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기획] 세계와 만나는 방법: <와일드 투어>와 영화를 (다시) 만든다는 것
2025-03-13
글 : 김병규 (영화평론가)

<와일드 투어>는 야마구치 미디어 예술센터(YCAM)에서 주관하는 영화 제작 워크숍 프로그램을 통해 만들어진 영화다. 미야케 쇼는 워크숍의 구성원들을 모집했고, 소수의 참가자들과 영화를 만드는 기초적인 방법을 공유하며 단편영화 제작 실습을 진행했다. 이 임시적인 공동체는 고스란히 <와일드 투어>의 공모자들이 되었다. 미야케는 워크숍에 참여한 학생들을 배우로 삼고 YCAM의 아마추어 스태프들과 협업하며 야마구치 시에서 실제로 진행했던 DNA 도감 워크숍을 소재로 장편영화를 구상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1시간 남짓한 짧은 영화엔 워크숍이 진행되는 자율적인 과정과 식물을 채집하는 다큐멘터리의 흔적이 뒤얽혀 있다. 그 위로 워크숍에 참여한 두 명의 중학생 남자아이 타케와 슌, 그들의 조력자인 대학생 우메가 나누는 감정적 교환의 픽션이 생겨난다.

영화가 시작되면 일상의 평범한 모습을 관찰한 장면들이 나온다. 날아가는 새, 얼어붙은 땅, 강물 위의 오리 떼, 바닥에 떨어진 낙엽과 벽에 걸린 풀잎이 연달아 제시된다. 뒤이어 곧바로 스마트폰 카메라로 주변을 촬영하는 우메의 모습이 보인다. 그녀는 일상의 이미지를 포착한다. 영화의 시작점에 주어지는 것은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의 광경과 그것을 바라보고 촬영하는 행위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영화가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카메라는 DNA 도감 제작 워크숍 참여를 위해 사람들이 모인 현장으로 향한다. 담당자는 사람들에게 조력자들을 소개하고 워크숍의 목적과 규칙을 설명한다. 참여자들은 마을에 있는 식물과 미생물을 수집해 DNA를 조사하고 도감을 만들어야 한다. 대상을 관찰하고, 채집하고, 기록하고, 의미를 교정하는 것. <와일드 투어>는 바로 이 약속된 규칙을 매개로 카메라에 새겨지는 이미지를 다시 바라본다.

워크숍이 제공하는 규칙은 현장에 모인 참여자들, 그리고 그곳에 입회한 영화에게 두 가지 충동을 일으킨다. 하나는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발산하는 것이다. 미야케 쇼는 <와일드 투어>를 촬영하는 과정에 “일상에서 흥미로운 것들을 재발견하는 기쁨”이 있었다고 말한다. 워크숍의 일원들은 주어진 규칙 아래서 서로의 이름과 관심사를 확인하고 식물을 찾아다니는 기록을 스마트폰 영상으로 남긴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지켜본 풀잎과 워크숍 현장에서 관측한 식물은 서로 다른 위상으로 프레임에 적힌다. 무작위적으로 수집되는 일상의 이미지와 달리 워크숍의 규칙은 선별적 관찰자의 눈으로 주변을 바라보도록 유도하기 때문이다. 이 요구는 규칙을 수행한 이들의 현실에 깊은 자국을 남기는데, 대상을 낯설게 바라보는 관찰자의 시각은 세계를 어떤 식으로든 변형하기 때문이다. 타케와 슌은 촬영된 이미지의 매혹에 사로잡히면서, 여정에 동행한 우메에게 사랑에 빠지고 만다. 호기심에서 촉발된 여정은 그들에게 현실과 영상의 두 영역에서 이중의 열병을 겪게 한다.

다른 하나는 역설적이게도 규칙을 위반하는 충동이다. 워크숍은 거기 모인 일원들이 받아들이는 규칙을 형성한다. 그런데 그 임의적인 규칙은 일상에서 공유되는 규칙과 충돌하곤 한다. 타케와 슌과 우메가 식물을 채집하기 위해 관계자 외 출입이 금지된 구역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처럼, 일상 속의 워크숍은 기존의 규칙과 새로운 규칙이 대립하는 순간을 연출한다. 미야케 쇼의 인물들은 워크숍의 규칙을 빌미로 현실의 규범을 은밀하게 위반하고 회피한다. 그들은 관계에 속해 있으면서 자유로움을 추구하고, 한 가지 규칙을 따르면서 또 다른 규칙을 어긴다. 이것이 현실을 관측하는 영화와 영화 속에서 또 다른 원리와 질감의 현실을 창조하려는 워크숍이 맺는 중층적인 긴장이다.

