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택 감독 영화에는 누구도 투자하지 않는다
나이 오십에 들어서야 첫발을 내디디는 나의 감독 입문은 예상대로 순탄치 않았다. 내가 쓴 시나리오는 메이저급 투자사에 설득력을 주지 못했다. 시나리오와 촬영 콘티까지 제출했는데 돌아오는 대답은 다시 시나리오 작업을 시작해보자는 것이 아닌가. 아니 일년이 넘게 시나리오를 뜯어고치고 촬영 콘티까지 제출했는데 왜 다시 시나리오 작업을 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누가 시나리오 작업을 한다는 것인가. 시나리오에 문제가 있다면 촬영을 진행시켜나가면서 감독과 촬영 스탭에 의해 자연스럽게 수정되는 것이지 않은가. 누가 책상머리에 앉아서 시나리오를 칼질한단 말인가. 이런 나의 생각이 돈키호테가 되는 세상이 온 것이다. 촬영감독이면서도 프로듀서를 겸했던 최두영 감독은 투자사를 찾아다니다 지친 발걸음으로 종로 여관방에 들어와 울분을 터뜨렸다. “대한민국의 그 어떤 투자사도 이윤택 감독의 영화에 투자하지 않습니다!” 그 순간 여관방에 둘러앉았던 연출부원들은 숙연해졌다. 만일 돈을 구하지 못한다면 판을 엎을 것이다. 그리고 두번 다시 영화판을 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 빌어먹을 대한민국에서 더이상 내 이름 석자를 걸고 그 어떤 작업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사라져주리라….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연출부원들은 아무런 조건없이 영화작업에 참여하겠다는 선서를 했다. 아, 이거야말로 21세기 서울 종로통에서의 독립운동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1919년 3월1일 정오의 독립선언과 2002년 3월 자정 종로 여관방에서의 독립영화 독립선언이 무슨 차이가 있다는 말인가, 젠장….
대한독립영화 만쉐이…
그래도 소액 투자자들의 돈이 제법 모이고 제작자 김청수의 순진하고 무모한 발품에 힘입어 영화제작은 독립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했다. 나와 연희단 거리패도 극단의 전 재산인 1억5천만원을 담보로 잡혔다. 여기서 깨달은 것은 그 어떤 영화적 상상력도 흥행물로서의 확신을 주지 못하면 한국에서의 영화찍기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천민 자본주의적인 영화판에서 겪는 시련이 오히려 반동적인 열정을 불태우게 한다. 야 이거 한마디로 제 밥그릇 제가 챙겨야 하는 세상이구나. 나는 결국 초라한 도시의 게릴라에 불과하구나. 그 누구도 인정하지 않고 돈 태우지 않는데??? 저 혼자 한국연극 한국영화 운운하면서 개꿈 꾸며 살았구나. 그렇게 살면서 반백의 머리털 휘날리는 중늙은이가 되었구나. 그렇다면, 좋다! 이판사판 붙어보자! 내 이 반백의 머리털이라도 곤두세우리라. 사자털처럼 세우고 돌격이다 돌겨억… 대한독립영화 만세에….
비전문 연기자들의 삶의 연기
영화촬영에 들어간 지 두달 만에 촬영이 무사히 끝났다.
‘무사히 끝났다’는 의미는 먼저 촬영과정에서 엎어지지 않고 지체되지도 않고 촬영횟수 일정을 꼬박 지켰다는 말이다. 출연진 200여명과 스탭 60여명이 혼연일체가 되어 작업했던 밀양에서의 두달간을 영원히 기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특히 출연진 200여명 중 60%가 넘는 배우들이 현지에서 참가한 비전문 연기자들이었다. 그들은 바로 촬영지의 주민들이었고, 자신이 살고 있는 마을에서 영화촬영이 진행된다는 자부심 하나로 버텨주었다. 제대로 출연료도 받지 못한 채 농번기를 마다않고 영화작업에 참여해준 현지 주민들 덕분에 한국에서의 영화찍기는 흥미롭고 감동적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학생부터 팔순 노옹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참가한 비전문 연기자들의 연기는 과장된 어투나 나쁜 연기적 습성이 없이 진솔하고 자연스러웠다. 그들이야말로 삶의 연기자들이었다. 그들에게 지급한 개런티 일당은 쇠고기 국밥 한 그릇. <오구> 중 명장면으로 기억될 만한 ‘동네 평상에서의 화투판’에서 바지를 홀랑 벗고 “봐라 봐라 봐아라…”를 연기했던 이만득 할아버님이 촬영을 끝내고 돌아가셨다. 연극 <오구> 공연 중에 반드시 연극 관련자나 가족 중 누군가가 죽는다는 미스터리가 있는데, 영화 <오구> 촬영 중에도 어김없이 이 미스터리는 실제 상황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그 죽음은 가장 화려하고 평화로운 호상이라는 정설이 있기에 그의 죽음을 안심하고 축복해드릴 수 있었다. 이만득 할아버님은 분명 행복하게 저 세상 가셨을 것이다.
