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비 영화인들이 모인 어느 행사장에서 봉준호 감독은 감독으로서 느끼는 극한의 공포에 대해 설명한다. “공포의 근원은 집착이다. 집착이 있기 때문에 공포가 생기는 거다. (집착이) 해소되지 않을까봐. 다들 머릿속에 맴도는 어떤 장면이 있을 거다. 그걸 찍기 위한 핑계로 시나리오를 쓰기도 한다. 찍어서 그 화면을 소유하고 싶은 거지.” <미키 17>을 보면서 내내 떠올랐던 건 질문은 그가 이번에는 ‘어디에 집착하고 무엇을 소유하고 싶었을까’ 였다. 왜냐하면 주관적 판단에 <미키 17>은 봉준호의 전작들과 비교해서 지나치게 매끈하고 1차원적인 영화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거장의 신작이 으레 그렇듯이) <미키 17>은 ‘봉준호’ 세 글자에 축적된 위상 덕분에 과잉 해석되거나 과소평가받을 운명을 타고났다. 과소(혹은 부정적)평가를 모아보면 그의 전작들에 비해 대체로 ‘쉽고 친절하며 단순하다’는 의견으로 수렴된다. 이 단어들이 직관적으로 와닿지 않는다면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다. <미키 17>의 캐릭터는 기능적이고, 철학적 고찰은 편편하며, 설정상 개연성이나 인물의 행동 등이 납득되지 않는 부분이 많다. 한마디로 정보량은 풍성한데 깊게 파고들진 않는다.
이상하고 섬뜩해서 여전히 마음을 흔드는 것들
여기서 ‘1차원’이란 단어는 좀더 부연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텍스트가 단순하다는 게 아니다. 오히려 이 영화는 지난 봉준호 영화들의 총합이라 해도 좋을 만큼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역설적으로는 그게 문제다. 거대한 규모의 작품들이 거쳐야 하는 평탄화 작업의 흔적이 <미키 17>에도 보인다. (여전히 실체를 짐작하기 힘든) 대중의 평균에 영점을 맞춰야 하기에 설명이 많아졌고, 메시지도 반복적이며, 상징마저 직관적이다. 방대한 아이디어를 평면적으로 풀어낸 봉준호의 ‘순한 맛’이라 해도 좋겠다.
<미키 17>에선 특정 장면이 다양하게(혹은 모호하게) 해석될 여지가 거의 없다. 좀더 노골적으로 말해 이 영화에는 불균질한, 해석을 유보할 수밖에 없는, 그러니까 이상한 장면이 거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정반대편에 속하는 영화는 <마더>다. <마더>는 김혜자 배우의 의미를 짐작하기 어려운 춤사위(혹은 몸부림)에서 퍼져나가는 기괴함, 그 통제 바깥의 순간을 카메라(촬영이라는 행위)로 잡아챈다. 반면 <미키 17>의 정확하고 단선적인 연결은 거의 애니메이션에 가깝다. 불투명의 여지 없이 의도가 정확하게 투영된 직선의 언어. 이해도, 해석도, 설명도 가능하지만 좀처럼 흥분이 되진 않는다.
그렇다고 <미키 17>이 여느 SF 블록버스터처럼 단순한 오락으로 휘발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처음에는 ‘봉준호’라는 이름의 무게 때문에 씌워진 착시인가 싶었다. 몇 차례 되새김 끝에 영화의 에필로그에 해당하는 후일담에서, 소화되지 않은 두개의 장면을 발견했다. 첫 번째는 일파 마셜(토니 콜레트)이 등장하는 악몽 신이다. 영화의 말미 미키 18의 자폭으로 지도자 케네스 마셜(마크 러펄로)이 사망하자 개척단은 크리퍼들과의 공존을 선택한다. 개척단은 긴 토의와 투표에 따라 인간 프린팅 기술을 폐기하고, 미키 17을 유일한 인격체로 받아들이기로 결정한다. 영화에선 기계 폭파 기념식에 앉아 있는 미키 17이 일련의 과정을 플래시백과 내레이션으로 제시하는데, 이때 불쑥 미키 17의 악몽이 삽입된다. 독재자 케네스 마셜의 사망 후 자살했다고 구술되는 일파는 (기념식에 앉아서 악몽을 꾸는) 미키 17의 환영 속에서 자신의 남편을 복제한다.