이런 맥락에서 워크숍의 실천은 뜻밖의 효과를 가져온다. <와일드 투어>는 픽션과 다큐멘터리가 뒤얽히는 영화의 현대적 속성을 노출하면서 동시에 영화사의 복잡한 기억들을 환기한다. 그 기억은 SF, 서부극, 그리고 영화사 초기 기록필름의 단면에서 온다. 식물 채집을 위해 마을 곳곳으로 움직이는 인물들의 모습은 영화 역사에 누적된 세 가지 기억으로 흩어진다. 그들은 실제로 워크숍에 참여한 학생들이자 비전문 배우들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자연의 DNA를 조사하는 SF영화의 탐험가들이고, 출입금지 구역에 진입해 지리적 경계를 탐색하고 새로운 공동체의 규칙을 실천하는 서부극의 개척자들이며(미야케 쇼는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식물의 DNA를 채집하는 소재가 SF영화의 설정 같다는 점에서 흥미를 느꼈다고 말하는가 하면 제작에 참고하기 위해 학생들과 함께 본 작품으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용서받지 못한 자>를 언급하기도 한다), 더 나아가 초기영화의 민족지적 열망으로 낯설고 생경한 대상과 체험을 카메라에 기록하는 촬영자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그렇게 표면적으로 거리가 멀어 보이는 영화사의 기억들을 아마추어 워크숍의 환경 안으로 끌어들여 재생한다.

식물 채집 워크숍의 또 다른 조력자인 야마자키가 학생들을 데리고 숲속과 산맥을 탐사하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이 대목에서 소박하고 어색한 학생들의 연기와 과도하리만큼 웅장한 자연 풍경은 이질적으로 한 장면에 공존한다. 미야케 쇼는 마치 일상적 다큐멘터리의 진실성과 서부극의 신화적인 위엄을 하나의 현장 속에 나란히 배열하는 것처럼 보인다. 학생들은 산길을 걸으며 원주민을 따라 인류의 수수께끼를 찾겠다는 농담을 내뱉고, 도중에 포기하려는 친구를 설득해 서로 가방을 던지며 함께 올라간다. 지극히 웨스턴적인 말과 제스처를 거쳐 도착한 곳엔 사방이 트인 수평선과 암벽으로 채워진 위압적인 풍광이 있다. 아이들은 그곳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를 관찰하고 기록한다. 영화가 잃어버린 것은 나무를 흔드는 바람의 아름다움이라고 말한 D.W 그리피스의 주장을 돌아본다면, <와일드 투어>는 워크숍의 규칙으로 영화 이미지의 지워진 아름다움을 회복할 수 있는지 탐색하는 유희적 시도로 다가온다.

워크숍 현장과 결부된 영화가 이처럼 장르영화의 고전적 규범과 초기영화적인 열망을 환기하는 것은 언급한 세 종류의 픽션이 모두 공동체의 시작점을 설정하기 때문이다. 영화사 초기의 민족지적 기록필름, 고전기 서부극, 서부극의 전통을 이어받은 SF는 언제나 이질적인 공동체 집단의 충돌과 예측 불가능한 타자를 마주하고 받아들이는 문제를 다룬다. 그들은 세계의 낯선 얼굴과 만나고, 예기치 못한 만남은 공동체의 테두리에 교정된 질서를 요구한다. <와일드 투어>에서 워크숍 담당자는 식물을 채집하는 과정에서 어쩌면 새로운 종을 발견할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워크숍에 참여하는 것은 아직 만나지 못한 것들과 마주할 수 있다는 호기심, 그리고 그 만남이 실현되었을 때 직면하게 될 관계의 시작점을 가리킨다.

이와 같은 차원에서 워크숍이 동시대 영화의 주요한 실천적 현장으로 떠오른 것은 더욱 복잡한 문제를 포함하게 된다. 그 현장은 이중으로 열린 장소이기 때문이다. 워크숍은 고전영화의 서사처럼 명확한 규칙으로 인물의 행위를 강제하는 허구의 무대가 아니다. 그렇다고 서사의 도착지가 부재하거나 중간에 사라져버리는 모던시네마의 여정처럼 인물이 별다른 목적 없이 배회하는 장소도 아니다. 워크숍은 서사가 요구한 목적을 전적으로 따르는 것도 아니고, 예정된 목적지 없이 그저 배회하는 것도 아닌 비결정의 영화적 상태를 산출하는 기반이다. 워크숍 현장은 일시적으로 촉발되고 사라지는 시선과 몸짓과 화면을 영화에 도입한다. 워크숍에서 생겨나는 장면은 연출자가 조율하는 허구적 질서와 피사체 고유의 자율성을 간직하는 다큐멘터리적 질서 가운데 어디에도 정박하지 않는다. 혹은 고전영화의 견고한 미장센과 모던시네마의 불투명한 화면 가운데서 위계 없는 범용함으로 그것들의 외양을 혼란스럽게 뒤섞고 교란한다. 이것은 언제나 현재형인 시작점에서 출발하는 불확실한 모험이면서, 지나간 영화사의 흔적을 삽입하고 아직 도착하지 않은 미래의 결과를 향해 움직이는 영화 매체의 새로운 장난감이다. 서로 다른 시제로 향하는 충동은 진행 중인 워크숍의 표면에 무심코 뒤엉켜 있다.

