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영화 <오구> [1]
2003-11-21
글 : 권은주
이윤택이 풀어놓는 연극에서 영화 <오구>가 되기까지

영화판에서 벌인 질펀한 굿 한 마당

이른바 이윤택을, 전투적인 표현을 빌려 문화게릴라, 온화하게는 전방위예술가라고 부른다. 그만큼 문화계의 이곳저곳을 발판으로 살아왔다는 말이다. 그가 자신이 연출한 연극 <오구>를 영화로 만들었다. 네살 적 영화애로 시작하여, 연극 <오구>의 이야기를 거쳐, 다시 영화 <오구>에 이르기까지 1인칭 ‘나’로서 이윤택이 들려주는 ‘인문학적 상상력과 영화메커니즘의 만남’에 대한 고백록이 여기 적혀 있다.

영화와의 조우

내가 영화를 처음 본 것은 네살쯤이었던 것 같다. 아버지 등에 업혀 동네 인근 초량극장에 갔는데, 거기서 처음 본 영화가 존 웨인 주연의 <서부 삼형제>였다. 두형이 시내에 나간 사이 목장에 도둑들이 들이닥쳤고, 소발굽에 밟혀 죽는 막내동생의 모습이 너무 처참해서 나는 소리내어 울었던 것 같다. 극장 안은 너무 추웠고, 아버지가 사준 카스테라가 상했는지 극장 안에서 생똥을 쌌다.

하여튼 나는 그뒤 어린 영화광이었다. 하루 두세편씩 영화를 보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았다. 좋은 영화는 좋은 점 때문에 감동적이었고, 나쁜 영화는 저래서 나쁘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해주어서 볼 가치가 있었다.

나이가 들면서 스스로 영화를 만들어보리라는 꿈을 구체화하기 위해 시나리오를 써나가기 시작했다. 내가 처음 쓴 시나리오 <우리는 지금 제네바로 간다>는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한 작품이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당선통지 대신 양아치처럼 생긴 아저씨가 내가 응모한 시나리오를 들고 찾아왔다. 윤삼육 선생이 낙선한 작품 중에서 쓸 만한 것을 준 모양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삼류 영화감독 송영수란 인간이외다. 이 시나리오를 내게 준다면 멋진 영화 한편 만들어보고 싶소.” 그러시라고 했는데, 아무 소식없이 2년쯤 지나 감독에게서 연락이 왔다. 제작자를 만나보자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지금 제네바로 간다>는 대한극장에서 첫 상영을 했고, 송 감독은 매우 만족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어때, 이 작가?” 나는 그만 참았던 불만을 거침없이 토해냈다. “썅, 이 엉터리 삼류 감독님아! 왜 대본에도 없는 약장수를 등장시키고 외국영화에서 본 당구장면을 베껴넣었어!” 송 감독은 “영화란 그런 거야 이 작가. 우리는 성공한 거야 성공한 거라고!” 그러면서 나를 얼싸안았다(스스로 삼류 감독이라 칭했던 송영수 감독은 지금 여기 없다. 먼저 죽은 그에게 영화 <오구>를 바치고 싶다).

그렇게 해서 몇편 시나리오를 썼는데, 내가 공들여 각색한 <오세암>은 개봉하자마자 간판내렸고, 회심의 역작이라 자부했던 <금지>란 시나리오는 이대로 영화 찍었다가는 영화사 간판 내리고 다 잡혀들어간다 해서 전혀 다른 영화 <서울 에비타>로 개봉되었다. 시나리오 작가의 의도와 전혀 다른 영화가 만들어진다는 것을 <낙타는 따로 울지 않는다>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를 쓰면서 깨달았다. 그리고 시나리오 집필을 접었다.

