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동일한 상황의 미묘한 변주,<사랑의 시간>
2003-11-25
글 : 홍성남 (평론가)
■ Story

택시 운전사를 남편으로 둔 아름다운 여인 고잘은 구두닦이 청년과 사랑에 빠진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분노한 남편은 아내의 애인을 살해하고 만다. 그리고는 법원으로부터 사형 선고를 받는다. 검은 머리 남자가 고잘의 남편이고 금발 남자가 그녀의 애인인 이 첫 번째 에피소드가 끝나면 비슷한 상황을 달리 들려주는 두 번째 에피소드가 이어진다. 단 이번에는 금발 남자가 고잘의 남편이고 검은 머리 남자는 반대로 그녀의 애인이 되어 있다. 세 번째 에피소드에 이르면 고잘과 검은 머리 남자, 금발 남자 사이의 관계는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의 위치로 돌아온다.

■ Review

진리란 대체 어떤 모양의 것인가, 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모흐센 마흐말바프는 꽤 명쾌한 비유를 가지고 주저함 없이 답을 해줄 것 같다. 신의 손 안에 있다가 땅에 떨어져 산산이 부서져버린 거울 같은 게 바로 진리라고 말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그 조각난 거울의 한 조각씩은 가지고 있어서 그것에 비친 상을 보면서 진리를 보아왔다. 이런 식으로 생각해봤을 때 사람들이 자기들 내면에 간직하고 있는 진실이란 파편 같은 것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건 절대적인 진리가 아닌 특수한 진리일 뿐이며 유일한 진리가 아니라 복수로 존재하는 진리일 뿐인 것이다. 진리라는 것에 대한 마흐말바프의 이런 시각은 영화제작의 방법론에도 고스란히 이어졌다. 그의 어떤 영화들이 복수의 관점을 채택하거나 혹은 복수의 층을 한데 가지고 와서 구축되곤 했던 것은 그럼으로써 진리의 중심은 존재하지 않음을 효과적으로 보여주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마흐말바프의 90년작인 <사랑의 시간>은 그 대표적인 실례의 하나로 기억될 영화다(같이 이야기될 수 있는 그의 다른 영화들로는 <옛날 옛적에, 영화는>(1991), <배우>(1992), <순수의 순간>(1995) 등이 있다).

<사랑의 시간>은 세개의 에피소드를 나열하며 전개가 이뤄지는 영화인데, 그 세개의 에피소드는 각각 동일한 상황의 미묘한 변주이다. ‘변주’가 있으려면 당연히 그 이전의 기본적인 상황이 있어야 한다. 세 에피소드를 관통하는 그 기본 상황이란 이렇게 정리가 된다. 아름다운 여인 고잘은 택시 운전사와 결혼한 상태이다. 그녀의 남편은 그녀를 마음 깊이 사랑하고 있지만 그녀에게 남편은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고잘은 남편 몰래 다른 남자와 열정의 관계를 맺으며 자신의 사랑을 추구하려 든다. 이 금지된 관계는 결국 남편에게 폭로가 되고 사랑의 삼각형을 이루는 세 남녀는 충돌을 맞이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마흐말바프는 이런 동일한 상황에서 시작되는 사랑과 열정의 이야기에 세 가지의 상이한 무늬를 그려 넣는다. 상황의 변주는 고잘의 남편이 검은 머리 남자인가 아니면 금발 남자인가 하는 작은 차이에서부터 시작해 이것이 비극이긴 하되 어떤 유의 비극으로 마감하는가 하는 차이로까지 이어진다. 그렇게 영화는 사랑과 열정의 추이에 대한 일종의 입체화를 그려간다. 어떤 면에서 <사랑의 시간>은, 좀더 알기 쉬운 영화를 예로 들어 비유하자면, 마흐말바프가 만든 <롤라 런>, 혹은 마흐말바프가 만든 <레트로액티브>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마흐말바프의 영화는 각 버전 별 차이가 좀더 미세하고 그 분위기도 들떠 있지 않은 탓에 앞서 지적한 영화들에서 드러나곤 하는 게임의 성격이 거의 없다고 할 수 있겠다. 이건 게임을 하기 위해 버전을 바꿔가는 게 아니라 차분한 바라봄을 유도하기 위해 반복과 차이를 이용하는 영화인 것이다.

