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한국 관객에게 재개봉관을 허하라 [1]
2004-01-09
글 : 이영진
작은 영화들을 위한 연합 네트워크 띄워야

2003년 12월16일, 서울 광화문 씨네큐브에서는 ‘작은’ 세미나가 열렸다. 젊은비평가모임이 마련한 이 자리에서 전찬일, 조준형, 곽영진 등 평론가들은 발제를 통해 일부 영화의 스크린 독점 현상이 빚어온 폐해의 심각성을 강조했다. 이어 예술영화, 저예산영화, 독립영화 등 멀티플렉스가 철저히 배제하는 비주류영화에 대한 보호책으로 스크린쿼터 제도 안에 마이너리티 쿼터를 도입하고 정부가 예술영화전용관에 대한 지원을 더욱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통 구조 개선이 필요하다는 이들의 목소리는 아쉽게도 그닥 큰 파장을 일으키지 못한 듯하다. 조언을 비웃기라도 하듯 연말 메이저 배급사들은 ‘과식’을 거듭하고 있고 거대 멀티플렉스는 ‘편식’으로 일관하고 있다. 12월31일 현재 <반지의 제왕>은 전국 402개(서울 98개) 스크린을 장악하고 있다. 같은 시기 <실미도>의 스크린 수는 전국 기준으로 334개(서울 80개)다. 전국 1200여개 스크린 중 이 두편의 영화가 61.3%를 독식하고 있는 것이다.

멀티플렉스에서 월,화,수 3일간 상영?

이같은 과점 현상이 두드러진 것이 최근의 일은 아니다. 표1은 최근 3∼4년 동안 멀티플렉스 체인들이 빠르게 증가하는 과정에서 일부 흥행작만을 선호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멀티플렉스는 관객 수를 증가시키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지만 영화계 안팎에서 산업과 문화의 균형을 깨뜨린 주범으로 몰리기도 했다. 2001년 ‘와라나고’ 사태는 단적인 예다. 그때에 비해 문화의 다양성을 걱정하는 우려의 여론은 잦아들었지만,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다. 한 배급사 관계자는 “극장쪽에 유리한 부율을 먼저 제시해도 상영을 받아들여주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하소연했다.

한편, 12월27일부터 서울 대학로에서 열리고 있는 하이퍼텍 나다의 ‘마지막 프로포즈’ 기획전에서는 <선택> <지구를 지켜라!> <질투는 나의 힘> <여섯개의 시선> 등 한국영화 5편과 <그녀에게> <기묘한 이야기> <돌스> 등의 외국영화 9편이 상영되고 있다. 14편의 영화 모두 2003년 멀티플렉스 중심의 극장가에서 홀대받았던 영화들로 짧은 부활이나마 맞고 있는 중이다. 다행인 것은 4번째를 맞는 이 재개봉 이벤트가 관객으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는 점이다. 첫해 30%대에 머물렀던 평균 관객점유율은 50%를 훌쩍 넘어섰다. 극장쪽에서는 지난해에 이어 1월까지 연장 상영을 계획하고 있다.

<지구를 지켜라>
<질투는 나의 힘>
<선택>

이쯤 되니 멀티플렉스에서 1주일도 채 버티지 못하고 쫓겨난 영화들을 위해 “재개봉관이라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견들이 없지 않다. 재개봉관은 과거 서울 도심-서울 외곽-지방 등의 순으로 순차적인 유통이 이뤄졌던 배타적인 배급 구조 아래서 존재했던 상영관의 형태다. 그러나 수입 및 프린트 벌수 제한 조치가 폐지되면서 와이드릴리즈라는 배급 방식이 일반화되고, 멀티플렉스 중심으로 극장가가 재편되면서 재개봉관은 거의 사라졌다고 봐도 무방하다. 일부에선 이런 제안에 대해 ‘죽은 자식 불알 만지기’라고 폄하한다. 실제로 한 극장 관계자는 “폐관을 앞둔 극장이 아니라면 누가 재개봉관을 하겠다고 나서겠느냐”고 잘라 말한다.

하지만 멀티플렉스가 한편의 영화가 관객과 만날 최소한의 기회조차 주지 않는 상황에서 ‘재개봉관’ 논의를 비현실적이라고 내팽개칠 수 있을까. 일례로 워너브러더스의 <미스틱 리버>는 12월5일 서울 14개관(전국 50개)에서 개봉했지만 1주일 만에 상영관이 전국 3개 스크린으로 줄었고, 현재는 예술영화전용관인 뤼미에르극장에서 조조 1회 상영으로 만족하고 있다. 할리우드 직배사라고 해도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다. 중소 배급사의 경우는 더욱 딱하다. <피아니스트> <웰컴 투 콜린우드> <노보> 등을 배급했던 필름뱅크의 신양중 부대표는 “설사 멀티플렉스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목요일 개봉이 아니라 그 다음주 월, 화, 수 평일 3일 개봉이 고작이다”라고 말한다.

멀티플렉스쪽에선 여타 영화들에 비해 좌석점유율이 떨어지니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도 불만이 만만치 않다. <파 프롬 헤븐> <돌이킬 수 없는> 등을 배급했던 미디어필름인터내셔널의 박정양 부장은 “멀티플렉스는 중소배급사가 들여온 비주류영화의 경우 대부분 개봉을 2∼3일 앞두고서 상영 결정을 한다. 2∼3주 전부터 예매를 시작하는 영화들과 점유율이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여타 영화들과 경쟁을 벌일 수 있는 조건 자체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을 영화진흥위원회도 직시하고 있다. 예술영화 쿼터제를 극장쪽에 부여하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판단을 해온 영진위는 2002년부터 대안 배급망으로서의 예술영화전용관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데 주력해왔다. 지난해 하이퍼텍 나다와 광주극장을 시작으로 전국 12개 스크린(표2 참조)을 예술영화전용관으로 선정하고, 연중 상영일수의 5분의 3 이상을 예술영화를 상영하는(한국 예술영화의 경우 365일 기준 106일 이상 상영해야 한다) 극장에 한하여 “연간 예술영화 상영일 판매 입장권의 15%에 해당하는 보조금을 지급하는” 방식이다.

예술영화전용관의 경우 현재로선 재개봉관의 역할까지 맡고 있다. 영진위가 정하는 예술영화는 아트영화, 저예산영화, 독립영화뿐만 아니라 상업적인 배급망에서 외면당한 영화 등까지 포괄하고 있다. 지난해 <동승> <아리랑> <오세암> 등도 예술영화전용관에서 상영됐다. 영진위가 씨네큐브, 하이퍼텍 나다 등 서울지역 예술영화관을 대상으로 2003년 상반기 상영결과를 분석한 결과(표3)에 따르면 전체 좌석판매율은 22%로 멀티플렉스의 평균 좌석점유율 40% 전후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예술영화전용관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지 아직 채 1년이 지나지 않았음을 고려한다면 썩 괜찮은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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