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그 영화(들)의 관객 연놈들은 멋있었다! [2]
2004-01-16
글 : 정성일 (영화평론가)

어떤 세대의 도착

점점 더 분명해진 사실인데, 영화를 보기 위해 영화관을 찾아온 사람들은 자기가 보아야 할 영화와 보고 싶지 않은 영화를, 나를 원하는 영화와 원하지 않는 영화를, 이상할 정도로 정확하게 구별한다. 여기서 중 요한 말은 이상하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미처 보기도 전에 그것을 구별할 줄 알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거기에는 영화를 보러 가기 전에 영화를 향해서 내가 거기서 무엇을 바라는가, 라고 질문을 던질 때 이미 그 질문에 선행해서 그 영화가 내게 무엇을 보기 바라는가, 라고 대답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 질문을 앞지른 대답은 알고 있어서가 아니라 무엇을 감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던진 질문의 사실상의 실제 내용은 그것을 보기 위해 찾아온 영화(관객의 ‘誤記’가 아니다)와 찾아오기를 바라는 것을 알고 있는 영화를 지목한 사람들 사이의 역설을 이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반대로 이미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 속에 감추어진 그 무엇을 의심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의심을 긍정하고, 그것에 대해서 창조적으로 (김소영의 표현을 빌리면) 협상해야 한다는 뜻이다. 나는 이 문제를 인터넷 독자들의 도착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상 핵심을 피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터넷에 쓰여진 소설이기는 하지만, 그리고 그것을 열렬하게 네티즌들이 읽기는 했지만, 그렇게 말하는 것만으로 이 질문이 대답되어진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대답을 피하기 위해서 다른 질문을 만들어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모든 문제를 말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법이다. 그것이 세상의 이해에 대해 우리에게 주어진 법이다.

두 번째 ‘언-밸런스’ 테제. 은성은 결국 백마를 타고 왔을까, 혹은 싸가지 불가능하게-되기란 정말 무엇인가? (하지만) 나는 진심으로 귀여니의 소설을 읽으면서 내가 알지 못하는 세상이 있음을 인정했다. 그건 문학적으로 의미있다는 미학적 판단이 아니라(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런 판단은 내 몫이 아니다), 나와 함께 살고 있는 또 다른 지구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나는 귀여니의 홈페이지에도 회원으로 가입하였다). 그러나 미리 앞질러 말하자면 인터넷 소설을 영화로 만드는 순간, 그 영화들은 예외없이 ‘존나 싸가지 없는’ 영화들이 될 운명을 맞이할 것이다(혹은 이미 그렇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이 이야기들은 피와 살을 얻으면 안 된다. 그래서 삶을 얻으면 안 된다. 거기 그렇게 머물러야만 한다. 인터넷 화면을 넘어서, (<링>의 사다코처럼 우물에서 기어올라오듯이) 슬금슬금 바깥으로 기어나올 때 정신병자가 될 것이다. 그냥 거기 있어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끌어내려고 애를 쓴다. 그 이유는 대부분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그것으로 돈을 벌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쉽게 아이들의 용돈을 훔치려고 한다. 하지만 나는 그런 모든 시도가 실패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언어 장애 - 즐거운 착란적 은유의 놀이

내가 생각하기에 이 소설들이 주는 가장 강력한 힘은 이야기가 아니라 그 언어 장애에 있다. 그것은 정상적으로, 문학적으로, 제도적으로 생활세계 안에서, 의도하는 바를 전달하는 것을 실패하기를 목표로 한 글쓰기이다. 저 수많은 비문들, 암호와도 같은 이모티콘, 혹은 기호들 대사와 지문이 서로 얽혀들고, 끝내는 누가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지경이 되어버리는 말꼬리들. 귀여니는, 혹은 이햇님은, 그 실패 안에 자기의 자리를 잡는 데 (네티즌들과의 은밀한 공감대를 끌어내어) 성공한 것이다. 그러니까 그 실패를 담보로 한 성공은 그 모든 이야기가 사실상 담론 전체의 기괴한 질서에 스스로를 내맡기는 그 종속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보고 싶어 죽을 것만 같다, 고 말하는 대신에 보고 싶어 돼져버리겠다, 라고 여학생이 태연자약하게 말할 때, 거기서 소녀들은 소년이 되고 싶어하고(혹은 그 역), 그렇게 함으로써 신체적 이탈을 통해 다른 몸의 언어에 안전하게 안착하는 데 성공한다. 거기에는 되고 싶다는 강렬한 의지가 있다. 그것은 덧쓰여지기를 간절하게 소망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덫에 걸리기를 원하는 위험한 원망이기도 하다.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사실상 자기에게 떠넘겨진 사회적 요구에 대한 언어적 산산조각이다.

그러나 그 말을 정말로 말할 때, 그것이 영화로 만들어지기 위해서 천연덕스럽게 김하늘의 입술에서, 혹은 하지원의 혀에서 불려올 때, 그래서 35m 아리프렉스 카메라 앞에서 돌비 디지털로 녹음되어 그것을 들어야 하는 것은 정말 ‘닭살’스러운 일이다. 그건 그녀들의 잘못이 아니다. 그건 누가 해도 마찬가지이다. 그 필연적 실패. 그러니까 아무리 그것을 옮기려 해도 불가능해지는 그 실패에 이 새로운 이야기의 모습이 주는 저항의 힘이 있다. 이 ‘뻔한’ 이야기의 환상을 만들어내는 담론의 강조점은 환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환상을 교란시키는 단어들의 고리들에 있는 것이다. 그 단어들은 말하여지면서 계속해서 잘못된 관계를 찾아간다. 그 단어들은 그 말을 가르쳐준 부모와, 학교와, 혹은 그에 유사한 권위에 기대어 동의를 구하려 하지 않는다. 아니, 차라리 그들을 버리고 자기와 비슷하게 설정된, 그 환상의 구멍 안에서, 자기에게 스스로 빗금을 부여한 채 자기보다 크거나 혹은 작은 탈락한 대상 앞에 가서, 말 그대로 언제까지라도 만날 길 없는 (<그놈은 멋있었다>의 한예원의 애인인) 꽃미남 지은성의 자리에 가서 그 단어를 말해본다. 그 연애는 세상에 대해서 네, 라고 말하기 위해서 아니오, 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오직 그렇게 할 때만 그 연애의 불가능한 빗금을 치워버릴 수 있는 것이다. 더 정확하게 이 이야기들의 공통점은 자문자답이라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이미 던져진 계약을 깨는 것이며, 그 깨어진 세계에서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려는 상상적 의지이다. 그러나 이 언어적 산산조각 안에서 교란을 불러일으키는 단어의 범람들이 불현듯 영화 안으로 들어가 몸을 얻을 때 그것은 갑자기 실재와 맞대면하는 것이다. 단어를 통해서 그렇게 지연시키고 맞부딪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그 노력을 무력화시키면서 단숨에 몸 안으로 덧쓰여질 때 갑자기 그 말들은 어리둥절해질 것이다. 말 그대로 즐거운 착란적 은유의 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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