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회고전 열리는 칼 드레이어의 영화세계 [2]
2003-11-14
글 : 권은주
클로즈업의 주술사, 드레이어의 대표작들

<잔다르크의 열정>부터 <사탄의 책>까지 칼 드레이어 회고전에서 만날 수 있는 작품 11편

재판장 | Praesidenten

이전까지 시나리오를 쓰거나 혹은 시나리오 자문 일을 하던 칼 드레이어가 처음으로 직접 메가폰을 잡고서 연출한 작품. 멜로드라마로 부를 수 있는 데뷔작 <재판장>은 자신이 낳은 아이를 살해한 혐의로 재판정에 서게 된 젊은 여자와 그녀의 재판을 맡게 된 판사의 이야기를 다룬다. 판사는 그 젊은 여자가 오래전 자신이 버린 여인의 딸임을 알게 된 뒤 고뇌에 빠진다. 명예/의무와 사랑의 대립, 그리고 고통받는 여인의 이야기를 다뤘다는 점에서 드레이어적인 서명을 찾아볼 수 있다.

사탄의 책 | Blade af Satans Bog

드레이어는 <인톨러런스>를 비롯한 D. W. 그리피스 영화들이 자신에게 감동을 주었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사탄의 책>은 그리피스의 <인톨러런스>의 주제나 구조, 규모 등에 감화를 받아서 만든 듯한 영화다. 그러나 <인톨러런스>가 보여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병렬구조는 차용하지 않고 있다. 영화는 각각 예수 탄생 30년 뒤, 16세기 스페인의 종교재판, 1793년 혁명 뒤의 프랑스, 러시아와 전쟁을 벌이던 1918년의 핀란드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네개의 에피소드들을 통해 인간의 마음에 파고드는 악의 힘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영화를 만든 뒤에 드레이어는 자연스런 영화연출의 방법론을 찾은 덴마크의 첫 번째 영화감독이라는 평가를 들었다.

서로 사랑하라 | Die Gezeichneten

<미카엘>과 함께 드레이어가 독일에서 만든 영화로, 1905년 러시아에서 일어났던 유대인 대학살 사건을 주요 배경으로 그 위에 멜로드라마를 펼쳐놓았다. 드레이어가 만든 영화들 가운데에는 거의 유일하게 사회적 리얼리즘이라고 분류할 수 있는 영화이며 특히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의 영화를 연상케 하는 듯한 학살장면이 대단히 인상적이다.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드레이어라는 인물을 주목하게 한 영화라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옛날 옛적에 | Der Var Engang

덴마크의 극작가 홀거 드라크만이 쓴 오페레타에 기초해 만든 영화로 동화적인 이야기를 다룬다. 일리야라는 나라의 왕에게는 딸이 하나 있는데, 그녀는 아름답기는 하지만 너무 제 멋대로라 어울리는 구혼자가 없다. 이때 북부지방의 잘생긴 왕자가 이 공주를 자기 신부로 삼겠다고 마음먹고 그녀에게 다가온다. 시각적 스타일의 과시가 특히 두드러지는 영화로 현재에는 전체 상영시간의 절반만이 남아 있다.

미카엘 | Mikael

절망과 퇴폐의 분위기로 가득한, 덴마크 작가 헤르만 방의 소설을 각색했다. 저명한 화가인 클로드 조레와 그의 모델인 미카엘은 아버지와 아들 같으면서도 그 이상으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사이에 아름다운 자미코프 공작부인이 끼어들면서 이 친밀감의 관계는 미카엘과 공작부인 사이의 그것으로 이동하게 된다. <잔다르크의 열정> 이전 드레이어의 초기작들에서도 손꼽히는 걸작으로, 이 영화에서부터 비로소 드레이어가 인물의 내적인 삶과 환경과의 관계, 빛, 제스처와 시선 등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평가받는다. 한편으로 <미카엘>은 최초의 카머스피엘필름(Kammerspielfilm: 실내극영화)이라고 이야기되기도 하는데, 드레이어 자신은 그 사실을 아주 자랑스러워했다고 한다.

집안의 주인 | Du Skal Aere Din Hustru

원제가 <당신의 아내를 공경하라>인 <집안의 주인>은 실내극 형식 안에서 폭압자처럼 군림하려는 남편과 그에게서 억압받는 아내의 관계와 그것의 반전을 유머, 휴머니즘, 사회적 의식 등을 고루 갖추며 흥미롭게 이야기한다. 영화평론가 데이비드 톰슨이 “출중한 정서적 리얼리즘영화”라고 평한 이 영화는 유럽 전역에서, 그리고 특히 프랑스에서 드레이어의 명성을 높여주는 데 기여했다. <집안의 주인>은 파리에서만 41군데 극장에서 개봉되었고 한 프랑스 영화잡지들은 이것을 그해 나온 최고의 영화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이런 성공이 바탕이 되어 드레이어는 프랑스에서 <잔다르크의 열정>을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한편으로 <집안의 주인>은 유일하게 리메이크된 드레이어의 영화이기도 한데, 1942년에 나온 리메이크작에서 아내 역을 맡은 사람은 오리지널에서 딸 역을 맡은 배우였다.

