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2003 한국영화 결산 [2] - 올해의 영화 BEST 5
2003-12-26
글 : 남동철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매끈하고 고집센 작가주의 - 올해의 영화 베스트 5

1.<지구를 지켜라!>

“데뷔작으로서 <지구를 지켜라!>는 최고의 영화다.”(김봉석)

“이 황당무계하지만 탁월한 상상력이 그저 재기발랄한 농담으로 치부되고 만다면 그건 슬픈 일이다. 차라리 병구의 광기를 우리의 것으로 만드는 편이 낫다.”(유운성)

<지구를 지켜라!>는 새로운 영화다. 수많은 평론가의 지지는 그 새로움을 반기는 환호성일 것이다. 아마 그들에게 <지구를 지켜라!>는 리얼리즘의 또 다른 출구를 발견한 작품으로 기억될 것이다. 이를 홍상수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과 비교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두 영화 모두 기존 한국영화의 한계를 돌파하는 비약의 순간을 선사했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지구를 지켜라!>는 그 상상력의 규모 면에서 기존 한국영화를 압도해버린다. 주인공 병구가 지켜야 할 것은 애인이나 가족, 민족이나 국가가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바로 지구다. 그는 무엇으로 지구를 지키려 드는가? 고작 외계인의 세뇌를 막을 수 있도록 고안된 헬멧과 물파스와 때밀이 수건이 전부 아닌가? 무모하다고? 물론이다. <지구를 지켜라!>는 그래서 ‘올해의 영화’가 될 수 있었다. 병구가 지켜야 할 대상의 전 지구적 규모와 병구가 가진 무기의 초라함이 이루는 극명한 대비(할리우드 SF영화에서 결코 기대할 수 없는!)야말로 <지구를 지켜라!>를 새로운 영화로 만들었다. <지구를 지켜라!>는 개봉 당시 관객의 호응까지 끌어내진 못했지만 평론과 언론에서 뜨거운 환대를 받았다. 감독 장준환은 모스크바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했다.

2. <살인의 추억>

“출연하는 모든 배우의 연기가 이처럼 좋은 영화를 또 만날 수 있을까.”(이동진)

“웰메이드 필름이란 바로 이런 것. 연기의 앙상블이란 바로 이런 것. 한국사회의 환부가 부어올라 그 농으로 만든 작품.”(심영섭)

<살인의 추억>은 잘 만든 영화다. 연기, 연출, 촬영, 미술, 음악 등 어느 것 하나 처지는 구석이 없다. 아니 그 각각이 독립적으로 잘하는 게 아니라 숙련된 잼세션처럼 척척 들어맞아 놀라운 상승효과를 일으킨다. 그 탁월한 조화에 평론가들은 박수를 쳤고 관객은 열광했다. <살인의 추억>은 입소문을 타고 관객동원에 성공했으며 마침내 올해 최고의 흥행작의 자리까지 차지했다. 이 지점에서 <살인의 추억>은 영화산업이 어떤 좌표로 나아가야 하는지 되새기게 만들었다. <살인의 추억>은 <공동경비구역 JSA>가 그랬듯 지금 한국영화의 어떤 기준점을 제시한 것이다. 봉준호 감독은 이 영화에서 화성연쇄살인사건이라는 우회로를 통해 80년대에 접근한다. 독재정권의 폭압이 극에 달하던 시기에 시골마을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은 무기력한 공권력을 우롱한다. 세명의 형사와 세명의 용의자, 그들이 벌이는 숨바꼭질은 기가 차서 웃음이 터져나오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가슴이 뜨거워지는 걸 피할 길 없다. 끝내 범인을 잡을 수 없기에 영화는 그 시대를 어두운 터널에 남겨두고 헤어진다. 그 추억은 상처의 기억으로 남는다. 각종 국내 영화상을 휩쓸었던 <살인의 추억>은 산세바스찬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기도 했다.

3. <질투는 나의 힘>

“남녀 관계에서의 끌림과 밀침에 대한 정묘한 보고서.”(홍성남)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라는 기형도의 시를 떠올리게 한다.”(박평식)

<질투는 나의 힘>은 묘한 영화다. 많은 사람들이 홍상수를 떠올렸지만 홍상수 영화에서 발견할 수 없는 독특한 감성이 <질투는 나의 힘>의 매력이었다. 그것은 단지 남녀의 성차에서 비롯된 문제가 아니다. 박찬옥 감독은 홍상수만큼 예리하고 깊게 파고들지만 영화의 구성요소 하나하나를 해체하지는 않는다. 홍상수 영화가 삶의 부조리한 덩어리 그 자체로 귀결되는 반면 <질투는 나의 힘>은 그 부조리한 삶에 깃든 감정과 인물에 주목하게 만든다. 영화의 주인공 원상은 두드러진 예다. 어떤 결핍에 시달리는 욕망의 포로라는 점에서 홍상수의 남자들과 다를 바 없지만 <질투는 나의 힘>은 원상의 고민과 갈등을 감추지 않는다. 영화는 인류학자의 관찰력으로 원상의 심리를 좇아가 마침내 그의 결핍이 우리가 칭송하는 ‘젊음’과 ‘청춘’의 실체임을 폭로한다. 그것은 <질투는 나의 힘>을 새로운 각도로 바라본 청춘영화로 규정하게 만든다. 익숙한 청춘영화의 관습에 기대지 않은 채 고통스럽고 쓸쓸한 젊은 날을 정밀하게 그려낸 <질투는 나의 힘>은 70년대 <바보들의 행진>, 80년대 <고래사냥>, 90년대 <비트>가 차지했던 그 자리를 대신한다. <질투는 나의 힘>은 로테르담영화제에서 타이거상을 수상했다.

