌리거나 가짜로 만들었다. 한편 일기를 적듯 8mm 비디오에 스케치한 저먼의 일상은, <대영제국의 몰락> <천사의 대화> <가든>처럼 영상시에 가까운 스토리 없는 작품 속에 콜라주됐다. “예술은 무엇보다 예술가가 직면한 상황에 대한 즉각적이고 개인적인 반응”이라고 믿었던 데릭 저먼의 예술관은, 대량 생산체제에 반대했던 아트 앤 크래프트 운동의 윌리엄 모리스나, 존 러스킨, 윌리엄 블레이크 같은 낭만주의자들의 철학과 상통한는 면이 있다. 저먼은 예술은 관객보다 창작 주체에게 덕을 입히는 행위라고 생각했고, 예술작품의 평가 기준을 그것을 만든 사람들이 창작의 필요를 얼마나 절실히 느꼈는가에서 찾았다. “꿈을 꾸지 마라, 스스로 꿈이 되어라”라는 <희년>의 아밀이 외치는 대사는 노동과 유희, 삶과 예술이 합일했던 시대를 그리워한 데릭 저먼의 육성이나 다름없다.
동성애 - 이성애적 지배질서에 대한 도발
데릭 저먼에게 퀴어정치학은 지배질서에 대한 비판의 포인트였다. 그리고 호모에로티시즘의 희열과 고통으로 뒤틀린 남성의 육체는, 그의 전작을 통틀어 스크린을 압도하는 이미지다. 그중에서도 데릭 저먼이 견지한 퀴어정치학의 정수를 직설적으로 담은 작품은 <에드워드 2세>다. ‘무능, 음모, 폭력의 군주’로 정사에 기록된 에드워드 2세를 권력 심장부에서 이성애적 지배질서와 충돌한 게이로 해석한 <에드워드 2세>를 두고, 데릭 저먼은 “순전히 주제 때문에 선택한 작품”이라고 주저없이 고백한 바 있다. 저먼은 촬영 뒤 펴낸 책 <퀴어 에드워드 2세>를 1980년대 중반 대처 정권이 입법한 반게이법령(동성애의 공공연한 프로모션을 금한 28조 법령)의 폐지운동에 헌정했다. 호모포비아를 국가권력 차원에서 부추긴 정권에 대한 공격이 바닥에 깔린 <에드워드 2세>는 정치색이 대단히 노골적이다. 프랑스 출신인 왕의 애인 갸베스톤을 영국 북부 노동계급 출신으로 바꿔 계급 권력과 섹슈얼리티의 관련을 부각시켰고, 에드워드 2세를 폐위시키는 이성애 커플 이사벨라 왕비와 모티머에게는 파시스트의 옷을 입혔다. 마거릿 대처가 모델이라는 설이 나돌았던 이사벨라 왕비는 심지어 흡혈귀의 형상으로 둔갑해 여성혐오증이라는 비판까지 받았다. 저먼에게 호모섹슈얼리티를 공표하는 일은 단순히 마이너리티를 대변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엘리자베스 1세 치세의 르네상스기를 사회적 성역할이 고착되지 않은 황금시대로 바라본 데릭 저먼은 현대 영국의 정체성이 단일한 것도 영원불변한 것도 아님을 주장했다. 엘리자베스 1세의 시간여행을 그린 <희년>에서, 여왕 역의 배우가 전통적 성역할이 전복된 게이, 펑크 로커 패거리의 우두머리로 1인2역을 맡은 사실은 눈여겨볼 만하다.
빈곤의 미학 - 미니멀한 소품과 로케이션의 충격
문학, 회화, 음악에 걸쳐 잉글랜드의 문화유산을 이용하고 역사에 대한 집단적 기억을 건드려 눈을 사로잡는다는 면에서 데릭 저먼의 많은 작품은 <전망 좋은 방> <불의 전차>와 같은 영국의 주류 유산영화들과 동류다. 더 살 만했던 시절로 과거를 그리는 정서도 같다. 그러나 데릭 저먼의 ‘누추한’ 코스튬드라마들은 시대극 장르의 팬들에게 흥미로운 신천지를 열어 보인다. 데릭 저먼의 영화는 가난하고 아름답다. 저택부터 소품까지 완벽한 패키지로 채운 화면을 카메라로 천천히 훑어보며 페티시즘을 자극하는 주류 유산영화의 전략은 찾을 수 없다. 어차피 상품이 될 만한 구경거리 자체도 없다. 런던의 아파트나 사원 지하굴로 중세 궁전을 재현하고 수도사에게 더플코트를 입히는 저먼의 시대극에서 스펙터클이란 지독히 단순하면서도 충격적인 로케이션, 미니멀한 의상과 소품이다. 데릭 저먼에게 고증의 정확성이란 과거를 실물크기로 복제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과거의 파편을 요령껏 이용해 시대적 공기를 포착한 영화적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여기서 불가피하게 동원되는 것이 시대착오의 미학이다. 왜 타자기나 트레이닝복이 중세에 등장하냐고 따지다가는 진도가 안 나간다. 요컨대 빈민의 살림도 그림처럼 예쁘게 찍는 유산영화가 낯선 것을 친숙하게 만드는 키치의 효과에 기댄다면, 데릭 저먼은 익숙한 것을 낯설게 만들어 관객을 설득하는 셈이다. 이는“예산이 곧 미학”이라는 격언의 실례일 수도 있다. 실제로 저먼은 자신의 해체적 내러티브에 대해 “극심한 저예산으로는 강력한 내러티브를 찍기 힘들다”고 토로한 적도 있다. 그러나 저먼은 제작비가 더 있었더라면 세트가 아니라 촬영기간을 늘리는 데에 썼을 거라는 말도 남겼다. 예의 연극적인 아트디렉션이 궁여지책 이상임을 짐작할 수 있는 근거는, 훨씬 윤택한 스타일로 아트하우스 시대극을 만든 피터 그리너웨이와 비교하는 질문에 대한 저먼의 자부어린 대답에서도 찾을 수 있다. “내 영화는 예술이고 그의 영화는 예술을 흉내낸 것이다.”
역사의 진보를 회의한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치열하고 생산적인 삶을 살았던 데릭 저먼은, 세상의 가장자리 같은 황무지에 지은 프로스펙트 장(莊)에서 라벤더와 수선화를 가꾸고 일출과 일몰을 지켜보며 말년을 보냈다. 그리고 자신의 영화를 보러 극장에 오는 관객보다 훨씬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주말마다 정원을 찾아오는 사실을 기뻐했다. 시시한 공화국의 예술가보다 위대한 왕국의 정원사가 되기를 원했던 남자. 그것이 데릭 저먼이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