잔다르크의 열정 | La Passion de Jeanne d’Arc

드레이어가 잔다르크의 영화를 만들기로 결정했을 때 제작사에서는 잔다르크에 대한 조지프 들테이의 소설 판권을 구입해주었지만, 드레이어는 그것보다는 잔다르크의 재판기록을 기초로 해서 영화를 만들었다. 역사적 기록에 따르면, 잔이 재판관 앞에 불려와 심문을 받고 결국에는 화형을 당하기까지는 거의 다섯달 정도가 걸렸지만 드레이어는 그 과정을 단 하루의 이야기 안에 축약시켜놓았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영화를 (예컨대 로베르 브레송의 <잔다르크의 재판>(1962) 같은 영화와 달리) 재판과정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잔의 외부적, 내면적 투쟁과 열정에 초점을 맞추는 영화로 만들어냈다. 무엇보다 드레이어의 이 영화는 클로즈업의 효과적인 활용으로 유명한데, 그런 실험적 스타일을 가지고 “얼굴의 돌림과 외면에 대한 놀라운 기록”(질 들뢰즈)으로서의 영화를 만들어냈다. 다른 한편으로 <잔다르크의 열정>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주인공 역을 맡은 르네 마리아 팔코네티의 명연을 빼놓을 수 없다. 영화평론가 로저 에버트는 “팔코네티의 얼굴을 알지 못하고서는 무성영화의 역사를 알 수가 없다”라고까지 쓴 적이 있다.

뱀파이어 | Vampyr

드레이어가 처음으로 만든 사운드영화인 <뱀파이어>는 역사상 가장 불안한 호러영화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영화는 데이비드 그레이라는 남자가 여행 도중 어떤 집에 머물게 되면서 겪는 악몽의 이야기를 그린다. 일종의 몽환영화라 할 이 영화에서 드레이어는 기지의 세계와 미지의 세계, 주관성과 객관성, 꿈과 현실, 선과 악 등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은 어떤 세계를 우리 앞에 펼쳐놓는다. 영화비평가인 노엘 버치는 드레이어의 영화세계에 대한 글을 쓰면서 <뱀파이어>를 두고 “모든 내러티브영화들 가운데 가장 모던한 작품”이라고 높이 평가하기도 했는데, 여기서 그가 찾아낸 모던한 형식적 요소는 시점의 주체 자체를 바꿔가는 급진적인 카메라 이동 방식, 그리고 추상화한 시간 연속체 같은 것들이었다.

분노의 날 | Vredens Dag

<뱀파이어> 이후 무려 10여년 만에 나온 드레이어의 이 장편영화부터 템포는 (종종 어떤 관객에게는 참을 수 없다고 느껴질 정도로) 느려지면서 그의 영화들은 새로운 단계로 접어든다. 영화는 마녀사냥이 한창이던 17세기를 배경으로 한 성직자의 집안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그린다. 안느는 자기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성직자 압살롬의 애정없는 후처로 살고 있는데, 어느 날 이 집을 찾아온 압살롬의 아들 마르틴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분노의 날>은 오도하는 믿음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위험한 열정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편재하는 악의 힘에 대한 심오한 이야기를 담은 영화로 볼 수 있다. 영화가 만들어졌을 당시의 사정을 고려해 이것을 나치의 박해에 대한 알레고리로 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드레이어 자신은 자기 영화에 그 같은 정치적 진술은 없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오데트 | Ordet

아버지와 그의 세 아들 등으로 구성된 보르겐가의 이야기를 그린 <오데트>는 상반되는 기질을 가진 두 기독교, 그리고 기적과 사랑에 대한 충돌하는 개념 등을 중심에 두고서 믿음과 기적의 복잡한 본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다. 영화의 그런 주제도 꽤 흥미롭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과 관련된 비주얼의 숭고한 아름다움 역시 매혹적이다. 프랑수아 트뤼포의 말에 따르면, “<오데트>에서의 각 이미지들은 숭고함과 인접한 형식적 완벽함을 갖고 있다”고 찬사를 보낸 바 있다. 이 영화에서의 이미지에 관심을 가진 여러 평자들은 닫힌 실내 안에서도 저 너머의 세계를 지향하는 영화의 비주얼 설계가 마치 베르미어의 회화를 닮았다고 논의하기도 한다.

게르트루드 | Gertrud

드레이어는 자신의 마지막 영화가 된 <게르트루드>에서 동명의 중년 여주인공이 자신의 연인들과 차례로 헤어지고 결국에는 자유의지에 따라 고독을 선택하는 과정을 이야기로 담았다. 그러나 영화는 이런 전향적인 흐름 안에다가 과거를 돌이켜보는 회고의 흐름도 내포하고 있는데, 그런 면에서 <게르트루드>는 오슨 웰스의 <위대한 앰버슨가>, 알랭 레네의 <지난해 마리엥바드에서>, 막스 오퓔스의 <롤라 몽테> 등과 한자리에 놓이는 ‘기억의 영화’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언뜻 보면 <게르트루드>는 긴 호흡의 카메라워크로 대화들만을 포착하는 지루한 영화일 수도 있고, 한 여성의 자아찾기를 다룬 뻔한 영화일 수도 있다. 그러나 좀더 시선을 면밀하게 가져가보면, 이것은 결코 그렇게 만만한 영화가 아님이 밝혀진다. 우선 뻔한 듯한 게르트루드라는 주인공부터가 복잡하기가 그지없고 그저 지루하게만 느껴지는 템포도 형식에 대한 고도의 계산에 의한 것이다. 개봉 당시부터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을 회의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게르트루드>는 분명 그 우수함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드레이어의 최고 걸작이라고 할 만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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