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왜 미키 17이 살고, 미키 18이 죽어야 하는가 - 혁명에 대해 말하지만 혁명적이지는 않은
2025-03-13
글 : 이용철 (영화평론가)
*<미키 17>의 결말에 대한 언급이 있는 글입니다.

봉준호 감독의 신작에는 파시스트를 표방한 인물이 반드시 등장할 것이다, 라고 생각했다. 그가 외국 자본과 결합한 작품을 만들 때면 등장하는 인물 유형인 까닭이다. 그게 미키(로버트 패틴슨)가 아님은 예고편만 봐도 알 수 있는 터, <설국열차>의 메이슨(틸다 스윈턴)과 <옥자>의 루시(틸다 스윈턴)를 잇는 인물은 케네스(마크 러펄로)와 일파(토니 콜레트)다. 그들 부부는 과장된 연기로 부산한 톤을 만들어내며 스윈턴이 선점했던 캐릭터를 양분해 자기화한다. 봉준호의 파시스트적 인물은 공포감을 안기는 대신 희화화되어 있다. <위대한 독재자>(1940)에서 채플린이 연기한 인물을 더 우스꽝스럽게 만든 식인데, 배우들도 덩달아 떠들썩한 인물을 만드는 데 전력하기를 즐긴다. 특히 입 주변의 변형을 통한 안면 근육의 뒤틀림은 그들의 추잡한 인상을 부풀린다.

썩은 지도자의 심장을 찔러 피를 흘리려는

그게 제일 두드러지는 건 그들이 대중 앞에서 입을 열 때다. 흉한 육체의 리허설 현장 같은 연설 장면은 내면에서 자라는 암적 존재의 악취마저 풍긴다. 독재자가 활개치는 봉준호의 영화는 자연스레 사회정치적인 주제를 전면에 드러낸다. 그는 거대 서사와 손잡은 이번 이야기에서 뭔가를 획책하는데, 케네스는 평범한 리더를 뛰어넘는 막강한 권력을 지닌 사령관이기 때문이다. 시스템 전체의 어긋남을 초래하기에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지날 동안 제거되어 마땅한 인물. 권력자를 제거하는 것은 반역에 해당하는 일이지만 성공할 경우 혁명이란 타이틀을 얻게 된다. 어떤 시간은 오게 되어 있다. 편협과 폭력을 밀어내고 평등과 자유를 치켜세우는 시간은 틀림없이 오기 마련이다. 매일 기도하고 노력하며 조금씩 그 시간을 준비하는 방법도 있지만, 일거에 세상을 뒤바꿔 새 아침을 밝히는 길도 있다. 그게 혁명이다. 지금껏 칼 꺼내기를 주저하던 봉준호의 사회 드라마가 이즈음에서 꺼내들 만한 주제–혁명, 얼마나 매력적인 단어인가. <미키 17>은 썩은 지도자의 심장을 찔러 피를 흘리려는 영화다.

미키는 실험에 쓰이며 반복해 죽임을 당한다. 사람들은 안쓰럽기라도 한 양 그에게 “죽는 건 어떤 기분인가요?”라고 슬그머니 묻곤 한다. 물론 궁금할 법하다. 나는 거꾸로 “다시 살아나는 느낌은 어떤가요?”라고 묻고 싶은데, 이상하게 아무도 그 질문을 하지는 않는다. 기실 미키의 존재 의미는 다시 깨어나는 데서 비롯된다. 그래서 나는 영화의 말미에서 그들이 과업으로 행하는 게 인간 재생 ‘프린터’의 폭파임을 보며 의아했다. 비인간적인 실험에 동원되는 비윤리적인 기계와 시스템을 파괴하는 건 이해 가능하지만, 영화가 모험 끝에 기어코 해내야겠다고 목표로 삼은 게 그것이라면 좀 심심한 것 아닌가 싶다. 작가를 일종의 신으로 판단할 때, 그가 하는 무책임한 행동은 인물을 함부로 죽이는 일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미키가 실험실에서 죽는다는 설정은, 여타 영화의 인물이 난데없이 트럭에 들이받혀 죽거나 <데드풀과 울버린>의 평행 우주에서 수많은 더블로 살다 죽임을 당하는 플롯과 비교해 딱히 불편한 작법으로 보이지 않는다. 더욱이 미키는 되살아남으로 인해 비로소 이야기의 주제를 완성한다.