이런 식의 변주 이야기를 풀어가는 데 있어서 화자의 화술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인데, <사랑의 시간>은 이야기꾼 마흐말바프의 화술이 상당한 수준에 있음을 보여주는 영화 가운데 하나다. 우선 이야기꾼으로서 그의 특출한 재능은 상투적일 수도 있는 에피소드들을 간결하지만 동시에 미묘하기도 한 이야기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증명이 된다. <사랑의 시간>의 에피소드들에는 열정의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또한 그걸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언급이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슬픔이 있는가 하면 유머도 있고 관조의 태도도 또 함께 있다. 마흐말바프는 이 이야기들을 ‘구성’해낼 줄도 안다. 앞에서 무심코 한 말을 고쳐보자면 <사랑의 시간>은 에피소드들이 그저 나열되어 있는 영화가 아니라 그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시선을 떼지 말도록 내적인 흐름을 타고 진행되는 영화다. 이 영화 속의 서로 미묘하게 차이가 나는 세개의 에피소드들은 마치 정-반-합의 변증법적인 모양새의 도로를 따라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우리는 세개의 사랑의 빛깔을 비교해보면서도 무리없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분명 <사랑의 시간>이 이뤄낸 영화적 성취는 감독/이야기꾼 마흐말바프의 구성의 의지를 통한 것이지만 마흐말바프는 자신의 영화를 어느 정도 비워놓을 줄도 안다. 여기에는 사랑이란 과연 무엇이고 열정의 문제를- 당시의 이란영화로는 받아들일 수 없었던 외도라는 금기의 소재를 가지고 과감하게 다뤄진-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이며 각 에피소드들이 보여주는 차이로부터 무엇을 읽을 것인가, 하는 문제들이 포함되어 있지만 영화는 우리로 하여금 우선 이것들에 대한 바라봄의 시간을 가지라며 텍스트를 꽉 채워놓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 사실 영화를 보는 우리는 70분의 길지 않은 러닝타임 동안 오히려 충만함의 영화적 경험을 할 수 있게 된다.

:: 마흐말바프가 이야기하는 상대주의

“진리란 다면적인 어떤 것”

언젠가 모흐센 마흐말바프는 대략 <칸다하르>(2001) 이전까지의 영화들로 이뤄진 자신의 필모그래피는 모두 네개의 시기로 구획되어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데뷔작 <나수의 회개>(1982)부터 <보이콧>(1985)에 이르는, 종교적 진실을 추구하면서 영화적 실수로 넘쳐나는 영화들이 1기에 속한다면, 영화적 발전을 보여주면서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을 담은 영화들(<사이클리스트>(1987) 등)이 2기에 속하고, 복합적인 시각을 통해 삶의 조건들을 분석하는 영화들, 삶과 휴머니티에 좀더 이끌린 영화들(<가베>(1995) 등)이 각각 3기와 4기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사랑의 시간>은 이 가운데 3기에 속하는 영화인데 이 시기 영화들의 주요한 특징은 “진리의 중심이란 없음”을 보여주는 것, 다시 말해 “진리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라고 마흐말바프는 이야기한다. 상대주의라고 명명할 수 있는 이런 태도는 사실 마흐말바프가 대단히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기에 그것에 대한 그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은 그와 그의 영화세계, 그리고 그의 비전 등을 이해하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란의 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절대적인 진리들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는다. 그게 이란에서 민주주의가 실패할 수 없는 이유이다. 민주주의란, 정치적인 문제이기에 앞서, 문화적인 문제이다. 우리 모두는 우리야말로 진리의 유일한 담지자라고 생각하고는 모두가 우리 자신의 견해에 복종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는 진리가 여러 사람들 사이에 퍼져 있는 다면적인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그러나 진리는 하나의 장소에서 발견되는 게 아니다. 이런 근본주의 때문에 우리는 현실을 제대로 지각하지 못하고 파시즘의 길로 향하게 된다.”(하미드 다바시의 이란영화 비평서 <클로즈업>에서 발췌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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