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이문식(37)은 ‘김밥족’을 경멸했다. 스케줄이 너무 빡빡해요, 차량으로 이동하며 김밥으로 끼니를 때워요, 징징대는 스타들을 대할 때마다 그는 “부귀영화를 얼마나 보겠다고 저러느냐”며 혀를 찼다. 그런데 요즘엔 그 말이 목구멍 안으로 쏙 들어갔다. 꼬들꼬들한 밥에, 뜨듯한 국물을 대한 지 그 또한 오래됐기 때문이다. <공공의 적>(2002)에서 ‘강동서 강력반 강 형사’를 몰라보고 “자신의 직업은 양아치”라고 깝치다가 강철중에게 죽어라 엊어맞는 산수 역으로 얼굴을 알린 지 1년. 이후 올해 개봉한 출연작만 <역전에 산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 <나비> <오! 브라더스> <황산벌> 등 5편이다. <다모>와 <죽도록 사랑해> 등 드라마 2편도 겸한데다, 뒤이어 <범죄의 재구성>과 <어깨동무> 촬영차 전국을 누비는 탓에 좋든 싫든 그도 ‘김밥족’의 일원이 됐다. 잡혀 있던 영화 촬영일정이 며칠 밀린 탓에 잠시 짬을 낼 수 있었던 이문식을 만나 갈채받는 광대가 되기까지의 산전수전 스토리를 들었다.
“이거 협찬받은 거예요. 압구정동에 있는 헤어숍에서. 근데 사람들은 변두리 미장원에서 한 줄 안다니까….” 배배 꼬인 머리를 들이대며 이문식(36)이 항변한다. 한데, 기분 나쁜 내색은 아니다. 바로 그 ‘촌스러움’이 사람들에게 편안함을 안겨준다는 것을 그 또한 알고 있기 때문 아닐까. “폼잡고 사진 찍을 때도 있죠. 근데 신문이나 잡지에 실리는 건 다 코믹한 거예요. 폼도 잡을 수 있는 사람이 잡아야 하는데 엉뚱한 사람이 잡으니까 그런가?”
“살림 많이 폈다”는 그이지만, 정작 차림새는 전과 달라진 게 하나도 없다. “어여, 내기 장기나 한판 두자”며 옆구리 쑤시는 동네 형님 분위기 또한 여전하다. 어찌보면 남파간첩 뒤통수 때렸다가 낭패 보는 4인조 강도의 일원(<간첩 리철진>)이나, 머리보다 몸이 앞서 나설 때마다 핀잔 듣는 조폭(<라이터를 켜라>)이나, 앙숙 쫒다 삼청교육대에 끌려가는 양아치(<나비>)나, 농사짓다 전장에 끌려와서 흥분하고 칭얼대는 거시기(<황산벌>)나, 그동안 맡아온 어리숙한 캐릭터들이, 외려 그를 닮았다. 향료보다 청국장에, 샐러드보다 겉절이에 가까운 그를 말이다.
그러고보니 장진 감독도 언젠가 말한 적 있다. 이문식의 ‘시골스러움’을 언급하기 전에 그가 빚어낸 캐릭터의 ‘자연스러움’에 주목하라고. 하긴, 그의 연기에는 계산이 없다. “제 연기의 출발은 무식함이거든요. 느낀 대로 말하고, 본 대로 행해요”라는 그의 연기론은 서른여섯해를 살아오면서 몸에 밴 기질과 무관치 않다. 웃음의 보조개 속에 단단히 비애를 쑤셔넣는 재주를 그의 삶의 굴곡에서 찾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이제 그의 럭비공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지그재그’ 인생길이 어떻게 연기라는 이정표를 만나 배우를 업으로 삼게 됐는지를 따라가보자.
산전수전 1 | 돈 벌려고 연극영화과 노크
“어렸을 때는 데모하는 대학생들 보면 왜 저러는지 이해를 못했고, 학교 다닐 때도 뒤에서 노는 애들 보면 한심하다고 여겼어요. 재수생만 하더라도 모두 다 담배 피우는 불량 학생들로 알았다니까요.”