미야케 쇼와 하마구치 류스케, 그리고 기욤 브락, 호나스 트루에바, 마티아스 피녜이로와 같은 연출자들은 영화 만들기에 관한 유사한 감각을 공유한다.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초반 태생인 그들은 워크숍 현장을 장난감처럼 활용하는 대표적인 감독들이며 그곳에서 다큐멘터리와 픽션의 윤곽을 흐트러트리고, 장면이 바뀔 때마다 출현하는 존재론적인 변형과 마모의 가능성에 영화를 노출시킨다. <와일드 투어>의 한 장면에서 우메는 선물 받은 광물을 현미경으로 관측한다. 그녀는 돌의 질감을 들여다보며 관찰되는 부분마다 다른 반응을 보인다. 반짝거리는 돌은 경이로우면서도 징그럽고. 타버린 떡처럼 보이는 단면과 코끼리를 닮은 단면이 같이 존재한다. <와일드 투어>에서 포착된 현실은 한 가지로 고정된 의미와 형상에 귀속되지 않는다. 이 영화를 본다는 것은 끊임없이 뒤바뀌는 시청각적 자극에 동참하는 일이다.

워크숍을 매개로 삼아 통일된 영화 문법을 거부하는 연출자들은 이따금 고전영화의 아름다움과 모던시네마의 유산과 장르영화의 흥분을 위계 없이 습득하고 흡수했다고 고백하곤 한다. 미야케 쇼를 예로 들면 그는 장 르누아르와 존 포드에 매혹된 시네필이면서 존 카사베츠의 영화와 작업방식에 깊은 친밀감을 느끼는 동시에 미국 장르영화의 상상력을 창작의 동력으로 삼는 연출자다. 앞서 말했듯 그는 식물을 조사하는 행위로부터 SF영화의 흔적을 발견하고 “새로운 SF영화를 만드는 것”이 <와일드 투어>의 출발점이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와일드 투어>는 나도 모르게 “고열과 같은 강력한 감정”(미야케 쇼)에 사로잡히는 카사베츠적인 정념에 충실한 영화이기도 하면서 그 감정을 웨스턴스러운 제스처와 풍경에 녹여낸 작업이기도 하다. 이 과정에서 워크숍은 영화의 수많은 기호와 속성을 한 가지 평면에 늘어놓고 탄력적인 경우의 수로 조합하는 재배치의 장소가 된다.

우메에게 마음을 고백하려 했지만, 그녀가 이미 미국으로 떠난 것을 확인한 슌은 우메에게서 문자로 받은 영상을 재생한다. 건네받은 영상엔 플랫폼에 들어오는 열차의 모습이 담겨 있다. 그 장면은 어설프지만 분명하게 뤼미에르의 구도를 흉내 내고 있다. 기차가 스마트폰 영상으로 재생되는 순간 <와일드 투어>가 자극하는 영화사의 또 다른 기억이 도래한다. 그것은 매체의 시작에 대한 기억이다. 영화는 열차의 도착을 매체의 신화적 기원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영화에서 도착과 끝은 언제나 시작되는 순간과 겹쳐 있다. 미야케 쇼는 한 편의 작은 영화가 끝나는 자리에서 과거의 거대한 시작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도록 설정한다. 그는 스마트폰 화면에 도착한 기차의 표상으로 영화사의 시작점을 다시 움직이게 한다.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결국 ‘둘’의 관계를 조직하는 행위다. 영화는 카메라에 채집된 현실의 이미지에 픽션의 의미를 더하고, 한 장면을 다른 장면과 붙이며, 과거에 촬영된 영상을 현재에 투사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작과 끝의 관계가 있다. 하나가 끝나면 다른 하나가 시작된다. <와일드 투어>의 세 인물도 둘이 되고 싶은 마음을 고백하지만 거절당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는 겨울이 봄으로, 세 남녀가 두 친구로, 거절의 경험이 우정의 기록으로 뒤바뀌는 또 다른 ‘둘’의 관계가 있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둘의 관계를 인식할 수 있는 것은 그것들이 워크숍이 시작하고 끝나는 시간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워크숍은 영화를 일으키는 물리적 기반이자 불투명한 통로이고 마침내 영화적 실천을 종결짓는 장소가 된다. 그렇게 워크숍은 영화의 근본적인 원리와 위상을 재확인하는 현장으로 스쳐 지나간다.

영화학자 토마스 샤츠가 주장한 대로 20세기 영화의 위대함이 “스튜디오 시스템의 천재성”에 있었다면, 그 역량이 소실되어버린 21세기 영화의 돌파구는 스튜디오 바깥의 스튜디오, 다시 말해 임시적인 규칙을 내세워 공동체를 조직하고 그로부터 이탈하는 위반까지도 포착할 수 있는 ‘워크숍 현장의 천재성’에서 모색해야 할지도 모른다. <와일드 투어>는 호기심 어린 눈빛과 금기를 넘어서는 몸짓으로 눈앞에 있던 세계를 다시 만난다. 이것은 영화를 (다시) 만든다는 것의 의미를 되돌려주는 아름다운 영화다. 마을 곳곳을 돌아다니며 서로의 모습을 촬영하던 세 사람의 영상이 서로 다른 모니터 화면에서 빛난다. 미야케 쇼는 영화에 여전히 친밀함과 놀라움이 간직되어 있다는 증거를 그 화면에 남겨둔다.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