이 장면은 이상하다. 이 장면이 없었더라도 이야기엔 아무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영화 전반의 톤과 맞지 않게 호러영화의 진득함을 보여주는 이질적이고 잉여로운 연결이다. 동시에, 아니 어쩌면 그렇기에 매혹적이다. 왜 이 장면을 이렇게 길게 공들여 삽입했을지, 몇 가지 시나리오를 그려볼 수 있다. 나는 봉준호 감독이 일파 역에 토니 콜레트를 캐스팅한 것이 오직 이 한 장면을 위해서라고 내심 짐작 중이다. 봉준호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는 이 장면을 찍어서 소유하고 싶었을 것이다. 배우 토니 콜레트가 다른 작품을 통해 쌓아올린 불길한 이미지는 거의 유일하게 이 장면에서 생기를 얻고, 급기야 스테레오타입처럼 보였던 캐릭터에 부피를(또는 광기를) 더한다.
장면 자체의 서사적 개연성이 없진 않다. <미키 17>은 설정과 서두에서 복제인간의 존재론을 화두로 던진 뒤 내내 다른 이야기(예컨대 계급과 자본주의에 대한 구조적 풍자)에 집중하다 마지막에 못다 한 변명처럼 다시 미키의 이야기로 돌아온다. 뒤늦게 복제된 육체와 분열된 자아에 대한 근원적 공포를 짧은 악몽을 통해서마나 제시하는 것이다. 방향과 흐름을 벗어난 불필요한 장면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겠다. 한 장면의 매혹이 작품 전체로 번지지 않는다는 점에선 잉여로운 실패에 가깝다. 이게 의도한 것인지, 덜 걸러진 얼룩인지도 정확히 알 순 없다. 다만 이 장면의 기이한 등장과 비효율적인 배치야말로 작가 봉준호의 복제되지 않는 감각, 수많은 레퍼런스 위에서도 훼손되지 않는 오리지널리티를 증명한다. 미키 17을 위한 변명은 곧 창작자 봉준호를 위한 (거의 유일한) 변명이기도 한 셈이다.
눈뜨라고 부르는 소리 있도다
후일담에서 발견한 또 하나의 이상한 장면은 개척단의 의사결정 방식이다. 외계 행성의 개척이라는 비상한 상황에서 독재자의 비이성적이고 차별적인 행위가 반복됨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민주적 절차를 준수한다. 이들은 케네스 마셜의 불법적인 행동을 녹화, 채증하여 위원회에 보고하거나 이후 익스펜더블의 처우 여부를 두고 긴 토론과 공청 과정을 거친다. 심지어 행성 개척과 생존이라는 엄혹한 상황에 놓인 이들이 무려 6개월 넘는 시간을 투자하면서까지 평행선을 달리는 논의를 포기하지 않고, 급기야 숨겨진 웅변의 재능을 발견한 미키의 연인 나샤(나오미 애키)가 새로운 리더로 발탁되기에 이른다. 생명을 존중하는 크리퍼들과 대비되며 폭력적으로 보였던 개척단이 민주주의 합의라는 체제의 선을 절대 넘지 않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하나의 과잉 해석을 해보겠다. 두 가지 이상한 장면을 연결하여 하나의 가설을 세워본다. 어쩌면 이 모든 이야기는 미키가 꾸는 악몽이 아닐까 하는 망상. <미키 17>은 진짜 인간의 선의를 믿고 인간적 가치를 포기하지 않는, 착하고 따뜻한 영화인가. <미키 17>의 최대 판타지는 SF적인 상상력이 아니라 이상적이고 이성적인 이들의 후일담이다. 케네스 마셜의 삐뚤어진 매력에 선동됐던 이들이 보여주는 대처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합리적이고 낙관적인 결말은 따뜻하다기보다 기괴해서 소름이 끼친다. 후일담의 판타지적 상상에 가까운 민주적 의사결정을 목격한 순간, 이 모든 게 봉준호의 ‘인셉션’이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미키 17이 마지막에 잠깐 꾼 악몽쪽이 도리어 말이 되는 ‘리얼’이고, 영화 전체가 미키들이 꾸는 달콤하고 행복한 꿈에 불과한 건 아닌가. 적어도 감각적으로 무게와 실체를 얻는 건(그리고 일관성이 있는 건) 경멸해 마지않던 ‘익스펜더블’로 케네스를 되살리려는 일파의 광기 어린 시도다. 영원히 도는 팽이를 목격한 사람처럼 이 착한 결말이 지금까지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악몽에서 눈을 뜨는 영화를 뒤집어보니, 달콤하고 착한 꿈에서 눈을 떠 (전세계 곳곳에서 민주주의가 무너져가는) 악몽 같은 현실로 돌아온 내가 있다. 어쩌면 <미키 17>이야말로 ‘봉준호’라는 고유의 상상력이 ‘산업으로서의 영화’라는 자본주의적 속성과 충돌한 끝에, 아슬아슬하게 탈선을 막은 채 당도한 종착지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