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효자동 이발사> 촬영현장 [1]
2003-11-28
글 : 백은하 ( <매거진t> 편집장)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임찬상 감독의 <효자동 이발사> 촬영현장

기술본위, 친절본위! 청와대 옆 이발관으로 오세요

스페인 세빌랴 거리를 활보하던 입심 좋은 피가로가 아니다. 굵은 시가를 입에 문 채 무심하게 머리를 자르던 ‘거기 없던 그 남자’도 아니다. 헝클어진 곱슬머리에 호기심 가득한 눈, 그는 바로 대한민국 효자동의 우직한 이발사 성한모다. 그러나 만두가게 왕씨가 아니라 청와대 대통령의 가르마를 2:8로 나누게 되면서 반듯하게 살아오던 이 남자의 인생 역시 반대편으로 쏠리게 되었다.

<살인의 추억>을 끝낸 송강호와 <바람난 가족>의 문소리가 주연하고, 배급사로 알려졌던 청어람이 첫 번째로 제작에 뛰어든 <효자동 이발사>는 억눌린 시대의 공기와 한 가족의 비극을 건강한 코미디 속에 녹여낸 깔끔한 한편의 우화다.

지난 11월16일, <씨네21> 앞으로는 시골의 한 이발관으로부터 ‘이발 우대권’이 날아왔다. 차를 타고 3시간 뒤, 작은 화분이 놓인 소박한 이발관 문을 빠끔히 열었을 때, “의사하고 한 끗발밖에 차이 안 나는“ 흰가운을 입은 송강호가 쌍가위를 치켜든 채 “어…어… 어서 옵쇼!”를 외쳤다.

전북 부안의 공장지대

올해 들어 유난히 추웠다는 그날, 전북 부안의 한 공장지대에 지어진 <효자동 이발사>의 오픈세트 안은 유난히 따뜻했다. 마치 혹독하고 추웠던 60, 70년대, 아버지와 아들이 살던 낡은 이발관 안만은 따뜻한 햇살이 스며들었듯이. 지난 9월에 크랭크인한 <효자동 이발사>는 순제작비 34억5천만원 중 12억원을 이 효자동 거리세트에 쏟아부었다. 5천평의 부지에는 “기술본위, 친절본위, 孝子리발관. 主 성한모”라는 당당한 간판 아래 서 있는 ‘리발소’를 시작으로 60m가 넘는 개천을 따라 20동의 가게와 집들이 옹기종기 들어서 있다. 어설픈 가족사진이 진열된 ‘종로사장’ 옆 신발가게 천장엔 고무신이 달랑거리고, 불량기 가득한 오렌지색 냉차 리어카 뒤로는 넝마주이의 커다란 나무바구니가 따른다.

일성 기름집 옆 효자쌀집 앞에는 ‘미국, 영국, 독일, 일본, 프랑스’라고 쓰여진 나무 말을 타려는 아이들이 승강이를 벌이고, “쥐는 살찌고, 사람은 굶는다“ 같은 낡은 계몽포스터 위로는 <감격시대>가 아코디언 연주로 흐른다. 그러나 이런 구체적인 기억의 리마인더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해도 <효자동 이발사>는 아련한 그 시절의 향수에 기대는 영화는 아니다.

3·15 부정선거가 일어난 60년부터 조용필의 <단발머리>가 유행하던 1980년까지 20년간의 한국 근대사를 아우르는 <효자동 이발사>는 4·19 데모대의 대열 속에서 아들을 낳고, ‘중고생 삭발령’ 때문에 돈을 벌고, ‘라이방’ 선글라스를 즐겨쓰던 대통령의 머리를 깎게 된 한 이발사의 비극이라면 비극이라고 할 수 있는 가족사를 담고 있다. 그렇게 <포레스트 검프>가 미국사의 순간순간을 함께하며 한 남자의 위대한 러브 스토리를 구축했듯, <효자동 이발사>는 격동의 한국 근대사의 씨줄 위에 한 가정의 역사를 날줄로 얹어 직조한다.

B도로, 어설픈 수다와 삼삼한 로맨스


인왕산 기슭 동쪽으로는 경복궁, 서쪽은 옥인동, 남쪽은 창성동, 북쪽은 궁정동과 접해 있는 효자동. 이 효자동을 그대로 복원한 오픈세트는 크게 광화문 4거리에서 청와대로 향하는 A도로와 효자동을 관통하는 B도로로 이루어져 있다. 아스팔트를 깔아 만든 길이 130m, 넓이 12m에 달하는 4차선 A도로는 3·15 부정선거, 4·19 혁명, 5·16 군사 구테타 등 격동의 한국사가 검붉은 피로 새겨진다. 그러나 바로 옆 B도로의 온도는 다르다. 소시민들의 일상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이 도로에는 어설픈 수다와 삼삼한 로맨스가 동력인 따뜻한 거리다.

