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의 추억> 송강호·<바람난 가족> 문소리
추웠다. 올해 최고의 배우로 뽑힌 두 배우가, 우연히도, 함께 출연하고 있는 <효자동 이발사>의 세트장은 차가웠다. 그것은 뚝 떨어진 기온 때문이 아니었다. 바로 송강호와 문소리가 함께 어깨를 맞대고 있기 때문이다. 활화산같이 불타오르는 연기를 펼치는 배우들 사이에서, 두 사람은 반대로 빙점(氷点)에 가까운 연기를 펼친다. <살인의 추억>의 송강호는 ‘미치도록 잡고 싶었던’ 범인의 목덜미를 쥔 채 “밥은 먹고다니냐”고 조용히 읊조린다. <바람난 가족>의 문소리는 “잘할게”라며 다가오는 남편에게 “넌, 아웃이야”라는 냉정한 인사를 던지고 걸레질을 한다. 그들은 폭발하지도, 터지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 서늘하고 냉정한 기운으로 2003년 영화계를 기분 좋게 얼렸다. ‘냉정한 송C, 문C’와 나눈 ‘뜨거운’ 5문5답.
올해의 배우 - 송강호
가치관의 혁명은 연기의 혁명을 낳고
2003의 추억 의심없이 최고의 해였다. <살인의 추억>으로 상도 많이 받았지만 상을 떠나서, 무겁고 친숙하지 않은 소재였을 텐데도 열광적으로 지지해줬던 대중들이 있어서 행복한 한해였다. 개인적으로 <복수는 나의 것> 이후 섭섭함 같은 것들이 있었다. 이 영화가 2∼3년 뒤에 만들어졌다면 좀 다른 평가를 받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버림받은 자식 같은 느낌이랄까. 그러나 <살인의 추억>이 이 모든 것을 해소해준 것 같아 기뻤다. 박찬욱 감독이 다음 작품 <올드보이>로 인정받기도 했고. 사람들은 한해가 지나면 배우들의 연기 발전이나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길 즐기는데, 연기든 연출이든 창조작업을 하는 사람들에게 세월이나 경험은 핵심이 아니라고 본다. 물론 외형적인 테크닉이 자연스러워질 수는 있겠지만 연기는 태권도의 단을 따듯이 오래한다고, 열심히 한다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식의 발전은 없다. 진짜 변화는 인간과 연기에 대한 가치관의 변화, 가치관의 혁명이 이루어진 뒤에 얻어지는 것이다. <복수는 나의 것>을 찍고 나서 연기란 무엇인가에 대해 깊이 고민했던 것 같다. 대사를 통해 감정과 상황을 이해시키는 것이 좋은 연기인가. 아니면 심정과 상황을 말이 아니라 그 배우가 가진 호흡 하나로 전달시키는 것이, 즉 숨기면서 하는 것이 좋은 연기인가 하는 것에 대한 고민. 그런 고민 이후 <살인의 추억>을 찍었다. 사실 <살인의 추억>은 배우의 능력이라기보다는 봉준호라는 뛰어난 혜안을 가진 감독이 한 배우에게서 박두만이란 캐릭터를 영리하게 뽑아낸 경우였다.
돌이킬 수 없는 <살인의 추억>의 마지막 촬영, 파주에서 비오는 날 여중생의 시체를 발견하는 신이었다. 모든 촬영이 끝나자 봉준호 감독과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길거리에서 말없이 포옹을 나누었다. 6개월 동안의 긴 여정을 함께 걸어온 서로에 대한 고마움이었을 것이다.
