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실미도> 210일간의 혹독한 촬영의 기억 [2]
2003-11-07
글 : 백은하 ( <매거진t> 편집장)

아침·저녁은 파카, 낮에는 강렬한 햇살

“꿈을 꿨다. 우린 실미도에서 열심히 촬영을 하고 있는데 전쟁이 났다! 한국전쟁이 다시 일어난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우리는 우연히 부상당해 피해온 국군 한명에게 소식을 듣는다. 서울이 함락되었고, 부산 정도만 남아 있다고…. 어찌할 바 모르던 감독님은 최후의 최정예 부대원들이 바로 주변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바로 우리 훈련병들이다! 북에서도 전혀 실체를 모르고 있던 <실미도> 배우 훈련병들!!! 감독님은 그들에게 실제 무기를 주고 북으로 북파를 시킨다. 김정일 목을 따오라고! 잠을 깼다. 헉… 개꿈이다. ….” - 연출부 제작일지 중

징그러운 지네와 ‘돈벌레’들이 우글거리는 무의도 숙소에서 빠져나와 물이 빠진 길을 걷거나, 보트를 타고 실미도에 도착하면 하루일과가 시작된다. 일단 실미도에 도착하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해변을 뛰었다. 8km가량 되는 실미도 앞 하나개 해변은 오르막과 내리막이 다양하게 펼쳐진 천혜의 운동코스였다. 휴식시간이면 모두 모여 족구를 하고, 틈틈이 비닐하우스 내에 지어진 체력단련실에서 푸시업과 벤치프레스로 몸을 단련했다. “완전히 육군 체육부대인 거야. 군대야, 자발군대.”(설경구) 그도 그럴 것이 실미도에서 찍어내는 분량은 몸이 쉬이 견뎌내기 힘든 촬영이 대부분이었다. 촬영 전 액션스쿨에서 두달가량 몸을 단련하긴 했지만 아침저녁은 파카를 입어야 할 정도로 춥고, 낮에는 화상을 입을 만큼 강렬한 햇살이 쏟아지는 가운데 갯벌에서 뒹굴고, 물에 빠지고, 산을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반복해야하는 실제 촬영에서는 연기를 떠나 ‘체력이 곧 국력’이었다. 설경구와 정재영이 벌이는 권투장면은 쑥쑥 빠지는 모래밭에서 거의 탈진상태에 이를 때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긴장감 때문인지 이런 무리에 가까운 촬영은 별다른 문제없이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어느덧 섬생활이 안정되어가고 석달 가까이 진행된 실미도에서의 촬영은 단조로운 일상 속에 지쳐갈 수밖에 없었다. “나중엔 육지에 한번 나오면 안 들어가고 싶더라고, 휴대폰 꺼놓은 적도 있어요.”(설경구) 섬에 들어오면 촬영이 있든 없든 간에 어떤 식으로든 시간을 보내야 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각자 소일거리를 찾기 시작했다. “존재만으로도 중심이 잡히고 무게감이 느껴지는” 안성기 역시 촬영을 제외한 시간엔 아이처럼 놀았다. 그는 스탭들에게 감자, 고구마 구워주면서 좋아하고, 조개껍질을 구해 바닷가에 던지는 단순한 놀이만으로도 1시간은 거뜬히 채우는 사람이었다. 누군가 소라라도 주워 올라치면 안성기는 부러운 듯이 말하곤 했다. “야, 좋겠다. 너 2시간짜리 구했다.”

그러던 어느 날, 글러브를 끼고 샌드백을 치던 훈련병 역의 변경수가 촬영 중간에 “악∼” 하고 소름끼치는 비명을 지른다. 글러브 속에 들어가 있던 지네가 그의 손가락을 문 것이다. 땅바닥을 구르는 그의 손가락이 파랗다. 상주하는 의사도 없고 지네에 대한 상식도 없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독이 퍼지지 말라고 손가락, 팔꿈치, 어깨를 묶는 것 외에는 별다른 응급조치도 못하고 해변에서 무작정 배를 기다려야 했다. 무의도 보건소에서 큰 병원으로 옮겨진 그는 무사히 귀환했고 이 사건 이후 원래 ‘훈련병 14번’이었던 변경수는 ‘지네’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어이, ‘지네’ 니가 일루와 봐.” 조금 더 자주 카메라에 잡혔음은 물론이고, 평소 문제가 있었던 그의 허리는 지네독이 죽지 않을 만큼 퍼진 덕에 말끔히 나았다.

