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2003 한국영화 결산 [7] - 올해의 기상천외 BEST 10
2003-12-26
글 : 김현정 (객원기자)
2003년 해외영화, 이리저리 뽑은 베스트·워스트

안녕, 프로도. 안녕, 네오. 안녕, 터미네이터… 설마, 안녕 맞겠지?

2003년은 많은 이들에게 작별을 고하면서 흘러갔다. <반지의 제왕> <매트릭스> 3부작이 막을 내렸고, 그레고리 펙과 캐서린 헵번, 엘리아 카잔, 장국영이 부고를 전해왔다. 누군가 다시 들어온다 해도, 이들이 떠난 자리는 어쩔 수 없이 비워진 채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해를 정리하는 지면은 쓸쓸하기보다 기운차다. 노장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내놓은 걸작 <미스틱 리버>를 필두로 잊지 못할 영화들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캐릭터, 두고두고 전해질 명대사들이, 올해도 가득하다. 마음대로 뽑아본 올해의 베스트와 워스트 부문 수상자들을 추억하며, 행복한 새해를 준비하는 시간. 스물여덟명이 선정한 올해 최고의 영화 열편을 다시 보는 일도 한해를 보내고 한해를 맞는 괜찮은 숨고르기 방법이 아닐까 한다.

알뜰상

장기적인 경제침체와 40만명에 육박하는 청년실업 탓인지 올해는 유독 절약하는 영화들이 많았다. <매트릭스> 시리즈의 네오와 트리니티는 구멍난 니트를 꿰매 입을 여력도 없는 것 같았고, <어바웃 슈미트>의 슈미트씨는 평생 해로한 아내를 싸구려 플라스틱 관에 담아 장사지냈다가 딸의 노여움을 샀다. <칠판>은 알뜰하고도 독창적인 절약정신이 빛을 발한 영화. 칠판 짊어지고 학생을 모으러 나선 두 교사는 폭격을 피할 때, 부목이 필요할 때, 아내를 사야할 때, 모든 난관을 칠판 하나로 극복했다. 이중 가장 치밀했던 올해의 알뜰상 수상자는 <펀치 드렁크 러브>의 배리다. 그는 푸딩 사재기 비용과 하와이 여행 경비를 비교한 다음, 푸딩 쿠폰 마일리지를 모아 하와이로 떠나는 자린고비 정신을 발휘했다.

최고의 아버지, 최악의 아버지

이 시대 최고의 아버지로는 이론의 여지없이 <니모를 찾아서>의 말린이 선정됐다. “내 아들 못 봤어요? 내 아들이 잡혀갔어요”를 외치면서, 깊은 바다 산호초로부터 해류를 타고 호주 시드니에 이르는 긴 여정을 감행한 말린. 그 모험담은 거북이 등에 실려 <말린: 7대양의 전설>이 되어 퍼져나가지 않았을까. 자식을 되찾기 위한 눈물 겨운 노력은 <에블린>의 데스몬드도 뒤지지 않는다. 데스몬드는 이혼과 함께 빼앗긴 양육권을 되찾기 위해 그 좋아하는 술마저 끊고 아르바이트로 세월을 보냈다. 완고하긴 하지만 <나의 그리스식 웨딩>의 거스도 괜찮은 아버지다. 그는 딸이 그리스 남자와 결혼해 그리스 아이들을 낳고 그리스 음식을 차리길 바랐지만, 비(非)그리스인 사돈에게도 독한 그리스 술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2003년엔 다스베이더에 비길 만한 악독한 아버지도 등장했다. <헐크>의 배너 박사는 아들을 실험 대상으로 삼아 괴물로 만든 냉혹한 아버지. 다스베이더처럼 참회도 하지 않았으니, 역사상 최악의 아버지라 할 수 있겠다.