강호와 소리 사이 <바람난 가족>을 보며 문소리의 배우로서의 능력이 꽃이 핀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기를 제대로 배우고, 극단생활을 한 것도 아닌데 타고난 부분이 있는 것 같다. 모두들 문소리가 이창동 감독이라는 휼륭한 감독을 만나 키워졌다고만 생각하는데, 그보다는 이창동 감독이 좋은 재목을 알아보는 좋은 눈을 가졌던 것이라고 본다. 욕심도 열정도 대단하고 <효자동 이발사>를 함께 찍으면서 머리가 대단히 명석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형적으로 고전적인 여배우의 장점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해서 자격지심을 가질 필요는 전혀 없다고 본다. 그들보다 훨씬 더 자유로워질 수 있는 여지가 있고, 그것이 자신감으로 변했을 때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경지에 이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올해의 영화, 액추~얼리 원래 1년에 영화관에 몇번 안 가는 편이다. 그렇지만 올해는 <지구를 지켜라!>를 두번이나 봤고 <바람난 가족>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여섯개의 시선> <올드보이> 등 많은 영화를 봤다. 워낙 좋은 영화들이 많은 한해였으니까. 개인적으로 베스트를 뽑으라면 <올드보이>다. 박찬욱 감독의 엄청난 능력을 보여준 영화이고, 최민식 선배의 연기는 두말하면 잔소리다. 하지만 나는 유지태를 특히 주목해서 봤다. 지태에겐 배우로서 성숙할 수 있는 중요한 영화였다. 이우진이란 역할의 80%를 그가 해냈다고 본다. 2위를 뽑자면 <지구를 지켜라!>. 장준환의 괴물 같은 상상력을 보여준 영화였다. 상업적 코드의 유혹을 이긴 작가적인 뚝심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2004년을 지켜라 <효자동 이발사>의 촬영이 2004년 1월 말쯤 끝나면 4월에 개봉할 거다. 촬영이 35% 정도 남았는데 감이 좋다. 내년 초면 대한민국 사람들이라면 묘한 회한을 느낄 만한 따뜻한 영화 한편이 나올 것 같다. 그리고 6월이면 임필성 감독의 <남극일기>를 찍기 위해 뉴질랜드로 떠난다. 4개월 정도 촬영하고 나면 그렇게 내년도 훌쩍 갈 것 같다. 취미도 없고, 특별히 하는 일도 없고, 뭐 보러 다니는것도 싫고 귀찮다. 나란 사람이 그렇다. 영화 아니면 좋아하는 것도, 할 줄 아는 것도 없는 사람이다.
올해의 배우 - 문소리
천국과 지옥 사이, '레디'와 '고' 사이
2003년의 추억 사실 올해를 시작하면서 너무 걱정이었다. 2월 말 영화촬영이 끝나고 3, 4월엔 개인적으로는 최악의 상태였던 것 같다. 기분이 다운되어 잠도 못 자고, 잘 먹지도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촬영은 끝났는데 개봉날짜도 못 잡았고, 투자도 못 받고, 계속 후반작업만 하고, 후시녹음은 천번도 더하고, ‘<바람난 가족> 잘되면 눈 판다’는 소리나 들리고… 그땐 정말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우리가 뭘 잘못했나, 영화 한편 열심히 찍은 죄밖에 없는데….’ 사실 이 작품을 선택하고 나서는 힘들다는 말 한마디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모두들 ‘그러게, 누가 하래?’라고 할 게 뻔했으니까. 어쨌든 결과적으로 작품이 인정받아서 너무 고맙다. 연기자로서 다른 모습을 보여준 것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올해는 개인적으로 많이 외로웠던 것 같다. 부모님으로부터 독립도 했고, 부모 같은 이창동 감독, 명계남 대표로부터도 독립했고. 엉망으로 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기댈 데가 없어서 많이 힘들었던 것 같다. 그나마 현장에 있을 때가 그 외로움을 잊을 수 있는 시간들이었다. 물론 ‘레디’와 ‘컷’ 사이는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순간이지만, 그건… 짧잖아. (웃음)
돌이킬 수 없는 포스터 촬영을 했던 이태원 스튜디오에서 나는 펑펑 울고 있었다. 물론 영화가 영화다 보니 전혀 예상 못한 건 아니지만 그렇게 홀딱 벗고 다리를 쫙 벌리고 있는 컨셉이라는 것은 스튜디오에 와서 알았다. 사실 벗고 있으면 슬퍼진다. 초라하잖아. 아무것도 없는, 몸만 있는 자신이란… 누구나 겪어보면 슬퍼질 거다. 집에서 혼자 옷벗고 있어봐라, 아마 참 초라하고 슬프다는 생각이 들걸?