무얼 찍자는 것인가
‘무사히 끝났다’는 두 번째 의미는 찍고 싶은 대로 찍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시를 쓰고 연극 연출을 했던 신입감독과 기존 촬영스탭과의 예견되는 불화는 몇 차례의 고비를 잘도 넘어갔다. 인문학적 상상력을 외치는 감독과 편집이 잘 붙느냐 마느냐를 따지는 영화 메커니즘의 충돌을 상호간의 격렬한 토론과 믿음으로 극복해나갔다. 촬영지에 나가면 촬영감독이 촬영 콘티와 다른 지점과 각도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있다. 그러면 나는 슬그머니 내가 지정한 지점과 각도에 감독 의자를 놓게 하고 앉는다. 이런 날 촬영 스탭은 초긴장 상태에 돌입한다. 촬영감독이 다가와서 낮은 목소리로 카메라 위치를 바꾸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그러면 나는 천연덕스럽게 되묻는다. “무얼 찍자는 거야? 예쁜 그림엽서 찍자는 거야?!” 그러면서 나는 또 한 장면이 그냥 보이는 풍경이 아니라 상징이 되어야 하고 시가 되어야 하는 이유를 역설한다. 이때부터 촬영은 중단되고 토론이 시작된다. 나의 퍼스트 조감독은 강씨 성을 가진 여성이고, 촬영감독은 최씨 성을 소유한 인물이다. 그래서 나는 매일 강고집과 고집스럽게 부딪치고 최뿔따구와 머리통 깨지는 소싸움을 벌이는 입장이 되었다. 나는 촬영 내내 전투를 치러내고 있다는 생각을 지우지 못했다. 이건 싸움이다, 영화적이어야 한다는 고정관념과의 싸움, 차가운 메커니즘 속에 나의 상상력을 밀어넣어야 한다는 싸움, 천민과 야바위꾼이 득세하는 세상과의 싸움 말이다.
당신은 내가 만난 최고·최악의 감독이오
한국의 영화인들은 생각이 많다. 영화작업이라는 것이 원래 기다리는 시간이 많아서인지 생각이 많고 토론을 즐긴다. 그래서 나는 매일 현장의 철학자가 되어야 했고 개똥 논리학을 설파해야 했고 상상력을 파는 시인이어야 했다, 그러면서 나는 그들에게서 영화가 무엇인가를 배워나갔다. 그들 모두는 나의 영화학 선생이었다. 한철희 음향감독은 내 억지스런 주문에 기가 막혀 아예 리시버를 내 귀에 대주었다. 그러면서 나를 그렇게 평했다. “당신은 내가 만난 감독 중에 배우의 연기를 가장 잘 뽑아내는 최고지만, 촬영 스탭들에게는 최악의 감독이오.” 서정달 조명감독은 빛의 선생이었다. 내가 표현하고 싶은 밑그림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것이 왜 불가능하며, 불가능하다면 어떤 대안이 있는가까지 가르쳐주었다. 그렇게 보낸 밀양에서의 두달간은 내 삶의 절정이었다. 돈이 없어 못 찍었고 시간이 없어 놓친 부분이 많지만, 그래도 내가 꿈꾸던 상상력을 정직하게 털어넣었다. 변명은 없다. 그래 이렇게 끝났다. 이제 잠들자 영원이라도 좋다. 네살 때 처음 영화를 보고 영화감독을 꿈꾸었던 아이가 나이 오십에 이르러서야 그 꿈을 ‘무사히’ 이룬 것이다.
