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왜 할리우드는 일본 문화에 열광하는가? [2]
2003-12-05
글 : 김봉석 (영화평론가)
<라스트 사무라이>

에드워드 즈윅은 중세에서 근대로 들어가는 전환기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다. <영광의 깃발>과 <가을의 전설> 등 전작들도 근대의 인물과 사건에 얽힌 것들이다. 과거를 부정하고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이 전세계에 공통적인 현상이었다고 하지만, 동양에서는 더욱 더 드라마틱했다. 서양 문명은 동양의 내부에서 발현된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침입’해온 것이었다. 서양 문명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들이 수백, 수천년 동안 지켜온 전통적인 가치를 버려야 함을 의미했다. 사이고 다카모리에게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라스트 사무라이>의 카츠모토는 그런 현실을 인정할 수 없다. 사무라이의 전통적인 가치인 충성과 용기, 희생과 인내 등은 결코 버릴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칼과 총의 차이가 아니다. 익숙하게 총을 사용했던 알그렌 역시, 기존의 숭고한 가치를 몽땅 지워버리는 끔찍한 시대의 변화를 겪고 일본으로 오게 되었다. 그들의 가치가 숭고하고 존중받을 것이란 사실은 분명하지만, 결국 그들은 패배한다. 정신적으로 승리했지만, 물리적으로는 시대의 낙오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라스트 사무라이>를 만든 에드워드 즈윅과 톰 크루즈는 ‘사무라이 스피리트’에 매료되었다고 서슴없이 말한다. 톰 크루즈는 날마다 <무사도>를 읽으며 사무라이의 ‘도’를 되새겼고, 사무라이의 원래 의미가 ‘to serve’라는 것을 알고 놀랐다고 말한다. 사무라이는 강함을 추구하고 적과의 대결에서 승리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카츠모토가 그렇듯이 그들을 섬기는 마을 주민들을 지키고 희생하는 사람들이다. 물론 역사상의 사무라이가 늘 그렇게 약한 자들을 위하여 헌신했던 것은 아니다. 어디에나 양면이 있듯이 힘을 가진 사무라이는 성인도 악인도 될 수 있었다. <라스트 사무라이>가 그려낸 사무라이는 가장 긍정적인 의미의 사무라이, 일본 문화이다. 하지만 힘을 숭상하는 일본이 극단적으로 악해졌을 때 군국주의가 되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라스트 사무라이>는 일본 문화의 한 단면을 지극히 우호적으로 그려낸 할리우드영화인 것이다.

일본을 무대로 펼쳐진 <라스트 사무라이>는 톰 크루즈와 와타나베 겐, 사나다 히로유키, 고유키 등 일본 배우들의 앙상블이 탁월하다. 서구 문물을 배격하지만 적을 알기 위하여 영어를 배우고, 알그렌에게 무사도를 가르치는 카츠모토 역의 와타나베 겐. 형제를 죽인 알그렌을 증오하지만 결국 동료로 인정하게 되는 우지오 역의 사나다 히로유키. 그리고 사무라이의 아내로서, 희생과 인내를 일상 속에서 실천하는 타카 역의 고유키. 세명의 일본 배우들이 펼치는 힘찬 연기와 비극적인 상황들은 알그렌만이 아니라 관객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그들은 패배할 줄 알면서도 싸움을 거부하지 않는 영웅들이다. 알그렌이 그랬듯이, <라스트 사무라이>는 세계 어디에서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일본’을 보여준다.

일본 애니, 열광의 시작점

<우주전함 야마토>

<라스트 사무라이>를 보면서, 내내 들었던 생각 하나는 이것이었다. 그들은 왜 일본에, 일본 문화에 매혹된 것일까. 워쇼스키 형제가 가장 존경하는 감독은 <공각기동대>의 오시이 마모루이고, 타란티노의 <킬 빌>에서는 클라이맥스에서 일본 노래가 흘러나온다. 타란티노는 <저수지의 개들>에서 최후의 순간에 나왔던 팀 로스의 고백을 서구 관객이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할리우드영화에서도 똑같이 의리나 우정 같은 것들이 나오지만, 동양영화에서 흔히 드러나는 적에 대한 존중과 경의, 그리고 희생 같은 것들이 서구 문화 속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타란티노가 매혹된 것은 그런 동양적인 가치들이었다. 머리 위쪽을 잘린 오렌이 ‘핫토리 한조의 검이 맞구나’라고 내뱉는 것은 유머나 조롱이 아니다. 죽음을 신성한 것으로 여기는 동양의 무사들에게, 명검으로 목숨을 앗기는 것은 일종의 명예라 할 수 있다. 오렌의 그 고백은, 브라이드와 한조에 대한 진정한 경의의 표현이었다.