서서히 실미도의 광기에 젖어들고

“강우석 감독님은 콘티를 보다가 잘 안 풀리면 해변을 걷곤 하는데 믿거나 말거나 꼭 똑같은 갈매기가 주변을 서성였다고 하신다. “그 놈 참… 내 고민을 아는지….” “왜? 잘 안 풀려?” “니가 뭘 안다고….저리 날아가 임마!” “콘티를 더 열심히 봐! 그럼 분명히 해답이 있을 거야.” “너 내가 누군지 알아? 나 영화 파워1위야!” “난 갈매기 파워1위다!” “이 자식이!” - 연출부 일지 중

촬영 내내 강우석 감독은 쇼핑백에 지금까지 나온 각기 다른 버전의 시나리오를 한 가득 담아서 실미도로 들어왔다. 그리고 해변에 도착하자마자 파라솔부터 펼치고 그 아래 앉아 한참을 시나리오만 뚫어져라 바라봤다. 6월달이라도 저녁이 되면 추운데도 반바지, 반팔만 입고 정신없이 촬영장을 오가는 그에게 “안 춥냐?”고 물을라치면 “니네는 춥냐? 나는 덥다”며 또 어딘가로 분주히 발을 옮기곤 했다. “다른 때와 달리 언제나 불안불안해 하고, 배우들에게도 확인하고 또 하고, 말타 촬영이 끝나고도 마지막 엔딩까지 늘 긴장상태였던 것 같아요. 모두들 외롭지만 이번 촬영에서는 아마 감독님이 제일 외로웠던 것 같어.”(설경구) 아직 50년도 안 지난 실화를 다룬다는 부담감과 함께 한국 블록버스터가 또 망하면 안 된다는 중압감은 강우석 감독의 다리를 쉴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런 불안함은 모두 어느 정도 나누어지고 있었다. 인천 파라다이스호텔 앞에서 거의 초반 촬영을 할 때쯤 김성복 촬영감독은 설경구와 담배를 나눠 피우면서 “이번처럼 갑갑하고 암담한 영화는 처음이다”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설경구에게도 “긴가민가 어떻게 풀어야 하나”라고 하소연하곤 했다. 그러나 찍어가면서 모두의 얼굴에 자신감과 탄력이 붙어간다는 것을 느낀 것은 비단 설경구뿐만이 아니었다. “흔한 이야기지만 결국 한배를 탄 운명인 거예요. 살면 같이 살고, 죽으면 같이 죽는. 영웅이 하나만 나와도 안 되는 거고, 다 주인공이고 희생자니까.” 실미도의 바람이 점점 차가워지면 질수록 스탭들은 조금씩 68년의 훈련병들처럼 날이 섰고 단련되어갔다. 서서히 그들도 실미도의 광기에 젖어들어간 것이다.

“실미도 촬영이 한달 정도 지났을 때 모두 ‘외박’이란 걸 나가게 되었거든요. 하루는 신촌에서 모이기로 했는데 백화점 앞에 그 머리 빡빡 깎은 시커먼 놈들이 무슨 배타는 새끼들처럼 우르르 서있는데, 와∼ 진짜 쪽팔려서 도망갔잖아요. 그리고 술먹으러 가니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볼 수밖에. ‘여러분 좆나게 죄송합니다, 우리 나쁜 사람 아니거든요’ 하고 인사하고 술먹었지. 2차를 가는데 이 미친놈들이 신촌 한가운데 길바닥에서 3열종대로 앉아 번호를 하네? 그런데 왜 그랬지? 그냥 그 모습을 보는데 기분이 참 좋더라구. 약간 미친 것도 같고. 돈 것도 같고, 이게 실미도의 힘이구나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도 들고….” - 설경구

뉴질랜드 눈밭에서 빤스만 입고 총들고

1월 초, 이민호 PD는 강우석 감독으로부터 전화를 한통 받는다. “이 PD! 밤에 바다 한가운데 비가 오면서 파도가 치고 보트로 배우들이 연기를 해야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불가능하겠지? 외국 세트장 좀 알아봐.” 결국 이 이탈리아 남쪽에 자리한 섬나라 말타에 있는 수중전문세트 MFS(지중해 필름 스튜디오)에서 촬영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스튜디오는 불과 2m에 불과한 수심을 가진 바다와 인접한 커다란 수조에 파도를 일으킬 수 있는 기계장치와 바닷물을 그대로 끌어올려 뿌릴 수 있는 비 타워 10여조에 기타 조명장비들을 갖추고 있었다. 북으로 침투한 실미도 훈련병들이 중도에 작전이 취소되어 돌아오게 되는 장면은 3일 만에 ‘쫑’을 냈고 MFS 사람들은 “코리아 톱 엑터들”이 분장실이 아닌 밖에서 분장을 하고, 알아서 의상을 챙겨 입고 “코리아 넘버원 디렉터”가 비 오는 현장에 이리저리 비 맞으며 뛰어다니는 광경을 기이하게 쳐다보았다.