연극 <오구> 직싸게 욕먹고 대박 터지다


1990년 6월 서울 대학로 문예회관 소극장은 그야말로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가족 관객으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이윤택과 연희단 거리패가 88년 <산 씻김>, 89년 <시민K>에 이어 드디어 세 번째 연극 <오구>로 대박을 터뜨리는 순간이었다. 이름없는 지방의 젊은 연극배우들로 구성된 연극이 서울 대학로 한가운데서 대박 행렬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오구>는 한국 연극사의 한 사건임이 분명했다. 연극평론가 김방옥은 “오영진의 <맹진사댁 경사> 이후 한국적 코미디극의 최대 수확”이라고 언급했지만 욕도 많이 먹었다. 관람 중이던 국립극단 배우들이 중도에서 퇴장했고, 연극평론가 이상일 선생은 전통을 소재로 경박하게 장난질을 쳤다고 불호령을 내리셨다. 저승사자들이 무지 큰 잠지를 흔들면서 등장하면 객석은 그냥 까무라쳤다. 할머니들은 “아이고 이놈아 춥다 옷 입어라” 하시면서 마냥 즐거워하시고, 젊은 여대생들은 비명을 지르며 엎어졌다. 그러나 직싸게 욕먹은 연극 <오구>가 90년 도쿄국제연극제와 91년 독일 세계연극제에 한국 대표작품으로 참가하게 된 것도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만큼 당시에는 해외에 내세울 수 있는 한국적 연극이 마땅히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연극 <오구>를 영화로 한다고?

연극 <오구>가 대박이 터지고 장안의 화제가 되면서 영화계에서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어느 날 갑자기 유현목 감독님으로부터 만나자는 전갈이 왔다. 유현목 감독님은 거두절미하고 <오구>를 영화로 만들고 싶으니 시나리오 작업에 착수하라면서 작가료까지 구체적으로 언급하셨다. 나는 평소 하늘처럼 받들어 모시고 싶던 분이기에 거절도 못하고 엉거주춤 물러났는데, 이틀쯤 뒤 영화평론가 임영 선생께서 유현목 감독이 오랜만에 <오구>란 작품으로 영화를 찍는다는 글을 <조선일보>에 발표했다. 그러나 나는 한달 내내 시나리오를 써내느라 끙끙대다가 그만 중도포기하고 말았다. 연극과 영화는 그만큼 달랐던 것이다. 어떻게 연극 <오구>의 요절복통할 난장판을 영화적 문법으로 옮길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송구스럽게도 잠수했고, 지금까지도 유현목 감독님과 임영 선생님께 마음의 빚을 지고 있다. 어떻게든 엉터리가 아닌 작품으로 이 빚을 덜고 싶다. <오세암> <서울 에비타>로 나와 함께 작업했던 박철수 감독 또한 <오구> 영화화에 관심을 가졌었다. 그러나 박철수 감독의 의도는 연극 <오구>와 황지우의 시 <축제>를 종합해서 영화 시나리오를 다시 써야 한다는 것이었고, 나는 물론 고사했다. 그뒤 <축제>는 임권택 감독님 작품으로 개봉되었고, 박철수 감독은 또 별도로 <학생부군신위>를 발표했다. <학생부군신위>가 개봉된 뒤 박철수 감독이 찾아오셔서 영화를 찍으면서 작가 사전허락 없이 <오구>를 참조했다고 말씀하시기에 전혀 상관없다고 대답했다. 내가 보기에 <학생부군신위>와 <오구>는 영화문법상 전혀 다른 장르였기 때문이다. 박철수 감독은 어쩔 수 없는 리얼리스트이고, 나는 황당무계파였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리얼리즘영화가 싫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꼽으라면 스티븐 스필버그의 <미지와의 조우>, 타르코프스키의 <희생>, 쿠스투리차의 <집시의 시간> 그리고 주성치의 <희극지왕>이다. <미지와의 조우>는 내가 본 최초의 SF적 상상력이었고, <희생>은 영화가 한편의 철학서이자 모든 예술의 종합일 수 있음을 증거하는 지루한 명작이다. <집시의 시간>이 내 체질에 가장 맞는 영화이고, <희극지왕>은 너무나 쉽고 재미있고 순진한 부조리영화이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는 전혀 사실적이지 않다. 우주적이거나 철학적이거나 신비적이거나 황당무계하게 웃기는 부조리영화다. 왜 영화를 보러 가는가? 현실로부터 숨거나 도망가거나 거리를 두고 싶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만의 어둠 속으로 숨어든 그곳에서 또 골치 아픈 현실과 만나야 한단 말인가. 영화는 황당무계할수록 좋다. 그래서 <오구>는 감독이나 배우가 장난질을 칠 수 없으면 영화가 안 된다고 생각했다. 94년 작가 이창동씨가 영화감독 데뷔작을 고르면서 <오구>가 어떻겠느냐는 뜻을 전해왔을 때도 그런 대답을 한 적이 있다. <오구>는 웃기고 울리는 황당류 코미디다. 리얼리스트 작가 이창동에게는 맞지 않는 것 같다.

