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 배경의 SF에서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시대를 어디로 잡느냐다. 이건 교향곡 첫 악장의 조를 선택하는 것과 같다. 이야기 속 사람들이 어느 구역에서 어떻게 움직일 수 있는지를 정하는 것이다. 에드워드 애슈턴의 <미키 7>은 인류가 지구를 벗어나 여러 행성에 정착한 먼 미래 를 배경으로 삼는다. 하지만 이 소설을 각색해 영화 <미키 17>을 만들면서 봉준호는 시대 배경을 21세기 중엽으로 잡는다.
지금 여기와 모든 면에서 가까운

논리적으로 생각한다면 이치에 맞는 건 원작이다. 지금 당장 초광속 비행과 인공중력의 생성이 가능한 우주선을 만들 수 있는 이론이 만들어진다고 해도 2050년대까지 수백명의 사람들을 싣고 다른 항성계로 갈 수 있는 우주선을 만드는 건 그냥 불가능하지 않을까. 인류가 미래에 우주식민지를 건설한 2019년이 배경인 <블레이드 러너> 같은 선례가 있지 않으냐고. 그게 좀 그렇다. SF의 장르 관습에는 수명이 있다. 예를 들어 레이 브래드베리가 운하가 있는 화성을 배경으로 고전이 된 소설을 썼다고 해서 지금도 그럴 수 있는 건 아니다. 아니, 없는 건 아닌데, 그래도 여분의 설명이 들어가야 한다. <미키 17>에는 그 설명이 없다. 그래서 나 같은 사람들은 자꾸 여기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영화는 과학적 논리보다 영화 속 미래를 최대한 우리의 시대에 가까이 두는 것을 더 중요시한 것처럼 보인다. SF가 그리는 미래는 대부분 현재와 과거의 반영이다. 예를 들어 서구권의 스페이스오페라 상당수는 먼 미래를 무대로 하고 있어도 수상쩍을 정도로 나폴레옹 전쟁이나 제2차 세계대전과 비슷하다. <미키 17>의 세계는 그런 스페이스오페라들보다 훨씬 지금의 우리 세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실제로 우린 일대일로 연결되는 지점들을 찾을 수 있다. 종종 그 지점은 하나 이상으로 늘어난다. 예를 들어 미국 관객들은 이 영화의 악당 케네스 마셜에게서 트럼프를 볼 것이다. 하지만 한국 관객들에겐 더 그럴싸하게 보이는 인물들이 있다. 봉준호의 의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현실이 소설을 모방하는 일은 생각보다 자주 일어난다. 물론 이 영화에서 진짜로 중요한 것은 실제 인물과의 연결성이 아니다. 영화 속 주인공 미키의 끔찍한 노동환경이 극단으로 내몰리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의 노동자들의 환경과 연결된다는 것. 그렇다면 장르적 논리를 무시하고 최대한 우리 시대에 가까운 시기로 옮겨간 건 이해가 되는데, 그래도 더 좋은 방법이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냥 시대를 밝히지 않는 것이다. 안드레이 타르콥스키의 <솔라리스>가 그랬듯.
프롤로그가 끝나고 40분까지는 ‘설정 설명’이다. 미키가 있는 니플하임이 어떤 곳이고, 어쩌다가 다들 거기로 갔고, 미키 7 아니, 미키 17이 어쩌다가 계속 죽었다가 부활하는 직업을 갖게 되었는지는 관객들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특히 회상을 통해 전개되는 설정집은 까다로운데, 일단 현재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아무리 빠른 페이스로 이야기를 끌고 간다고 해도 이야기가 정지된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 부분을 굳이 길게 끌 필요는 없다고 느꼈다. 지구 장면, 심지어 일인칭 내레이션을 전혀 넣지 않아도 이 상황을 설명하는 방법이 여럿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미키의 내레이션은 꽤 재미있고 지구 장면에도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무엇보다 나는 편집자로부터 늘 설명이 부족하다는 말을 듣는 사람이니 이렇게 그냥 설정집 덩어리를 툭 던져주는 봉준호가 옳고 내가 틀렸을 수도 있다.
