찢겨나가고 터져나가고…, 독종들!
지난 3월 촬영에 들어간 강우석 감독의 신작 <실미도>. 그러나 이 영화는 크랭크인 이후 반년이 넘도록 대중에게 그 형체를 쉽사리 드러내지 않았다. 지난 부산영화제에서 5분짜리 메이킹필름을 공개하면서 약간의 갈증을 달래주긴 했지만, 순제작비 82억원에 서울, 제주도, 뉴질랜드, 말타에 이르는 방대한 로케이션을 자랑하는 <실미도>는 여전히 안개 속에 가려진 거대한 섬이었다.
12월 개봉을 앞두고 찐득한 펄밭 위로 서서히 눈동자를 드러낸 <실미도>의 정체는 육중한 블록버스터이기 전에 30년 전 한 사건에 대한 신랄한 고발장인 동시에 권력자의 손아귀에 사지가 찢겨나가고 터져버린 가련한 인간군상에 대한 비극적 드라마다. 여기 <씨네21>에 처음으로 공개한 스틸사진 위에 프로듀서, 연출부, 제작부가 써내려간 제작일지와 “과묵한“ 배우 설경구가 기억의 골짜기를 더듬어 올라간 증언을 더해 <실미도>, 그 생생한 210일간의 제작기를 펼친다.
684부대, 그들을 아십니까
1971년 8월23일, 여름 한낮의 라디오는 “인천해안에 무장공비 20여명이 나타나 버스를 탈취해 경인가도를 달리고 있다”는 긴급속보를 알리고 있었다. 무장공비와 경찰은 2차에 걸친 격렬한 총격전을 벌였고, 서울 대방동에서 마지막 교전 끝에 무장공비 중 대부분은 사살되었고 일부는 수류탄으로 자폭했으며 생존한 4명은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 충격적인 사건은 큰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켰지만, 그 시절의 모든 사건들이 그러했듯이 더욱 숨가쁘게 덮쳐오던 많은 사건들의 무게에 짓눌렸고, 세월의 무심한 흐름 속에 잊혀져갔다.
하지만 1999년 백동호의 소설 <실미도>의 출판과 MBC 시사프로그램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등을 통해 30년 만에 그 실체를 드러난 사건의 전말은 달랐다. 당시 정부에 의해 철저히 은닉된 이 사건의 주인공들은 ‘무장공비’가 아니라 ‘북파목적특수부대원’들이었다. 정식 명칭은 2325 전대 209 파견대, 68년 4월에 창설되었다고 해서 ‘684부대’라고 불렸던 ‘실미도 특수부대’는 1968년 1월21일 “박정희 모가지 따러왔다”며 북에서 남침한 31명의 김신조 일당에 대한 보복조치로 만들어진 비밀부대였다. 박정희 정권은 사형을 앞둔 죄수를 비롯, 밑바닥 출신의 31명의 남자들을 인적없는 섬, 실미도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새 삶에 대한 보장과 함께 “통일의 주역”이 될 거라는 명분을 내세워 도저히 인간이 견뎌낼 수 없는 3년간의 혹독한 지옥훈련을 거치게 했고 결국 “주석궁에 침투해 김일성 모가지를 따오”기 위한 살인병기로 만들어냈다. 서서히 대원들이 광기에 가까운 살의로 충만해가는 가운데, 돌연 정부는 반공정책이 통일정책으로 변함에 따라 “냉전시대의 산물”인 이들을 제거대상으로 결정했다. 결국 대원들은 실미도 내 기관병들을 사살하고 대통령과 담판을 짓기 위해 청와대로 진입을 시도하지만 ‘무장공비’라는 오명 아래, 자폭이라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고야 만다.