연극 <오구>와 영화 <오구>, 뭐가 다른가
사람들은 묻는다. 왜 연극 <오구>를 영화 <오구>로 만들었느냐고. 나는 대답한다. <오구>가 가장 재미있고 영화적이니까. 그렇다면, 또 묻는다. 당신이 생각하는 영화는 어떤 것인가.
나는 또 대답한다. 연극은 관객과 직접 만난다. 그러니까 구체적인 몸으로 관객과 부딪친다. 그래서 연극은 영원한 현재진행형(ing)의 예술이며 몸으로 때우는 작업이다. 그만큼 관객과 직접 만나고 함께 만난다. 만일 외로워서 사람들과 함께 웃고 울고 싶다면 영화보다 연극을 권하고 싶다.
그러나 영화는 찍어보니 정말 외롭고 허망한 작업이다. 감독과 촬영감독 편집자 등 극소수의 참가자 외에는 영화가 어떻게 찍히는지도 잘 모르기 일쑤다. 그리고 극장에 걸리는 영화는 어디까지나 사진의 연결, 즉 환영(illusion)일 뿐이다. 그래서 영화 관객은 저 혼자 그림책을 보는 아이와 같은 입장이 된다. 그래서 영화는 고독한 상상력의 산물이다. 고독한 만큼 환상적이고 저 혼자 보고 생각하고 느끼기 때문에 상상력의 공간이 넓고 변화무쌍할 수 있다. 연극이 몸이라면 영화는 그림이다. 연극이 리얼하다면 영화는 환상적이다.
그래서 영화 <오구>를 보러 오는 관객은 환상의 세계로 나들이가는 기분으로 극장문을 들어서라고 권하고 싶다. 그러나 그림 같은 환상의 세계에서 만나는 사람은 배우가 아니라 결국 자신의 모습이며 자신의 어머니, 할머니, 아이들의 모습일 것이다.
만화적 상상력에 숨어 있는 이윤택식 인문학
영화 <오구>에 대한 세상의 반응은 아직 잘 모른다. 내가 확인한 가장 확실한 반응은 아내와 딸의 반응이다. 초등학교 교사인 아내는 기대 이상으로 재미있어 오랜만에 어른들이 할머니, 아이들과 함께 나들이갈 수 있는 영화라고 했다. 그러나 지금 한겨레영화학교에 나가는 대학 3년 큰딸 애는 불만인 모양이다. 지 아비가 진지하거나 실험적인 예술영화 같은 것을 찍을 줄 기대한 것인가. 딸의 방에는 <여섯개의 시선> <영매> 같은 포스터는 붙어 있는데 지 아비가 찍은 <오구> 포스터는 붙어 있지 않다. 도대체 유치하고 만화 같은 포스터라는 것이다. 그러나 어쩌랴. 나는 만화 같은 <오구> 포스터가 좋다. 내가 찍은 영화 <오구>가 만화 같고 동화 같았으면 한다. 그래서 어른, 아이, 할머니 할 것 없이 부담없이 소풍가는 기분으로 영화관에 나들이왔으면 좋겠다. 그러나 그 만화 같은 그림 속에 나의 인문학이 아주 멀리 뒤편에 슬그머니 서 있다는 믿음은 있다.
♣ 1952년 부산 출생
♣ 1986년 부산에서 극단 연희단 거리패와 가마골 소극장을 세우고 연극활동 시작. 대표적인 연출작으로 <청부>(1991), <비닐하우스>(1994), <문제적 인간 연산>(1995), <햄릿>(1996), <느낌, 극락같은>(1998), <시골선비 조남명>(2001) 등이 있으며, 희곡집으로는 <웃다 북치다 죽다>(1993), <도솔가>(2000), <어머니>(1999) 등이 있다. 이외에도 <시민> <밥의 사랑> 등의 시집을 출간했다.
♣ 도쿄국제연극제 <오구>(1990), 독일에센연극제 <오구>(1991), 미국 라마마극장 <길 떠나는 가족>(1992), 러시아 아스테이지대륙연극제 <햄릿>(1996), 베를린 세계 문화의 집 <햄릿>, <오구>(1998), 러시아 타강카 극장 <어머니>(1999) 등 순회공연과 베를린연극제 연기 워크숍 지도자로 초청되었다(1998, 2003).
·현재 극단 연희단 거리패 대표, 밀양연극촌 예술감독, 성균관대학교 연기예술학과 초빙교수로 재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