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매력적으로 뻔뻔한 <올드보이>와 박찬욱 감독 [3]
2003-11-21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씨네 | 배우가 눈이 가늘면 뭐가 좋은데요?

박 | 뭐에 좋다는 게 아니라, 그냥 나하고 닮았기 때문에 맘에 든다 이거지… 지태씨는 무용과 요가로 단련된 그 긴 몸을 우아하게 움직이죠. 극중 이우진이라는 자가 지닌 기품이 거기서 나와요. 하지만 어떤 땐 조금 야비한 면을 내비치기도 하죠. 재산과 교양에 의해 감춰진 악마가 잠깐씩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들… 성장을 멈춰버린 애어른, 어떤 의사도 진단해내지 못할 만큼 잘 위장된 정신이상의 징후… 유지태는 이런 성격을 완벽하게 표현해냈던 겁니다, 그 긴 몸과 그 가느다란 눈으로….

씨네 | 강혜정양의 매력은 뭐죠?

박 | 그야 물론 살짝 걷어 올라간 윗입술이죠. 감독들이 대개, 남자고 여자고 함께 일할 배우 얼굴을 유심히 관찰하잖아요. 어떻게 찍어줄까 하고. 그래서 현장에서 그걸 써먹게 되는데, 이번엔 유지태가 혜정양을 보는 시점 쇼트가 그런 경우였어요. 비스듬히 뒤에서 바라본 그녀의 얼굴 클로즈업이죠. 그때 그 살짝 걷어 올라간 윗입술이 보통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게 아니에요. 그 쇼트, 편집실에서도 참 좋아했죠.

씨네 | 그 입술말고는 없나요?

박 | 일단 말귀를 잘 알아듣습니다. 그거 되게 중요한 거거든요. 감독하고 대화가 되어야 뭐 연기고 뭐고 하지 않겠어요? 다음으로는, 연기에 군더더기가 없습니다. 불필요한 동작, 쓸데없는 표정을 만들어서 하지 않는다는 거죠. 핵심만 간결하게 표현한다, 그 나이에 그렇게 연기하려고 노력하는 배우, 드뭅니다.

씨네 | <올드보이>는, ‘충격적인 반전’ 운운해 가면서 호객행위에 열심이던데 도대체 무슨 반전입니까? 좀 공개하면 안 될까요?

박 | 까짓것 뭐… 오프 더 레코드루다가 귀띔 한마디. 최민식은 영화의 마지막에 가서야 이 모든 사건이 꿈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깨어나보니 감금방이었던 거죠. 그곳은 끝없이 이어지는 복도 좌우로 늘어선 무한대 개수의 방들 중 하나, 그 전체가 바로 ‘지옥’이라는 가공할 결말입니다. 그럼 그걸로 끝이냐, 천만에. 방에는 벽마다 작은 문이 하나씩 있습니다. 또 다른 방으로 이어지는 문, 그러나 그 미지의 방에 들어서는 순간 당신은 무참히 살해될 수 있습니다. 거기 유지태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죠. 최후의 대격돌을 벌이는 최민식과 유지태. 두둥- 최민식은 곧이어 유지태가 유아 시절 분리수술 중 죽은 자신의 샴쌍둥이의 체현이라는 사실, 좀더 정확히 말해 그 죄의식이 투사해 만들어낸 가공의 인격이라는 비밀을 알아내게 됩니다. 자신이 존재하는 한 그 역시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깨달은 최민식은 급기야 자살을 기도하는데… 한편 불현듯 자기가 유령일지도 모른다는 깨달음을 얻은 유지태는 최민식의 자살 직전, 강혜정의 몸으로 스며들어갑니다. 빙의된 강혜정은 태연히 남탕에 발을 들여놓게 되고….

씨네 | 실로 정훈이 만화를 방불케 하는 대단한 이야기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엄청난 흥행 돌풍이 예상되는군요….

박 | (떨떠름한 얼굴로)… 영광이겠습니다, 정훈이씨한테는….