"대한민국 누구도 투자하지 않을 것"이라던 <오구>는 제작자 김청수와 연회단 거리패의 도움으로 촬영을 시작할 수 있었다.

왜 영화 찍으려 하세요 연극 잘하시는데…

평소에 “나는 언젠가 영화할 거야. 내가 쓴 시나리오로 영화를 찍을 거야” 하며 입버릇처럼 되뇌었던 말이 정작 실현되었을 때, 그 당사자의 심정은 어떠할까. 특히 나처럼 나이 오십을 넘긴 나이에, 그것도 이미 다른 판에서 한 가닥하면서 자리를 잡은 인간이 그 위험천만한 영화제작판에 뛰어들 수 있을 것인가. 그 점에 있어서 나는 의외로 담담하고 소년 같은 호기심으로 뛰어들었던 셈이다.

영화진흥공사 사전제작 지원금 심사를 받으러 심사장에 들어섰을 때, 나와 안면이 있는 심사위원은 한명도 없었다. 나는 조금 난처했고 낯설었다. 그래도 80년대 충무로판에서 제법 잘 나가던 시나리오 작가가 낯선 영화환경 속에 던져진 꼴이 된 것이다. 심사위원들도 낯설어했다. 심사위원장인 듯한 분이 내게 던진 첫 물음은 연극 이야기였다. “요즈음 연극 <어머니> 잘되지요?” “네, 관객이 그럭저럭 들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영화 찍으려 하세요. 연극 잘하시는데….”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렇구나. 나 혼자 영화를 갈망해왔지, 21세기 한국영화를 이끌어가는 영화인들에게 나는 이방인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울적해졌다. 그리고 일순 지난 시절 충무로판에서 만났던 영화인들이 내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이 작가, 요즈음 영화판은 드라마가 없어. 이 작가가 다시 글을 써야 돼” 하던 배우 이영하씨 매니저 방정식씨, “갓 태어난 내 아들에게 약속했어요, 이번에는 그냥 바보처럼 카메라 앞에 서서 폼만 잡지 않겠다고” 다짐하던 이영하씨, 다시 무일푼의 신세가 되어 내게 마지막 시나리오를 부탁했던 송영수 감독…. 그들은 어쩌면 지금의 영화풍토와 다른 별천지에서 만난 낭만파였는지도 모른다.

내가 꿈꾸는 영화

그렇게 영화를 열망하면서 왜 그렇게 늦었느냐고 묻는다면 할말이 없다. 몇편의 시나리오를 쓰면서 80년대의 충무로 바닥을 드나들었지만, 내가 꿈꾸는 영화와 한국의 영화현실과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내가 꿈꾸는 영화는 시여야 했고, 연극이어야 했다. 무용이어야 했고 음악이어야 했다. 그래서 한편의 영화는 오케스트라의 조직과 울림과도 같아야 했다. 그러나 주위의 영화를 아는 사람들은 영화는 시가 아니라고 했고 더욱이 연극은 아니라고 했다. 영화는 영화라는 것이고, 나같이 시를 쓰고 연극을 하는 사람이 영화를 꿈꾸다가는 큰코다칠 거라는 우려 섞인 경고를 받기도 했다.

그렇다면 과연 영화는 무엇인가? 나는 이 의문을 안고 영화작업에 착수했다.

이윤택/ <오구> 감독·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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