<미키 7>과 <미키 17>은 모두 식민 행성의 개척 이야기다. 대부분 이런 이야기는 과거 서구인의 이민과 식민지 경험에 바탕을 두는 경우가 많다. 그들이 우주전쟁 이야기를 하면서 계속 나폴레옹 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 이야기를 끌어오는 것처럼. 일론 머스크의 화성 이주 이야기가 공허하게 들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인류가 생존을 위해 다행성 거주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에는 어느 정도 동의하는데, 이 비전이 옛날 SF 소설이나 영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면 뭔가 잘못되었다는 경고등이 울려야 한다. 현실 세계의 행성 이주가 아일랜드인들의 미국 이주와 같은 방식으로 전개될 가능성은 제로이기 때문이다. 만약 정말로 <미키 17>에 나오는 것처럼 초광속 우주선을 통한 이주가 가능하다고 해도 대부분 지구 사람들은 남아서 지구를 고쳐 쓸 수밖에 없다. 물론 지구가 아무리 끔찍한 곳으로 변한다고 해도 지구를 고쳐 쓰는 게 다른 행성을 테라포밍(지구화)하는 것보다 몇억배는 쉽다. 하지만 <미키 17>은 굳이 이걸 우리에게 설득할 필요는 없다. 머스크의 몽상과는 달리 이 세계는 순수한 장르적 환상으로 존재한다. 우리는 관습을 받아들인다.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미키 17은 익스펜더블이다. 주기적으로 저장된 기억을 프린트된 몸에 주입해서 죽어도 계속 살아나는 사람이다. 익스펜더블은 니플하임에서 단 한명이고 늘 편견에 시달린다. 특히 멀티플, 즉 같은 기억과 몸을 가진 두명 이상의 사람이 만들어진다면 그들은 제거되어야 한다. 보고 있으면 왜 우주 개척 시대에 이 기술을 적극적으로 쓰지 않는지 궁금해진다. 인체 프린터와 메모리 블록, 승무원 몇명만을 우주선에 태우는 게 몇 백명의 성인들을 태우는 것보다 훨씬 효율적이지 않을까. 철학적 고민? 많이들 테세우스의 배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그건 그냥 관념적인 사고실험이고 그런 기술이 현재화되면 사람들은 거기에 신경을 쓰지 않을 것이다. 여러분은 이전 폰의 데이터를 물려받은 스마트폰을 갖고 테세우스의 배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토론보다 미키가 사람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고 존재한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물론 프린터는 훨씬 유용한 용도, 그러니까 더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데에도 쓰일 수 있을 것이다. 굳이 대체육을 만드는 대신 그냥 고기와 같은 식품 재료를 프린트할 수 있는 것이다. 식량용 고기는 살아 숨쉬는 인간보다 훨씬 만들기 쉬울 것이다. 니플하임에 도착한 뒤에는 더 편해진다. 크리퍼와 같은 토착동물들을 먹여살릴 수 는 곳이니 굳이 사냥이나 농업을 하지 않아도 원재료를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 저 사람들은 훨씬 풍족하게 살아야 한다.
영화와 원작 소설은 익스펜더블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이 기술을 부당하게 이용한 연쇄 살인마의 기록과 종교적 편견을 이용한다. 이런 극단적인 상황에서 이 모든 것은 사치처럼 보인다. 하지만 종교는 원래 사람들에게 이상하고 끔찍한 행동과 선택을 하게 하고 우린 그것을 현재진행형의 경험을 통해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특히 <미키 17>은 교회의 권력과 영향력을 원작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묘사하고 있고 그 때문에 우린 그냥 그 설정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미키 17>이 그리는 세계의 비논리성과 이상함은, 우리의 경험에 따르면 그냥 당연한 현실이다. 허구의 미래 사람들과는 달리 현실 세계의 미래 사람들은 제발 이 상황에서 벗어나길 바라지만 과연 우리의 역사는 그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