동분서주상

“앗! 스미스 요원이다!”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의 엘론드를 보고 흠칫 놀란 관객은 한두명이 아닐 것이다. 휴고 위빙은 <매트릭스> 2편과 3편에 연달아, 그것도 한번에 100명이나 우르르 몰려나왔기 때문에 여간해선 얼굴 잊어버리기 힘든 배우였다. 올해 <매트릭스> <반지의 제왕>을 모두 마무리한 위빙은 “가장 좋아하는 3부작은?”이라는 기자들의 질문에 “노 코멘트”라고 답했다. <어댑테이션>의 니콜라스 케이지와 <도플갱어>의 야쿠쇼 고지도 1인2역을 맡아 평소보다 두배의 노동을 감당했다.

최고의 복수, 최악의 복수

“복수는 차가울 때 먹어야 맛있는 음식과 같다.” 의미심장한 격언을 남긴 <킬 빌>은 질과 양 모두에서 2003년 최고의 복수극으로 자리매김했다. 눈밭에서 일본도를 휘두른 브라이드도 훌륭했지만, 더욱 잔혹했던 복수는 오렌의 것. 오렌은 열두살 나이에 부모를 살해한 야쿠자 보스의 배를 갈랐다. 아버지의 살해범을 물먹인 <이탈리안 잡>의 스텔라도 효녀 오렌의 뒤를 이었다. 효녀가 있다면 효자도 있다. <갱스 오브 뉴욕>의 암스테르담은 식칼 하나 손에 들고 아버지의 조직을 재건했지만, 원수 빌을 죽이는 데는 실패했으므로 완벽한 복수에는 한 걸음 못 미쳤다. 규모 면에서는 마을 하나를 쓸어버린 <도그빌>이 으뜸. 그러나 해선 안 될 복수도 있었으니, <돌이킬 수 없는>의 마커스는 무고한 남자를 애인의 강간범으로 착각해 소화기를 휘두르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다. 만일 진범이 하루만 일찍 체포됐더라면, <미스틱 리버>의 데이브도 친구가 장전한 복수의 총알을 피할 수 있었을 텐데.

용용 죽겠지 상

어느 사진기자는 모니카 벨루치를 보더니 “카메라 필름이 저절로 돌아가더라”고 고백했다. 그런 벨루치가 올해는 네편의 영화를 한국에 보내왔다. 그러나 <돌이킬 수 없는>을 제외한다면, 살짝 약만 올리고 사라지는 영화들이었으니…. <매트릭스> 2편과 3편에선 터질 것 같은 가죽 드레스를 입고 나타났지만 “도대체 왜!”라는 탄식이 나올 정도로 짧은 출현이었다. <태양의 눈물>은 당당한 주연작이니까, 안심했다가 기습공격을 당했다. 난민들을 거느리고 정글을 빠져나오느라 사파리 재킷과 긴 바지 차림으로 일관했던 것. <태양의 눈물>은 그 흔한 폭포수 아래 목욕장면 하나 끼워넣지 않았는데, 혹자는 이런 뚝심을 ‘범죄’라고 평가했다.

최고의 누드, 최악의 누드

캐시 베이츠가 그렇게 벗을 줄은 몰랐다. 사돈될 양반을 맞아들인 <어바웃 슈미트>의 로버타 여사, 깐깐한 슈미트씨를 달래려는 마음인지, 그간 너무 외로웠던 탓인지, 뜨거운 물 받아놓고 가운 자락을 풀어헤쳤다. 쉰다섯 베이츠의 누드가 뭐 그리 황홀하겠는가마는 그 자신감과 용기 덕분에 만장일치 올해 최고의 누드로 자리매김되었다. 안타까운 누드는 <아타나주아>. 헐벗은 맨발 아타나주아는 치명적인 부분까지 드러내면서 목적지도 없이 설원을 질주하는 고생을 감수했지만, 자발적 누드가 아니라는 점에서 점수를 깎였다. 반면 <터미네이터3>는 꿈에 볼까 무서운 누드였다. 1편과 같은 포즈를 취한 아놀드 슈워제네거는 세월 앞에 장사없다는 만고불변의 격언만을 떠올리게 했다.

Where are you from?