8월에는 모두 뉴질랜드로 떠났다. 실미도 부대가 훈련받는 것은 3년인데 “겨울장면이 없으니 아무래도 후회할 것 같다”는 강우석 감독의 고집은 겨울훈련의 몽타주 한 장면을 찍기 위해 5억여원의 예산을 들여 전 스탭을 뉴질랜드행 비행기에 오르게 했다. 1700고지 정도 되는 그곳에서 3개의 산을 넘어 2시간30분쯤 차를 달려 도착한 곳은 푸른 하늘과 흰눈밖에 없는 신천지였다. “되게 추웠어요. 단화에 빤스만 맨발에 총들고 뛰어야 하는데 살갗은 눈에 찢어지고, 넓적다리는 면도날로 찢는 듯이 아프고…. 그런데 이상한 건 아무도 춥다는 말을 안 하더라고, 독종들.”(설경구) 부대원(?)들의 긴밀하고 재빠른 협조 아래 예상보다 빨리 촬영을 끝내고 돌아가는 강우석 감독이 처음으로 눈을 만지며 말한다. “어? 이거 눈 아니네? 얼음이네….”

“나도 버스를 타야 하는데….” 이 말은 촬영 내내 모든 배우들의 입에서 입버릇처럼 터져나온 말이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바로 실미도 대원들이 버스를 탈취해서 대방동으로 가다가 자폭하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실미도에서 죽은 임원희, 강신일 같은 배우들은 “유령으로라도 나오면 안 되냐”며 너스레를 떨었다. 결국 이들은 “미안해서 군복이라도 입고 있었야 되겠다”며 얼굴을 가리고 군인 역을 자처했다. “슛” 소리가 나기도 전에 몇몇 대원들이 울음을 터트린다. 촬영 중간중간 여기저기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버스가 불타고 그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데 기분이 묘하더라구요. 말도 안 되는 소린데 지금이 1971년이고 이 버스가 그 태화고속버스 같다는 생각, 그리고 모두 죽어간다는 생각. 아마 아이들도 그런 기분이 들었나봐요.” 버스 안에서만 200여컷을 찍어야 하는 부안에서의 힘든 촬영을 모두 마치고 나니 버스 안이 온통 피투성이다. 이때 설경구가 외친다. “이거, 과다출혈로 죽은 거 아냐?”

“허… 영화 끝나니까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네…”

“우린 할 만큼 했고 더 뭐 어째볼 수 없을 만큼 했잖아.” - <실미도> 출정을 앞둔 인찬(설경구)의 대사

길고 긴 7개월간의 촬영을 무사히 끝내고 촬영팀은 위령제를 지내기 위해 오랜만에 실미도로 향했다. 그러나 갑작스런 파도로 배는 실미도에 끝내 닻을 내리지 못했다. 누군가 이야기한다. “허… 영화 끝나니까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네….” 너무 험한 파도 때문에 결국 무의도에서 안개에 싸인 실미도를 보며 위령제를 지낸다. <실미도>의 촬영이 끝나고 1달쯤 지난 지금, 설경구의 휴대폰은 바쁘게 울린다. 같이 출연했던 어린 배우들에게 ‘뭐하냐 씨발놈들아’ 하고 단체 문자메시지를 한번 날릴라치면 ‘형, 나 운전면허 시험봐요. 흐허허.’ ‘경구형! 술사줘요’ 등등 쏟아지는 답장으로 휴대폰이 “지랄발광”을 한다. 31명의 대원들이, 아니 100여명의 배우와 스탭들이 늘 술잔을 부딪치며 버릇처럼 외쳤던 “실미도를 사랑합시다!”는 구호는 마지막 회식날 “실미도를 잊읍시다!”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들이 망각을 시작하는 순간, 실미도 유령들의 혹독한 기억의 행군은, 관객의 심장을 향한 무덤으로부터의 외침은 비로소 시작되었다.

제작일지 프로듀서 이민호, 조감독 백상열 제작부 김진휘, 윤종호, 박상윤, 이신범, 석재승, 김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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