봉준호는 원작의 제목을 바꿔 <미키 17>이란 제목을 붙였다. 죽음에 방점을 찍는다면 7이나 17이란 숫자는 별반 다를 게 없지만, 살아난다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면 왜 17과 18인지 의문을 품게 된다. 17은 횟수이고 17년의 의미로도 읽히며, 더 크게는 17세대로도 파악된다. 그러니까 1969년생인 봉준호가 87년의 6월항쟁에 도달할 만큼의 시간이기도 하고, 시몬 드 보부아르의 소설 <모든 인간은 죽는다>의 주인공이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올 정도의 시간일 수도 있다. 극 중 미키 18로 끝을 맺지만, 그는 불멸의 존재가 될 수도 있는 셈이다. 하지만 봉준호는 그가 영생 끝에 ‘초인’에 도달하는 계획을 세우지 않으며, <모든 인간은 죽는다>의 레몽처럼 생의 허무에 빠지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대신 자각이라는 내적 변화를 도모하는데, 그것이야말로 미키 17과 미키 18 사이에 놓인 혁명적 거리를 빚는다. 그러므로 미키는 지구상에서 죽어나가는 가련한 노동자의 이름이 아니라 혁명의 불꽃으로 재탄생한다.

지구를 떠나기 전 미키는 사실 노동자라기보다 마카롱 사업을 통해 유산계급이 되기를 꿈꾸었다 쪽박을 찬 인물이다. 그는 반복된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별다른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 그는 잘못 살았던 탓에 지금 벌을 받는다고 수긍한다. 같은 DNA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존재이기에 매번 동일하게 부활하던 미키‘들’은 미키 18에 이르러 다른 자아와 마주한다. 굴육적인 상황을 받아들이는 미키 17에게 미키 18은 “그런 꼴을 당하고도 가만히 있었냐? 나는 너와 다르다”고 말한다. 그는 놀랍게도 혁명적 존재로 화한다. 각성한 노동자를 넘어 시스템을 뒤엎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알아차리는 존재로 발전한다. 여기서 문제는 혁명의 순교자가 누구냐, 다르게 말하면 누가 살아남느냐, 다. 미키 17인가, 미키 18인가.

결론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는 이유

그 역할은 미키 18에게 돌아간다. 지구상의 미키와 다를 바 없는 수구적 존재인 미키 17이 살아남기를 택한 봉준호의 의도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미키 17도 각성하기를 바란 것일까. 내 생각은 다르다. 미래 사회에 더 어울리는 인물은 분명 미키 18이다. 그는 이전과 다른 존재로서 반즈라는 이름을 되찾을 자격이 충분하다. 마침내 반즈로 불린다는 것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존재의 인정을 뜻한다(반대로 행성의 원종족의 이름은 끝까지 불리지 않는다). 혁명의 불꽃에서 횃불로, 완수자로 나아갈 인물은 미키 18이지 미키 17이 아니다. 봉준호는 데뷔작부터 파국으로 치닫는 상황 직전에 매번 적당한 선에서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 경향이 있는데, 현실과 줄다리기하는 특유의 방식이려니 했다. 그렇지만 이번 영화의 주제를 생각하면 그 태도가 못내 불편하다. 아니라면 그가 (별로 어울리지 않는) 로맨스를 원했단 말인가.

<미키 17>은 화기애애한 기운이 흘러넘치며 막을 내린다. 원종족이 어느새 주변부로 밀려난 자리에서 식민주의를 다지는 경축식의 광경. 행성에 정착한 이들의 지구 귀환은 언감생심이다. 결국 <미키 17>은 스페이스만 있고 오디세이는 없는 이야기로 남는다. <플란다스의 개>부터 <옥자>에 이르는 영화의 주인공은 미완의 결말을 맞았을지라도 끝내 현실로 복귀한다. 현실은 그대로지만, 살아 되돌아온 현실이 어떻게 변해야 할지 생각하게 했다. 그걸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보는 게 봉준호 영화의 맛이었다. <미키 17>은 동질성을 지닌 사람끼리 따로 뭉쳐 사는 게 편하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곳에는 다른 생각을 가진 자와 공간을 공유하겠다는 의지가 없다. ‘마더 어스’의 존재를 외면해봤자 지구상의 본질은 그대로인걸. 그들은 달 뒷면의 어두운 곳에 그들만의 유토피아를 세운 공동체에 다름 아니다. <미키 17>은 미키 17과 친구들은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라고 순진하게 꾸미는 동화처럼 들린다. 혁명에 대해 말하고 있으나 혁명적인 작품은 아닌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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