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타란티노의 귀환 [1]
2003-11-21
글 : 김봉석 (영화평론가)
살아 있는 장르영화의 전도서, <킬 빌>

<재키 브라운> 이후 6년 만에 돌아온 쿠엔틴 타란티노의 <킬 빌>은 전작들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더욱 더 순수한 영화광의 자세로 돌아갔다고나 할까. 아니면 그냥 제멋대로 한바탕 난장을 벌였다고나 할까. 홍콩의 무협영화, 일본의 사무라이 영화와 야쿠자영화, 스파게티 웨스턴 등의 장면과 스타일을 그대로 가져와 짜깁기한 <킬 빌>은 무척 자극적이면서도 한없이 가벼운 영화다. 팔다리가 잘려나가고,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는 폭력의 향연 속에서도 희한하게 웃음이 터져나온다. 일부에게는 순수한 오락이며 유희이지만, 누구에게는 지나치게 가벼운 제스처에 불과한 영화 <킬 빌>은 타란티노의 전작들처럼 논쟁적이다. 하지만 한편의 영화를 두편으로 나누었고, 이제 전반부만을 본 상태에서 <킬 빌>을 판단하기는 이르다. 우선 <킬 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 타란티노가 좋아했던 그 ‘싸구려영화’들의 흔적과 지난 6년의 과정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타란티노처럼, 그 폭력적인 홍콩의 무협영화에 한때 열광했던 <킬리만자로>의 오승욱 감독이 <킬 빌> 감상기를 보내왔다.

쿠엔틴 타란티노가 지독한 영화광이란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타란티노의 영화에는 그가 보았던 수많은 영화의 장면과 대사가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 아니 통째로 가져온다. 94년 5월21일, <펄프픽션>을 공개한 뒤 기자회견에서 한 기자가 <저수지의 개들>이 임영동의 <용호풍운>을 표절한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던졌다. 무시하거나 화를 낼 것이라는 예측과는 정반대로 타란티노는 <용호풍운>에 대한 열렬한 찬사를 늘어놓았고, 확실하게 “훔쳐왔다”고 단언했다. “영화의 요소는 모든 곳에 있다”는 말과 함께.

그거야말로 타란티노의 힘이다. <재키 브라운> 이후 6년 만에 내놓은 신작 <킬 빌>은 타란티노가 열광했던 영화들을 한데 모아놓은 일종의 베스트 앨범이다. “나는 블랙스플로이테이션영화를 상영하는 ‘그라인드하우스’에서 자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킬 빌>은 그런 영화관에서 상영된 그라인드하우스 무비에 바치는 영화다. 복수라는 테마를 중심으로 모든 장르와 서브 장르의 요소를 섞어넣었으니까…. 나는 다양한 장르의 영화에서 영향을 받았고, <킬 빌>의 경우 그걸 한데 섞은 스튜처럼 만들고 싶었다. 그걸 모두 집어넣어 관객이 영화관을 나갈 때 5편 정도의 영화를 본 것 같은 기분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우선 마카로니 웨스턴적인 요소가 있다. 거기에 일본의 사무라이영화, 그것도 구로사와 아키라가 아니라 <자토이치>나 후카사쿠 긴지의 야쿠자영화 같은 것. 비행기로 도쿄 상공을 나는 장면은 도호영화사에서 만든 괴수영화의 영향을 받았고, 실제로 도호의 고지라 세트를 빌렸다. 난 그들의 열렬한 팬이니까 그에 대한 트리뷰트도 하고 싶었다. 그리고 홍콩 쇼브러더스의 영화가 있고 지금 일본의 대중영화들, 폭력적이며 와일드한 이시이 다카시, 이시이 소고의 영화들도 들어 있다.”

영화의 신도가 쓴 장르의 전도서 <킬 빌>

<저수지의 개들>
<펄프픽션>

<킬 빌>을 준비하면서 타란티노가 했던 가장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는 그 수많은 영화들을 보는 것이었다. 아마 다음 연출작이 될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인글로리어즈 배스터드>(Inglorious Bastards)의 시나리오를 쓰고, 우마 서먼과 다시 만나 <킬 빌>을 쓰는 도중 타란티노는 집에 영화관을 만들었다. 1년 이상의 설계를 통해, 모든 영화광이 꿈꾸는 공간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리고 수많은 영화의 필름 프린트를 모아, 날마다 영화를 봤다(그가 비디오 세대라는 것은 일종의 편견이다). “나에게 영화는 종교와도 같다. 한마디로 영화에 대한 나의 생각은 신앙과도 같다. 영화를 향한 내 마음은 절대 배반이라는 것을 모른다.” 타란티노에게 영화는 종교이고, 영화관은 신성한 예배당이다. 그가 ‘교회’라고 부르는 이 영화관에서, 타란티노는 <킬 빌>을 위한 준비를 했다. “옛날, 어렸을 때부터 보고 자란 쇼브러더스의 영화를 모두 챙겨 봤다. 보지 않았던 영화들은 물론, 이미 봤던 것들도 다시 한번 보았다. 그러자 어느 순간, 이런 영화의 음악, 사운드, 미술, 줌숏 같은 것들이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익혀졌다. 1년 반 정도는 쇼브러더스 영화에 그리고는 다른 홍콩 무협영화, 일본 애니메이션, 사무라이영화, 야쿠자영화 같은 것들만 봤더니 세상에서 이런 영화들만 만들어지고 있는 듯한 기분까지 들었다.”