인상파가 우키요에(浮世畵)에서 영향을 받은 이래 일본 문화는 미술, 패션, 음식, 영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왔다. 90년대 이후 서구의 일본 문화 애호가들은 특히 대중문화에 관심을 기울인다. 스스로를 ‘오타쿠’라고 자랑스럽게 부르는 이들은, 일본의 만화와 영화 등에 중독된 자들이다. 이들이 결코 소수가 아니라는 것은 일본 애니메이션의 미국 진출에서도 증명된다. 2002년 일본 애니메이션이 극장 수입과 DVD 판매, 캐릭터 라이선스 등으로 미국에서 벌어들인 돈은 43억5911달러다. 같은 해 미국영화흥행수입인 95억달러에 비교하면 거의 절반에 이르는 수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본 애니메이션의 애호가는 소수라고 생각했던 현실과는 전혀 다른, 엄청난 규모의 수익인 것이다. 어느 틈에 일본 애니메이션은 미국 대중문화의 주류가 되어버린 것이다. 게다가 일본 애니메이션의 북미 매출액이 일본 철강산업 수출총액의 4배에 이르니 애니메이션은 이미 일본의 차세대 기간산업이라 불러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일본 애니메이션이 어느 날 갑자기 미국인들의 대중오락이 된 것은 아니다. 일본 애니메이션이 미국에 뿌리를 내리기까지는 무려 40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1963년 <우주소년 아톰>의 방영부터 시작하여 40년간 방영된 일본 애니메이션은 조금씩 자신의 존재를 알려나가기 시작했다. <스타 블레이저스>가 <우주전함 야마토>이고, <로보텍>이 일본의 <초시공요새 마크로스>임을 알지 못하던 시청자들이, 조금씩 일본 애니메이션의 존재를 깨닫고 찾기 시작한 결과가 현재다. 일본 문화가 서구의 관객을 매혹시키는 것은 결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일이 아니다. 타란티노가 소니 치바의 <스트리트 파이터> 시리즈에 반하여 차이나타운의 극장을 찾던 시절만 해도, 미국에 출시된 일본 영화 비디오는 구로사와 아키라와 오즈 야스지로 등 거장들의 작품에 불과했다. 그러나 지금은 고지라 시리즈와 자토이치 시리즈, 미이케 다카시의 <후도>와 이시이 다카시의 <고닌>은 물론 등 온갖 일본의 대중영화들을 DVD로 구할 수 있다.

<우주전함 야마토>
<초시공요새 마크로스>

폭력에의 매혹에서 동양 문화의 체화(體化)로

일본의 대중문화에 중독된 사람들은 워쇼스키 형제와 타란티노의 경우처럼, 대개 탐미주의적인 폭력에 매혹된다. <매트릭스>를 본 사람들은 그 철학 이전에 액션 때문에 경악했다. 우아하게 공중을 나는 듯한 여성의 액션, 거대한 기둥을 박살내는 총탄. 그건 이미 <공각기동대>에서 본 장면이었다. 아예 모든 장면들을 거의 기존 영화들에서 가져와 전시하는 ‘큐레이터’ 타란티노의 <킬 빌>은 말할 것도 없다. 일본영화의 폭력은 극단적이다. 후카사쿠 긴지의 <의리없는 전쟁>에서 모든 죽음은 일종의 개죽음이다. 의리도, 명예도 사라진 전후의 야쿠자 세계에서는 비참하게 거리에서 뒹굴며 생을 하직한다. 그러나 많은 사무라이영화에서 진정한 영웅들은 스스로의 죽음을 감지하고, 명예롭게 죽음을 맞이한다. 작은 칼로 자신의 복부를 가르고, 커다란 검이 그의 목을 자른다. 벚꽃 나무 아래에서라면, 그 죽음은 더욱 아름다울 것이다. 죽음의 미학이 일본만큼 화려한 곳도 없다. 그 죽음으로 이르는 폭력을 묘사하는 데에서, 일본을 따라갈 만한 곳은 없다. <라스트 사무라이>도 그런 죽음의 미학을 어김없이 과시한다.

<라스트 사무라이>가 지금 등장한 것은 꽤 적절해 보인다. <매트릭스>와 <킬 빌>은 서구인의 일본 문화 중독을 폭발적으로 드러낸 작품이었다. <라스트 사무라이>는 그 이유를 거칠게나마 알려준다. 의리와 희생 같은 전통적인 동양의 가치와 함께 검으로 대표되는 동양의 액션이 그들의 마음과 몸을 사로잡았음을. 알그렌이 서양식 검술을 버리고 일본도의 초식을 배우는 장면은, <매트릭스>의 네오가 가상현실 속에서 중국 무술을 익히는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서구인들은 일본 대중문화를 또 하나의 현실인 것처럼 신기한 눈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어느새 그것은 몸에 익어버린다. <매트릭스>의 액션이 이미 할리우드를 장악한 것처럼. 혹은 워크맨이 어느새 사람들의 몸에 하나씩 달라붙어버렸듯이. 그것이 단지 스타일뿐일지라도, 분명한 사실은 누군가에게 돈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할리우드가 일본 문화의 매혹에 스스로 몸을 던지는 이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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