그에게 끼를 주체하지 못해 안달났던 유년은 없었다. 심지어 흔한 가출 한번 안 했다. 학교 선생님이었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어머니는 삯바느질로 3남매를 키웠고, 그걸 옆에서 지켜봐야 했던 이문식은 “하루빨리 출세해서 돈벌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고작해야 평일에는 김영애가 나오는 드라마를 챙겨보고, 주말이면 이불 속에서 명화극장을 감상했던 정도가 유일한 일탈(?)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처음 전기가 들어왔을 정도로 첩첩산중이던 고향을 떠나 전주로 유학을 떠난 다음엔 그것마저 반납했다.
육군사관학교를 지원한 것도 “학비를 덜어보자”는 심산에서였다. “제복에 대한 환상도 작용했다”는 그는 이때부터 “인생이 꼬이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시험 전날, 친구와 함께 서울에 올라와 육사가 있던 태릉의 한 여인숙에 숙소를 잡았던 그는 “옆방에서 들려오는 괴이한 소리 때문에 날밤을 지새운 끝에” 체력테스트에서 그만 탈락하고 만다. 이후 해양대학교에 지원하려고 했으나 “11대 종손을 험한 뱃사람으로 만들 수는 없다”는 친지들의 만류에 결국 그는 항공대학교 항공경영학과에 입학한다.
그러나 활주로를 보며 등교하는 날은 오래지 않았다. 학과 공부 대신 공인회계사 준비를 하고 있던 그에게 한 친구가 “연극영화과에 가면 탤런트가 될 수 있다”고 꼬드긴 것. “세상 아는 만큼 보인다고. 그때는 어렸죠. 탤런트가 당시 선망의 직업이었는데, 연기하겠다는 게 아니라 그거 하면 돈 벌겠다 싶었거든요.” 재수를 결심한 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 87학번이 됐지만, “돈 많고 잘생긴” 친구들을 보면서 금세 기가 꺾였다. “탤런트 시험도 두번인가 봤는데 떨어졌죠.” 사설학원을 다녀볼까 하다 방세보다 비싼 수강료에 놀라 포기했다.
“그때는 누구나 다 그랬으니까. 행동하는 게 절박했던 시절이잖아요. 전공이 연극이었지만 시위나 집회에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내 개인적인 삶은 어떻게 펼쳐야 하는가에 대한 불안이 없진 않았지만 접어놨던 시기죠.”
취직 준비나 차근차근 하자며 영어책 들고 도서관을 들락거리던 무렵, 그는 과 선배들로부터 방학 때 공연 준비나 함께하자는 제의를 받는다. 황석영의 <돼지꿈>이었는데, 그에게 주어진 대사는 단 세 마디. 쌀쌀한 가을에 러닝셔츠만 입고 떨다 누가 부르면 ‘예’라고 답하는 게 전부라 어떤 감흥도 못 느꼈다는 그는 이후 김지하의 <밥> 공연에 참여하면서 무대의 재미를 맛본다. 전라도 사투리로 너스레를 떠는데 “순간 관객이 웃는 소리를 듣자 새로운 세상이 여기 있구나” 싶었다.
' 모 아니면 도 '
군대 갔다와서 복학하려고 학교를 갔는데 그때 문식이를 처음 봤다. 학생회 조직이 약해서 세를 좀 확장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여기저기 물어보니 이문식이 대중적 지지도도 있고 적임자라고 했다. 김지하의 <밥>을 공연하고 있는 문식이를 봤는데, ‘모 아니면 도’라고 봤다. 진득한 것 같지 않아 뵈서 괜히 집적대는 건 아닌가 고민도 됐다. 어쨌든 연극 보고나서 밥을 정말로 공평하게 나눠먹는 세상을 알려주겠다고 꼬셨다. 그리고 나서 얼마 안 되어 문식이는 과 학생회장이 됐고, 그뒤 몇년 동안 사근동에서 같이 자취를 했다. 주인집에서 잔치한다고 갈비를 재어놨는데 문식이가 술먹고 와서는 주인집 개한테 그걸 다 먹이는 바람에 월셋방에서 쫒겨난 사건은 잊을 수 없다. 제 것 챙기기보다 남 주는 걸 워낙 좋아하는 성격이라 그 이후에도 여러 가지 해프닝을 벌였다. 인정받기 전까지 한 우물만 파는 우직한 스타일의 소유자인 것만은 분명하다.