그 모든 것들은 <킬 빌>에서 한데 엉켜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내고 있다. 언뜻 보기에 <킬 빌>은 우리가 이미 보았던 것들의 짜깁기, 페스티시다. 하지만 그 안에는 나름의 질서가 있고, 타란티노만의 세계가 있다. 아무리 영화에 정통하다 해도, 타란티노처럼 대중문화 중독자라 해도 미처 알아차릴 수 없는 수많은 것들이 그의 세계 속에 녹아들어가 있다. 양념의 이름이 무엇인지 정확히 몰라도, 그게 맛있는 음식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게다가 식어 있을 때 더욱 맛있는.

타란티노식으로 재창조된 세계

타란티노의 세계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현실의 법칙이 통용되지 않는다. 브라이드가 타고 가는 비행기에는 일본도를 꽂는 칼집까지 마련되어 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 ‘현실의 논리’를 떠올리는 순간, 당신은 타란티노의 세계에서 이탈하게 된다. “관객이 모든 것까지 알 필요는 없다. 자신의 세계와 신화를 만드는 경우, 어떤 의문에도 대답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답을 관객에게 제시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내가 그 답을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한 거지. 하토리 한조가 어떻게 오키나와로 흘러오게 되었는가, 그 과거를 말할 수도 있다. 그는 왜 30년간 검을 만들지 않았는가, 대머리 남자는 누구인가, 빌의 인생이 그뒤 어떻게 되는가 등등의 모든 것을. 하지만 관객에게 대답할 필요는 없는 거다. 내가 알고 있다는 것만 알아주면 된다. 이 세계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느껴주기만 하면 된다. 내가 완전히 조종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타란티노가 말하는 ‘나의 베스트 장르영화’ #1

야쿠자영화

야쿠자영화라고 한다면 <의리없는 전쟁>(감독 후카사쿠 긴지, 1973) 시리즈 1편부터 3편까지가 최고다. 도에이 야쿠자영화 중에서도 뛰어난 것들이다. 나는 후카사쿠 긴지 영화에서 ‘인의’를 배웠다. 야쿠자영화는 굉장히 시네마틱하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이 영화들을 자막없이 보았지만, 일본어를 알지 못해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 안에 감춰져 있던 강렬한 감정의 동요들도 말이다. 그리고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기타노 다케시의 <소나티네>(감독 기타노 다케시, 1993). 이 작품은 나의 배급으로 미국에서 개봉하기도 했다.

챰발라 시대극(사무라이영화)

<자토이치>(감독 미스미 겐지, 1962)는 두말 할 것 없는 최고의 작품이고 가쓰 신타로는 사상 최고의 배우다. 캐릭터가 이 이상으로 나올 수는 없을 것 같다. 일본의 존 웨인이라고 말하는 것도 당연하다. <아들을 동반한 검객>(감독 미스미 겐지, 1972) 시리즈도 굉장히 좋은데 특히 두 번째 만든 <산즈강의 유모차>를 보면 심장이 어디론가 날아가버리는 듯한 기분이 든다.

애니메이션

애니메이션 중에서 베스트 작품은 생각해본 적이 없다. 비틀스의 <노란잠수함>(감독 조지 더닝, 1968)은 언제나 좋아했던 작품이고, <멍멍이야기> (감독 해밀턴 라스케, 1955)역시.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일본 애니메이션. <아키라>(감독 오토모 가쓰히로, 1988) <블러드: 라스트 뱀파이어>(Blood: The Last Vampaire, 감독 기타쿠보 히로유키, 2000)는 너무도 쿨하다. 교복을 입은 소녀가 흡혈귀를 일본도로 내리치는 장면이나 흡혈귀들이 살해당하는 액션을 보고 정말로 흥분했었다.

마카로니 웨스턴

<황야의 무법자>(감독 세르지오 레오네, 1964) 시리즈의 세르지오 레오네는 아마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감독일 게다. 가장 영향을 받은 감독이기도 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석양의 무법자>(감독 세르지오 레오네, 1966)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되었다. 존경을 표하고 싶은 작품은 이외에는 없다.

서부극

<리오 브라보>(감독 하워드 혹스, 1959)는 누가 뭐래도 수작이다. 나는 몇번이고 이 영화를 보았지만 전혀 질리지 않는다. 윌리엄 위트니의 광팬이기도 한데, 특히 좋아하는 것은 <골든 스탈리온>(The Golden Stallion, 감독 윌리엄 위트니, 1949)이다. 이걸 처음 봤을 때 오금이 저려왔다. 말론 브랜도가 연출한 서부극은, 이외에도 몇편인가 있지만 역시 데뷔작인 <애꾸눈 잭>(감독 말론 브랜도, 1960)이 제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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