강호와 소리 사이 연극할 때부터 보면서 대단한 배우란 걸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옆에서 확인하고 있는 중이다. 대한민국영화대상에서 점쟁이가 송강호 선배에 대해 “난폭한 성질이 있으나, 눈에는 선하고 여린 심성이 비친다”고 했는데, 그 말이 딱 맞는 것 같다. 거친 면이 있다. 그리고 여리고 순수한 면도 있다. 오로지 세상에 관심사는 영화뿐인 사람이다. 촬영장에서나 술자리에서나 늘 영화 이야기만 한다.
올해의 영화, 액추~얼리 이유는 알 수 없는데, 갈수록 점점 내 마음을 움직이는 영화가 줄어든다. 예전엔 어떤 영화를 보고 나면 가슴이 내려앉기도 하고, 심장이 널뛰듯 뛰어서 잠도 잘 안 오는 영화들이 많았는데 요즘엔 그런 영화가 없다. 아마도 내가 변해서겠지. 그중 <살인의 추억>은 내 마음의 어떤 면을 건드리는 부분이 있었던 영화다. 재밌어서 좋기도 했고. 두 번째를 꼽으라면 <여섯개의 시선>. 시도 자체도 신선했고 나에게 인권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게 한 작품이었다. 특히 정재은 감독의 작품은 가장 말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꺼낸 것 같아 그 시도에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다만 이왕 꺼낸 이야기니 조금 더 과감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2004년을 지켜라 일단 2004년 초까지는 <효자동 이발사>에 전념해야 한다. 이 영화를 통해 조연으로서 역할을 톡톡히 배우고 있다. 주연이 아니라 편할 거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오히려 잠도 많이 못 자고 신경도 더 쓰이는 편이다. 상황에 맛깔스럽게 대처하지 못하면 조연은 그 신에서 의미가 없어져버리기 때문에 준비할 것도 많고 생각할 것도 많다. 하루는 영화 전체에 내가 나오는 부분만 체크해보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주연일 때보다 영화 전체적인 것에 대해, 전체 리듬에 대해 더 많은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자다가 벌떡 일어나서 아이구, 앞으로 어떡해야 하나 생각할 때도 있다. 조금만 방심하면 왕씨, 최씨 대사가 이만큼씩 늘어나 있다. 안 밀려나려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웃음) 몇몇 시나리오를 보고 있긴 하다. 예전에는 무거운 시나리오가 많이 들어왔는데 좀더 다양해졌다. 다만 유부녀 역할이 많아져서 문제다.
한국영화계 최고의 발견
올해의 신인배우, 박해일·임수정
“아니, 영화를 보니까 나랑 김상경이 주연이 아니데. 박해일이 주연이더만….” <살인의 추억> 개봉 즈음, 송강호는 불평 아닌 불평을 하곤 했다. 이 말은 창백한 얼굴의 용의자를 연기한 박해일에게 관객(특히 여성)들이 기울인 관심에 대한 일종의 ‘질투 어린 칭찬’이었을 것. 아닌 게 아니라 <살인의 추억>에서 박해일은 분노를 자아내면서도 이상한 매력을 뿜어내는 독특한 캐릭터를 소화해냈다. <질투는 나의 힘>에서 연적인 편집장을 증오하지만 서서히 그와 닮아가는 청년 역을 통해 순수와 타락의 공존을 선보였던 그는 <국화꽃 향기>에선 멜로 연기도 선보였다. “선과 악 무엇을 투사해도 좋을”(심영섭), “순수성과 악마성의 드문 공존”(변성찬) 등의 칭찬은 새로운 미남 연기파 배우의 탄생을 축하하는 축포와 같은 것이리라.
임수정은 짧은 시간 동안 비약이라 할 만한 큰 성장을 이뤘다. 지난해 <피아노 치는 대통령>에 나올 때만 해도 평범한 신인 연기자에 불과한 듯했지만, <장화, 홍련>과 <…ing>의 임수정은 확실히 달랐다. “또래 연기자들에게 찾을 수 없는 고전적인 여성성과 정서를 지녔다”는 김지운 감독의 말마따나 그는 신세대의 당돌함만으로 승부하려는 다른 신인급 연기자들과는 확연히 다른 배우임을 선언하는 듯 보였다. 현재 충무로 감독들의 ‘캐스팅 1순위’가 된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닌 셈이다. 분명, 임수정은 올해 한국영화계 최고의 발견 중 하나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