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 포착! 영어완전정복에 이런 일이?
‘조선의 9급공무원’ 나영주가 난생처음 영어학원을 다니면서 겪게 되는 일을 로맨틱코미디라는 포장지로 감싼 영화 <영어완전정복>. 이 영화의 촬영장에는 촬영감독인 김형구 감독 외에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인물이 있었으니 그건 이강산 조명감독의 폴라로이드 카메라였다. 그는 촬영 틈틈이 조리개를 열어 현장의 분위기를 간직했다. 촬영장의 낮은 숨결까지 포착한 이 흑백사진들(촬영 초반 그는 컬러필름을 사용했으나, 비용문제로 곧 흑백필름으로 바꿨다) 아래 김성수 감독과 주연배우 이나영, 장혁이 ‘토’를 달았다. 즐겁고 난감하며 신나고 답답했던 6개월간의 기록.
1) 첫 촬영
이나영
어? 첫 촬영을 마쳤는데 아무 생각이 없다. 어떻게 찍었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래도 어렴풋하게 편안하고 따뜻했던 분위기는 가슴에 남는데…. 첫 촬영이라 그렇겠지만 모두들 나를 어려워하는 것 같다. 빨리 스탭들과 친해지고 싶다. “놀아줘!”
장혁
<영어완전정복> 대장정이 시작되는 첫 촬영날. 아쉽게도 나는 촬영분이 없다. 그래도 원준이 형(매니저)과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촬영장에 놀러 나갔다. 나영씨가 연기하는 걸 보니 한 가지 생각밖에 안 든다. 빨리 촬영이 시작되었으면 좋겠다는 것. 철마는 달리고 싶다!
김성수
으흠. 아직 두 배우가 캐릭터에 근접하지 못한 것 같다. 첫 촬영은 일단 영주의 과거 모습부터 찍어나가기로 했다. 그래야 나도, 배우들도 감을 좀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스탭들이 첫 촬영 때는 긴장해서 그런지 하나도 안 웃더니 슬슬 킥킥거리기 시작한다. 나영이는 촬영을 거듭할 때마다 새로운 것을 들고 나타난다. 나영이가 감을 잡아나가면서 나도 이나영이라는 배우와 나영주라는 캐릭터에 대해 확신이 들고 안심이 된다.
2) 약 먹은 나영, 술 마신 영주
이나영
밤새도록 배를 움켜쥐고 끙끙 앓다가 아침 8시쯤 응급실에 실려갔다. 급성장염이란다. 다들 촬영을 미루자고 만류했지만 이를 악물었다. 나 때문에 그 많은 사람들이 허탕을 치는 건 너무 미안한 일이다. 결과적으로 아팠던 게 약이 되었던 것 같다. 열과 약 기운 때문에, 술 먹고 헤롱거리는 신에서도 연기가 따로 필요없었다. 감독님도 말씀하셨지만 배우가 몸관리를 제대로 못해서 스탭들에게 피해를 줄 때, 제일 미안하고 부끄럽다.
3) “아, 쳐다보지 마, 너무 눈부셔! 쳐다보지 마~”
이나영
예전부터 장혁의 첫마디는 “재미있는 얘기 아는 거 없어요?”였다.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으면 “제가 하나 해드릴까요?” 하면서 한참 유행이 지난 얘기나 농담을 꺼내곤 했다. 많이 친해진 요새는 농담을 들은 내가 반응을 안 보이면 불평을 늘어놓는다. “사람이 얘기를 하면 좀 쳐다보든가∼”라며. 사실, 웃기지 않거나(물론 그런 면도 없지 않지만 ^^;) 재미가 없어서가 아니다. 장혁이 웃긴 얘기를 들려주면 난 그걸 들으면서 하나의 장면을 열심히 생각하고 상상한다. 그러다가 웃을 타이밍을 놓치고 마는 거다. 혁, 아임 소리.
장혁
나영씨는 낯을 많이 가리는 것 같다. 재미있는 얘기를 해줘도 아무 반응이 없다. 그래서 방법을 좀 바꿔보기로 했다. ‘주접’ 컨셉으로. 아침에 나영씨를 만나자마자 말해줬다. “아참, 내가 오늘 그거 얘기했나? 오늘 되게 상큼해 보인다는 거?” 나영씨가 나를 빤히 쳐다봤다. 눈 딱 감고 한번 더 밀었다. “아, 쳐다보지 마, 너무 눈부셔! 쳐다보지 마∼.” 스탭들은 내가 캐릭터와 현실을 혼동한다고 걱정하는 듯 애처로운 눈으로 바라본다. 돈트 워리이!