씨네 | 최근 어느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적 있죠? (신문에서 오린 조각을 꺼내들고) “… 저는 흥행공식을 알고 있죠. 다만 돈 된다고 내 색깔을 포기하는 게 싫다는 것입니다.” 어디서 이런 자신감이 나오는지 궁금하군요.

박 | 그 기자 양반이, “남들 잘 안 하는 얘기를 자꾸 다루는 이유가 뭡니까?” 하시길래 답했습니다. 내가 한 말은 정확히 이겁니다. “물론 상업적으로 좀더 안전한 기획이란 건 따로 있겠죠.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내’가 재밌는 영화를 만들어야지, 어쩌겠어요. 다시 말해, 색시도 기왕이면 부잣집 딸내미든가 돈벌이 잘하는 여자라면 좋겠죠. 그래도 사랑이 먼저지, 어떻게 그런 조건만 보고 장가를 갈 수가 있겠습니까.” 이게 진실입니다. 물론 악의를 가지고 쓴 글이 아닌 줄은 알지만, 나한테는 큰 상처가 되었답니다. 이 대목에서 한번 더 <올드보이> 대사를 인용하자면, “명심하세요, 모래알이든 바위 조각이든 물에 가라앉기는 마찬가지예요.”

조건만 보고 장가 갈 수 있겠습니까

씨네 | 인터뷰란 게 참 힘들죠?

박 | 인터뷰는 영혼을 갉아먹습니다. 왜냐? 어차피 나오는 질문이라는 게 늘 거기서 거기니까 나는 수십 수백번 같은 대답을 되풀이하게 되죠. 그 상투적인 언사를 반복하면서 나는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겁니다. ‘이 얼마나 낯간지럽고 구차스럽고 구질구질하고 파렴치한 말이란 말인가….’ 언젠가는 영화사와의 계약서에 이런 조항을 넣게 될 날이 올 겁니다. ‘갑은 을에게 어떠한 인터뷰도 강요할 수 없다.’

씨네 | 그건 너무 하는 거 아닙니까?

박 | 근본적으로 저는 ‘오로지 영화의 크레딧으로만 존재하는’ 감독이 되고자 합니다. 그게 제 목표입니다.

씨네 | 요즘 살이 자꾸 쪄서 사진발이 영 시원찮아졌다고 사진기자들이 그러던데, 혹시 그런 이유로…?

박 | 사람이 진지하게 얘기할 때는 좀 진지하게 들어주세요!

씨네 | 인터뷰를 안 하겠다… 흥행공식을 아는 감독이라 자신이 있으신가 보죠?

박 | (애원하듯이) 생각해 보세요. 제가 미쳤습니까, 공식 알면 혼자만 간직했다가 필요할 때 써먹지 그런 소리를 공개적으로 하고 다니게? 장준환 감독, 나 그런 얘기 한 적 없어요, 공식 같은 거 모르니까 그거 가르쳐달라고 자꾸 전화하지 좀 마. 그리구요 여러분, 이 기회를 빌려 한 가지 분명히 밝혀두겠는데요, 저 돈 좋아합니다.

씨네 | 이제 개봉을 앞둔 시점에서 무슨 돈 버는 꿈이라도 꾸셨는지요?

박 | 예, 우리 포스터가 붙은 담벼락에 생쥐 한 마리가 뽀르르 기어올라가더군요. 그러더니 글쎄 제목 활자 왼쪽에 찰싹 달라붙는 거예요, 얘가… 어때요, 대단하지 않습니까?

씨네 | 생쥐가… 요? 그게 도대체… 무슨…?

박 | 아직두 모르겠어요? 참 답답한 양반일세… 아, OLD BOY 앞에 G 한 마리가 붙으면 뭐예요, GOLD BOY 아닙니까… 길몽도 이런 길몽이 없어요, 이거 완전 메가히트라니깐, 메가히트! 음화핫핫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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