김광수(청년필름 대표)
산전수전 2 | 무대와 유치장 사이에서
하지만 그는 이내 학생운동에 빠져든다. “혼자 한 것도 아니니 쓰지 말아달라”고 하지만, 그를 아는 이들은 대본보다는 화염병을 즐겨들었고, 무대보다는 거리에 나설 때가 많았다고 입을 모은다. 과 학생회장을 맡은 이후에도 후배들을 챙기기보다 앞서 싸우는 바람에 인근 관할경찰서인 성동서의 요주의 인물 리스트에 오르기도 했다. 시위 도중 전경이 되던진 화염병에 맞아 다리에 화상을 입고 이식수술을 한 다음에도 퇴원하자마자 곧장 임수경 3차 공판장에 난입해 법정소란에 가담했다는 죄목으로 한달 가까이 유치장 신세를 졌을 정도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무대로 그를 다시 이끌어준 이는 같은 과 최형인 교수다. 유오성, 권해효, 설경구와 함께 애제자로 꼽았던 이문식에게 최 교수는 수시로 면회를 와서는 “니가 이러는 거 다 알겠다. 그런데 연극은 해야 하지 않겠냐”며 창과 30주년 기념공연인 <사천의 선인>의 물장수 역을 그에게 맡겼다. “날씨도 추운데 직접 오셔서 남동생 옷가지까지 챙겨서 넣어주시는 걸 보고선 고맙기도 하고 서럽기도 해서 더러 울기도 했다”는 그는 공연하다 다른 건수로 덜컥 잡히면 어떡하나 싶어 항상 최 교수의 차를 얻어 타고 대학로에 연습을 다녔다. 연습이 끝난 뒤에는 최 교수의 오피스텔로 숨어들었고.
“신생 극단이니 누가 알아주나요. 대학로에 입성하면서 설움도 많았죠. (설)경구 형이랑 공연 10분 전까지 호객 행위하다가 급히 옷갈아 입은 적이 부지기수예요. 한번은 겨울이었는데 얼마나 추웠는지 밖에서 선전하다 들어온 경구 형이 사진기자 의상을 갈아입고 무대에 들어섰는데 손이 꽁꽁 얼어서 셔터가 안 눌러지는 해프닝도 있었어요.”
“드럽고 치사한” 군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대학졸업과 함께 최형인 교수가 중심이 된 한양레퍼토리 창단에 나선다. 롱코트 맞춰 입고 손님 끄는 일까지 했던 시절이지만, 그는 “과장된 대사가 대부분이었던 당시 풍토에서 리얼한 연기를 선보이는 연극 집단”이라는 점에서 구성원 모두가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고 말한다. 실제로 관객 호응도 대단했다. 당시 세미소극장은 대부분의 극단이 작품을 올렸지만 본전을 건진 작품은 많지 않았다. 저주받은 이 무대에서 한양레퍼토리는 창립작 <심바새메>를 비롯해서 이후 승승장구했다.
<춘풍의 처> <한 여름밤의 꿈> 등에서 주로 “분위기 띄우는 역할”을 도맡던 그는 문득 또 다른 활력소가 필요하다고 느낀다. 5년쯤 지나자, 극단에는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열정의 크기보단 다툼의 횟수가 많아졌다. “배역 때문에도 갈등이 생기고….” 극단 생활을 하면서도 시간이 남을 때면 물탱크 청소, 세무사 보조 등의 아르바이트로 부족한 생활비를 벌충해야 했던 그였던지라 프리 선언이 절실한 때이기도 했다. “안국동에서 국수 배달한 적이 있는데. 퍼지기 전에 날라야 하잖아요. 그런데다 거기는 밥도 안 주는 곳이었고. 배는 고프지, 한여름에 땀을 삐질삐질 흘리지. 내가 왜 이러고 있나 싶더라”는 그는 장진 감독의 <매직타임>을 시작으로 홀로 서기를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