4) 연기완전정복에 왕도는 없다
장혁
캐서린 역의 안젤라 켈리를 처음 만났을 땐 하루종일 나란히 앉아서 하는 말이 딱 한마디였다. “하이∼.”(이후론 침묵) 그래도 워낙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다보니 친해졌다. 안젤라에게서 외국의 연기공부에 관해 들었다(물론 통역을 통해. ^^;). 안젤라도 춤과 노래를 6년이나 배웠다고 했다. 외국 배우들은 정말 정교하고 정확한 과정을 거쳐 연기를 배우는 것 같다. 하지만 그의 연기는 너무나 정확하게 계산되어 있다는 느낌이 든다. 나는 테이크를 갈 때마다 조금씩 연기를 바꿔 최선의 것을 찾아내는 편인데…. 그렇게 훈련이 잘되어 있는 것이 부럽기도 하지만 나는 평균은 남들보다 높지만 한번도 100점을 맞지 못하는 학생보다는, 빵점도 맞고 90점도 맞으면서 언젠가는 100점을 맞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 되고 싶다.
5) <폰부스>와 2분의 1
이나영
종로에 있는 영어학원에서 일찍 촬영을 마치니 저녁 촬영 때까지 시간이 꽤 남았다. 스탭들을 부추겨 코아아트홀로 <폰부스>를 보러 갔다. 스탭들은 당연하다는 듯 ‘나영이가 쏘는 거지’ 하면서 따라온다. --; 스탭들은 영주의 분장과 의상으로 있을 때 나를 편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영주가 워낙 어리버리한 캐릭터라 그런지 머리를 툭툭 치기도 하고, 장난을 걸어오기도 한다. 그러다 오늘처럼 평소의 옷을 입고 나가면 좀처럼 곁에 오지 않는다. 아무래도 내가 아니라 영주를 좋아하는 것 같다. --;; 영화를 보고 있는데 조명부 스탭들이 영화 도중 휴대폰을 받고 우르르 나갔다. 돈이 너무 아까워서 가지 말라고 붙잡았지만… 그만… 반밖에 보여주지 못했다. 흑흑.
6) 나문희 선생님은 괜히 선생님이 아니다
장혁
나문희 선생님이 조 여사 역에 캐스팅됐다는 얘기를 들을 때부터 마음 한구석이 뿌듯하고 든든했다. 연기 못하는 사람이 원래 잘하는 사람과 하다보면 그 완벽한 리액션으로 인해 더 좋은 연기를 선보일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나문희 선생님으로부터 정말 배우고 싶은 건 대사의 느낌이다. 같은 시나리오에 들어 있는 말이라도 나문희 선생님을 통해서 나오는 대사는 마치 원래 있었던 말처럼 자연스럽고 맛이 살아 있다. 아, 언제 저런 경지에 오를 수 있단 말인가.
김성수
나문희 선생님의 첫 촬영. 거의 입신의 경지를 보는 듯했다. 게다가 일찍부터 나오셔서 어찌나 연습을 열심히 하시는지…. 짧은 대사 한마디를 계속 중얼거리시면서 매번 다른 톤으로 연습하시고 혁이에게 연기를 맞춰가면서 끌어주는 모습에 정말 감동했다. 혁아, 넌 정말 최고의 스승을 만난 거다!
7) 조용한 콩가루 가족의 하루
이나영
오늘은 영주네 가족들이 다같이 모이는 장면 촬영이 있는 날. 김용건 선배님과 김영애 선배님이 함께 해주셔서 정말 편했다. 나 혼자 등장하는 컷들이 많아서 부담이 컸는데 오늘만큼은 그 부담을 나눠가질 수 있어 마음이 편했다. 엄마 아빠의 연기를 보면서 계속 우리 가족은 이런 모습이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거릴 수 있었다. 영주가 왕따로 지낼 수밖에 없는 건 가족들에게도 일면 책임이 있다. 하는 일도 없이 만날 TV만 보고, 딸이 들어오는지 나가는지 영어를 배우는지 연애를 하는지 도무지 관심이 없으니. 정말 그 부모에 그 딸이군.
김성수
오랜만에 실컷 웃었다. 김용건 선생님의 애드리브 때문에 다들 웃음을 참느라 촬영이 진행이 안 될 정도였다. 착착 주고받는 연기와 어떤 것이 나올지 모르는 상황이 흥미진진해서 나조차도 촬영을 진행시키는 게 아니라 재미난 걸 구경하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그 집안 참…. 관객이 보면 콩가루집안이라 하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