<광복절특사> 촬영에 한참이었던 설경구는 강우석 감독으로부터 전화 한통을 받았다. “경구야, 너 일년만 빼라. 영화 한편 하자.” “네?” “너 하면 하고, 아니면 영화 엎고….” “하죠, 뭐.” 어떤 영화인지, 무슨 내용인지 묻지도 않았다. 별다른 설명도 없었다. <공공의 적>을 찍으면서 쌓인 감독과 배우의 신뢰는 그런 것이었다. “<공공의 적2> 정도 되는 줄 알았죠.” 그러나 이틀 뒤 그는 시나리오 한장 읽어보지 못한 채 <실미도> 기자회견장에 불려나가야 했다. “언제는 뭐 그렇게 마음준비하고 들어갔나요? 뭐 그냥 하나보다 했지….” 읽어보라고 던져준 소설 <실미도> 1권쯤 읽었을까, 더이상 펴보지도 않았다. <광복절특사>를 끝내고 제본도 안 된 시나리오를 받고 매니저하고 둘이서, (원래 정재영의 역할인) 개성이 분명한 상필 역을 하라는가보다 했다. 그러나 그는 인찬이었다. 말도 없고 표현도 안 하다가 한번쯤 지르는 밋밋한 역할이었다. “뚜렷한 주인공이 없어요. 31명 대원들이 다 주인공이죠.” 이 말은 설경구의 지나친 겸손이 아니다. <박하사탕> <오아시스> <공공의 적> 등을 거쳐온 배우 설경구에게 모든 장면에 등장하긴 하지만 최소한의 클로즈업만 받는 <실미도>는 둘 이상의 배우들과 한번에 호흡하는 생경한 기회였다. “그러니까 오히려 마음이 편하더라고, 나는 애들 갈구고 달래는 일만 하면 됐거든요.” (웃음) 그러나 설경구가 보는 강우석 감독은 <공공의 적>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독기를 품은 것 같았어요. 이 영화 찍으면서 그러더라고, 경구야 나는 이제 회사 신경 안 쓴다. 난 감독만 할란다, 그 말이 참 좋더라고, 나는 진짜로 배우만 하고 싶거든.” <공공의 적>을 찍을 땐 도통 리허설이 없었던 감독은 이번엔 어린 친구들부터 안성기, 허준호 할 것 없이 철저하게 리허설을 시켰고, 심지어 마지막 밤장면을 찍는 임원희는 낮부터 두손이 꽁꽁 묶인 채 김일성 찬가를 목이 쉴 정도로 연습해야 했다.
라면탑을 쌓는 바벨탑의 후예들
인천에서 남서쪽 직선 거리로 20km 떨어진 해발 80m, 2㎦의 무인도 실미도(實尾島), 처음 실미도를 방문했던 제작진들은 어떤 시설도 갖춰져 있지 않은 이곳에서 도저히 촬영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렸고 이후 서해와 남해에 있는 100여개의 섬을 다 돌아보는 10개월간의 긴 헌팅과정을 거쳐야 했다. “처음 헌팅을 갔는데 이렇게 예쁜 섬이 있나 했어요. 이런 데서 어떻게 그런 끔찍한 일이 일어났는지 상상도 못할 만큼.”(설경구) 그러나 결국 강우석 감독은 “<실미도>는 실미도에서!”라며 실제 사건이 일어난 이곳을 촬영지로 택했다. 그러나 2개월간의 워밍업 촬영을 끝내고 입도한 스탭들에게 실미도는 말 그대로 전쟁상황이었다. 장비와 자재의 운반부터, 식사와 숙박에 이르기까지 육지촬영과 달리 상상도 못할 난제의 폭탄들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다.
“생각해보라! 해변가에 덤프트럭 같은 거대한 배가 쌀이며 휘발유며 무지무지하게 무거운 부대와 거대한 박스들을 토해내고 그늘 하나 없는 강렬한 햇살 아래에서 오직 인력만으로 그 식량과 비품을 어깨에 하나씩 들쳐메고 100m를 걸어서 옮기고, 선주는 정박시간이 얼마 안 남았으니 서두르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한번은 이 물량에 더해 협찬 제공된 약 1천 박스의 라면이 들어왔으니…. 온 스탭이며 배우며 모두가 웃통을 벗고 길게 100m를 주∼욱 서서 라면만 전달했다. 무려 1시간을…. 우리는 그때 ‘라면탑을 쌓는 바벨탑의 후예들’이었다.” - 제작부 제작일지 중
100여명이 넘는 인원이 하루 3끼를 무인도에서 해결하다보니 식량공급은 마치 구호물자 공급을 방불케 했다. 두달이 넘게 보름치의 식량과 비품이, 차로 치자면 덤프트럭과 같은 커다란 도선에 의해 정기적으로 들어오곤 했다. 하루에 두번 물이 들어왔다 나갔다를 반복하는 실미도의 ‘물때’가 이 도선의 정박시간을 결정했다. 일단 식량이 도착하긴 해도 이 많은 인원이 제한된 시간에 한끼의 밥을 먹는 것 역시 거의 전쟁이었다. 거기다 90%가 왕성한 식욕을 자랑하는 남자들이었기 때문에 그 식사량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렇게 1주일이 가고 2주일이 가고 식당에서 일을 보던 아주머니들은 한분, 두분 핑계를 대고 사라졌다. ‘함바집’ 주인의 눈도 점점 퀭해졌다. 매일되는 강행군의 식사량을 맞추기 위해 식당도 매일매일 야근을 했다. 드디어 함바집이 백기를 들고 도망갈 채비를 하자, 하루 한끼 식사를 외부로 돌리기로 하며 그들을 달랬다. 그렇게 외부식사를 결정한 다음날 바로 일은 터졌다. 인원이 많다보니 3군데의 식당을 한번에 잡았는데도 불구하고 모두 ‘한끼’만에 백기를 들었던 것이다. 전화는 통신사에서 기지국을 설치해 주어 가까스로 해결했지만 전기가 없기 때문에 제작부들은 10시간마다 발전기를 교체해가면서 밤새 세트장과 촬영, 조명장비를 지켜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