어떤 영화들의 제목은 도무지 출처를 짐작할 수가 없다. <와사비: 레옹2>는 홍합 전문 레스토랑 체인점 ‘레옹’만큼이나 <레옹>과는 관계없는 영화였고, <마이 리틀 아이>는 귀여운 꼬마라고는 한명도 나오지 않는 공포영화였다. 그 아이가 그 ‘eye’라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토끼울타리>는 토끼를 막는 울타리인가, 토끼를 보호하는 울타리인가, 논란을 낳았지만, 이 제목에서 호주 원주민 소녀가 가족을 찾아 떠나는 슬픈 드라마를 떠올리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패스트 & 퓨리어스2>는 1편이 <분노의 질주>라는 제목으로 개봉했음에도 왜 제목을 바꿨을까 해소할 길 없는 호기심만을 자극했다. 이 많은 영화들 중에서도 <크레이들2 그레이브>는 단 한명도 정답을 내놓지 못한 가장 난해한 제목을 가진 경우였다. 이 영화를 직접 본 김봉석 기자는 제목의 뜻을 묻자 “알 수 없지”라는 결론을 내려주었다.

최고의 거짓말, 최악의 거짓말

짐 캐리도 울고 갔을 <라이어 라이어>들의 한해였다. 베니뇨는 알리시아가 죽었다는 거짓말을 믿고 <그녀에게> 향한 마음만 품은 채 자살했으며, <매치스틱 맨> 로이는 소녀의 깜찍한 거짓말에 속아 새 인생을 얻었다. 그러나 가장 무모하고도 치밀했던 ‘라이어’는 <굿바이 레닌>의 알렉스였다. 그는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어머니가 충격을 받을까 염려해 독일이 통일됐다는 사실을 숨기기로 결심했다. 쓰레기통을 뒤져 동독 시절 피클병을 찾아내고, 아이들을 소집해 옛날 노래를 부르게 하고, 열악한 장비로 가짜 뉴스까지 제작했으니, 올해의 거짓말 상과 함께 올해의 효자상까지 받을 만하다. 허무한 거짓말로는 <데이비드 게일>의 사기극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데이비드 게일은 두번의 반전을 준비했지만, 무죄를 입증하고자 동분서주했던 사람은 얼마나 민망했을까. <영웅>의 거짓말도 천하를 위한다는 포부와 달리 “저게 뭐야?”라는 반응을 얻는 데 그쳤다.

최고의 커플

<남과 여>는 이제 아득한 옛날영화가 되었다. 2003년 최고의 커플 자리는 숱한 ‘남과 남’이 치열한 경합을 벌이던 끝에, 바이올린과 첼로의 이중주로 파도소리를 잠재운 <마스터 앤드 커맨더: 위대한 정복자>에 돌아갔다. 캡틴 잭 오브리는 닥터 스티븐 마투린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추적하던 프랑스 군함까지 포기했는데, 눈물나는 사랑의 결실이 아닐 수 없다. 차점자는 부상당한 히로마사를 껴안고 흐느끼다가 “내가 언제 울었다고” 앙탈을 부리던 <음양사> 아베노 세이메이. 최고 자리는 놓쳤지만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의 프로도와 샘도 3년 동안 이어온 애정을 높이 살 만했다. 그러나 프로도는 샘의 결혼식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홀로 호비튼을 떠나고 말았다.

마이웨이상

하나, 둘, 셋…. <니모를 찾아서>의 도리는 3초만 지나면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단기기억상실증 물고기다. 조금 전에 자기를 잡아먹으려고 했던 상어에게도 방긋 웃으며 인사할 정도로 중증. 기억이 없어서 상처도 없는 도리는 남들이 뭐라 하든 춤추고 노래하는, 행복한 세상의 물고기다. 내 갈 길을 가는 또 하나의 캐릭터는 <캐리비안의 해적: 블랙펄의 저주>의 캡틴 잭 스패로우. 돛대만 남고 가라앉은 배를 타고도 위풍당당하게 입항하니, 마이웨이상은 우열을 가릴 수 없는 공동수상이다.

관련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