“다방문화 이전에 서민들의 만남의 장소”였던 만두집은 성한모(송강호)가 면도사로 일하던 순진한 민자(문소리)와 데이트를 나누었던 공간이자, 임신한 민자에게 “사사오입! 즉, 뱃속의 애가 다섯달을 넘으면 낳아야지!“ 하며 말도 안 되는 장광설을 늘어놓던 공간이기도 하다. 사주집 옆의 송학작명소는 한모의 아들에게 “가난하지만 오래 산다”는 낙안(樂安)이란 이름을 지어준 곳이다. 그러나 “멸공, 반공” 같은 표어가 걸려 있던 동사무서의 대문이 “근면, 자조 ,협동”으로 바뀌어가면서 이 B도로에도 서서히 어둠이 깔린다. ‘대통령 각하’에 충성하고 세상에 감사하며 살아가던 한모의 아들이 어처구니없는 국가음모에 휘말려 고문을 받고 몸이 망가지자 평범한 아버지는 분노한다. 그러나 세상에 맞서기엔 그의 존재는 한없이 작기만 하다.

한모는 아들이 “낙안이 아버지는 깍쇠”라는 놀림을 받고 의기소침해하자, “의사하고 이발사는 한 끗발 차이”라고 말한다. 결국 그날 낙안이의 꿈속엔 의사와 간호사 복장을 한 부모들이 나와 수술을 집도하듯 면도를 한다. 그러나 너무 진지한 문소리의 연기에 송강호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NG를 내고 말았다.

<효자동 이발사>는 탄탄한 연극계 출신의 조연들 덕에 무게중심을 잡는다. 쌀가게 최씨로 등장하는 ‘연극계의 큰형님’ 윤주상(송강호의 오른쪽)과 장진 감독의 영화로 낯익은 만두가게 왕씨 역의 정규수(송강호의 왼쪽).

연극계 큰형님 납시오

송강호, 문소리라는 든든한 주연으로만 알려져 있지만 사실 <효자동 이발사>는 연극계에서 주로 활동하던 탄탄한 조연들 덕에 탄력이 붙는 영화다. 정권 친화적인 인물로 등장하는 쌀가게 최씨는 ‘연극계의 큰형님’ 윤주상이, “왕만두, 고로께, 음료 일절”을 내세우는 만두가게 왕씨는 장진 감독의 영화로 낯익은 정규수가, 경호실장 장혁수로는 <파이란>에서 최민식을 괴롭히던 보스 용식으로 등장했던 손병호가 등장한다.

이외에도 <올드보이>에서 사립감금소 소장으로 등장해 능글맞은 연기를 보여준 오달수가 한모의 아킬레스건을 쥐고 있는 연탄가게 안씨로 등장해 극을 아슬아슬하게 만들고, <달마야 놀자>의 침묵스님 류승수는 “월남 가서 베트공하고 싸울 때 총알 날아오면 트위스트로 피할 거라”던 ‘까불이’이발보조 진기로 등장해 재미를 더한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주목해야 할 인물은 바로 한모의 아들인 ‘사사오입 낙안’이다. <선생 김봉두>에서 눈물샘을 쏟아내게 만든 소석이로, <살인의 추억> 초반에 송강호가 하는 말과 행동을 따라하며 약올리던 동네 꼬마로 등장했던 이재응은 어른배우들이 “천재”라고 혀를 내두를 정도다. 내년이면 중학교 1학년이 될 ‘장성한 총각’이지만 여전히 아이 같은 모습을 간직한 이 소년은 “아버지(송강호)나, 어머니(문소리)가 연기를 너무 잘하셔서, 앞으로 부족한 걸 옆에서 잘 배워나가겠다”는 의젓한 인사를 잊지 않는다.

차분한 모범생 같은 감독 때문인지, 유난히 조용한 촬영현장. 가끔 터지는 딱다구리 같은 송강호의 웃음소리만이 정적을 가를 뿐이다. 현재 40% 이상 촬영을 마친 <효자동 이발사>는 한달 뒤인 12월 말 크랭크업할 예정이다. 작은 창문을 통해 들어선 손님은 이제 겨우 면도만 마쳤을 뿐이다. 머리모양이 어떨지는 꽃피는 봄이 되어야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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