4. <바람난 가족>

“역설적으로 가족의 본질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여성이 중심이 되어 친밀감을 교류하는 새로운 형태의 가족관계’를 암시한 영화.”(황진미)

“바람난 아내나 남편의 이야기가 더이상 쿨하지 않은 반면 가족이 집단적으로 바람이 날 때 그것은 영화가 된다.”(김소영)

<바람난 가족>은 도발적인 영화다. 이 영화에서 가족은 더이상 지켜야 할 소중한 대상이 아니며 정과 사랑으로 재건돼야 할 보금자리가 아니다. 그런 면에서 임상수 감독의 제안은 솔직히 까놓고 얘기하자는 것이다.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삶이 아름답다는 말, 그것은 <박하사탕>에서 고문받던 젊은이가 믿었던 ‘인생은 아름답다’는 말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함께 살고 있는 가족은 어떻게 할 것인가? 영화는 어떤 문제에도 쿨하게 대처하는 호정을 통해 암시를 던진다. 그녀는 남편의 외도를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여기지 않으며 복수를 위해 맞바람을 피우는 것도 아니다. 호정은 그냥 자신의 욕망에 충실히 응답한다. 아들을 사랑하고 이웃집 고등학생과 우정을 나누면서 그녀는 누구에게 종속된 삶을 거부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그런 점에서 특별히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호정은 집으로 돌아와달라는 남편의 부탁을 단호히 거절하고 춤을 추듯 움직인다. 경쾌하고 코믹한 그 움직임은 가부장 이데올로기에 대한 정말 쿨한 대응처럼 보인다. <바람난 가족>은 올해 베니스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됐으며 주연배우 문소리는 스톡홀름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5. <올드보이>

“숙련되고 세련된, 그러나 무국적의 스릴러.”(변성찬)

“숏 하나 하나가 미학적 긴장과 세련된 밀도로 범람하는, 그래서 영화 전체가 과잉일 수밖에 없는 영화.”(정승훈)

<올드보이>는 강렬한 영화다. 휘발성 강한 이 영화의 에너지는 일단 시작하면 끝까지 숨돌릴 틈없이 밀고나간다. <복수는 나의 것>에 이은 복수에 관한 두 번째 이야기이지만 <올드보이>의 화법은 전작과 상당히 다르다. 그것은 감독의 말처럼 <복수는 나의 것>이 건조하고 차가운 반면 <올드보이>가 풍성하고 뜨겁다는 의미 이상이다. 일단 <올드보이>는 <복수는 나의 것>과 달리 미스터리스릴러라는 장르적 성격이 분명하다. 누가 왜 오대수를 15년간 감금했는가, 라는 질문에서 시작하는 이 영화의 게임은 차츰 질문을 바꾸면서 사건의 실체에 접근한다. 스릴러가 감춘 것과 드러낸 것의 조화로 이뤄지는 장르임을 염두에 둔다면 <올드보이>의 영리함은 더 분명해진다. “모래알이나 바윗덩어리나 물에 가라앉긴 마찬가지”라는 이 영화의 진술은 사소한 것으로 운명적 비극의 느낌까지 만들어내는 <올드보이> 자신에 대한 해석으로 읽히기도 한다. <올드보이>는 박찬욱 감독의 행보를 가늠케 하는 영화로도 보인다. 많은 관객이 <공동경비구역 JSA>와 <복수는 나의 것> 사이에서 선택한 박찬욱의 길에 갈채를 보냈다. <올드보이>는 일본에 220만달러에 팔려 한국영화 최고 판매가 기록을 경신하기도 했다.


2003 외화 베스트 10

영화평론가 허문영씨는 <미스틱 리버>를 “올해 가장 무섭고 냉혹하며 비판적인 영화”라고 평했다. 동시에 많은 이들이 이 영화를 올해 가장 사랑했던 영화 리스트 맨 앞자리에 올려놓았다. 노장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25년 전의 악몽에서 출발한 이 영화로 그 자신의 25년 전 시절을 까마득하게 잊을 법한 거장이 되었다. 2위와 3위에 오른 <그녀에게> <밀레니엄 맘보>도 건재한 기량을 과시하는 작가들의 영화다.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현명하고 포근하게 나이를 먹고 있고, 허우샤오시엔은 척박한 대만에서도 여전히 살아남았다고 전해주었다.

4위 <디 아워스>는 재미있게도 5위와 6위를 포함하고 있다. <파 프롬 헤븐>과는 줄리언 무어를, <도그빌>과는 니콜 키드먼을 공유하면서, 사이좋게 베스트 10 리스트 허리 부분을 장악한 것이다.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은 다소 서운한 7위에 머무르면서 3년 동안 들려준 전설을 마감했고, <킬 빌>은 2편이 남아 있음에도 벌써 8위에 올랐다. 서글프고도 갸륵한 사기극 <굿바이 레닌>은 9위. 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터리 <볼링 포 콜럼바인>은 신랄한 비판과 코미디영화 못지않은 유머로 숱한 극영화를 제치고 10위 자리를 채웠다.

이것으로 리스트는 완성되었지만, <니모를 찾아서>가 11위를 차지했다는 사실을 빼놓을 수 없다. 물고기와 거북이와 바닷새가 나오는, 설정만으로는 어린아이 눈높이에 꼭 맞는 <니모를 찾아서>는,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의 성장담을 담은 애니메이션이었다. 아직 더 자라야 할 많은 어른들이 <니모를 찾아서>에 손을 들어주었다.

1. <미스틱 리버>
2. <그녀에게>
3. <밀레니엄 맘보>
4. <디 아워스>
5. <파 프롬 헤븐>
6. <도그빌>
7.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
8. <킬 빌>
9. <굿바이 레닌>
10. <볼링 포 콜럼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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