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그 영화(들)의 관객 연놈들은 멋있었다! [3]
2004-01-16
글 : 정성일 (영화평론가)

“달아나는 존재들”이 던지는 병 속의 편지

세 번째 테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아픔을 얻기 위해서 은유를 포기하지 마라.

들뢰즈-가타리는 프루스트를 빌려서 질문한다. 소녀란 무엇인가? 소녀들의 집단이란 무엇인가? (중략) 대답은 간단하다. “달아나는 존재들”(<자본주의와 분열증> 두 번째 권) 거기에는 무언가 피하려는 완강한 의지가 있다. 사실상 한국영화가, 혹은 한국영화에 도착한이 새로운 관객이, 껴안으려는 것은, 껴안아야 할 것은 그 의지이다. 이 언어장애의 환상이 불러일으키는 것은 증후-기호라는 의지이다. 그런데 그 기호를 쓰는 사람은 귀여니이지만, 그 기호를 읽는 사람은 당신이지만, 귀여니를 쓰는 것은, 당신을 읽는 것은 증후이다. 그러므로 (내 생각에) 그 이야기 자체가 (문학적으로) 의미는 없을지 모르지만, 그 이야기가 (우리의 시대라는) 의미를 생산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혹은 (우리의 시대라는) 의미에 한계를 부여하는 메시지일 것이다. 대부분의 소설이 자기를 위해 쓰는 것이라면, 귀여니와 그녀의 인터넷 친구들이 쓰는 이야기는 거기 있을 당신을 위해서, 당신을 즐겁게 만들기 위해서, 그 언어장애를 뛰어넘어서 다가올 수 있는 당신을 위해서 쓴 것이다. 그것이 언어장애를 자초하는 방해의 이유일 것이다. 그것은 그 어딘가에 있을 친구를 부르는 애원이며, 인터넷의 바다에 던져진 병에 든 편지이다. 그 편지는 누구나 읽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거기 쓰여져 있는 언어를 확신하는 친구만이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친구의 자리에서 쓰여진 글이다.

거기에 영화가 뛰어들어가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겨우 버티고 있는 가냘픈 환상에 외상적 충격을 가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단어를 말하는 자에게, 그 단어가 날아가 꽂히는 대상에게, 결국 분리를 요구할 때 그 안에서 사라지는 것은 역설적으로 환상이며,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은 불안이다. 영화가 그 대상을 너무 생생하게 들이댈 때, 너무 가까이 다가올 때, 귀여니는, 귀여니의 독자들은 소설의 영화를 보면서 귀여니를 잃을 것이다. 그건 필연이다. 가까스로 자기가 찾은 대상을 빼앗길 때, 귀여니는 더이상 거기 있을 기반을 잃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공유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만일 그것을 억지로 공유하려들 때 그것은 일종의 난교 섹스파티와 비슷한 것이 될 것이다. 나는 하고 있는데 누구와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지경에 빠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억지로 외면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이미 그것은 도착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남은 방법은 누가 누구를 베끼거나, 훔치거나, 안 주겠다고 버티거나, 달라고 조르는 대신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불가능하게 거기에 있음을 인정하는 것뿐이다. 우리는 여기에 함부로 구체적인 사회적 의미망을 설정하고 그 안에서 소년, 소녀들을 이해하기 위한 반성적 성찰을 끌어내야 한다는 계몽주의적 환원으로 끌고 들어가면 안 된다. 그러면 정말 귀여니는 괴물이 될 것이다. 그 반대로 필연적 실패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즐기는 것이 중요하다. 인터넷 모니터가 환상의 출현과 뒤집힌 질서로 남아서 여전히 비밀을 감추려들 때, 그것의 거울에 비친 영화의 스크린은 그것을 어떻게 들춰낼지에 몰두하는 대신 어디까지 들춰낼지를 고민해야 한다. 그래서 그 둘 사이에 있을 수밖에 없는 거리를 받아들여야 한다. 핵심은 그 거리에 자의식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것만이 모니터의 독자와 스크린의 관객 사이의 새로운 거리를 창조할 것이기 때문이다. 혹은 독자와 관객 사이에서 있을 수도 있는 이중적인 태도에 대해서 선택을 강요하지 않는 방법이다. 어쩌면 그 둘 사이에 남아 있게 될 그 거리 사이의 공간은 영원히 남겨진 빈칸이 될 것이다. 그 빈칸에 무언가 써넣으려 할 때 그것은 폭력적인 시도가 될 것이다. 그 과잉을 해결하려는 대신 질문을 남겨놓고, 질문으로 그것을 채우면 된다. 그것이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방법이다. 그 어떤 방법을 동원하더라도 그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상상적 공동체를 만들어내서 말 그대로 상상적 통일을 이루는 것은 차라리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소통은 실패할 것이다, 거리를 즐겨라. 그러므로 귀여니가 행복하냐는 질문에 대한 자문자답에 불행하다라고 대답한 것을 나는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 사이에서 벌어진 언어적 순환에 대해서 자꾸만 그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을 방해하고 가로막으려는 간섭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 간섭이 그 사랑을 불완전하게 만들고, 자꾸만 그 언어장애를 이해하려들면서 더 많은 장애를 만들어내는 것은 결국 귀여니의 세계를 부수는 것이다. 영화는 그 안에 들어가서 귀여니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얻어내려고 한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사랑은 점점 더 비루한 것이 되어가고, 사랑은 현실 속의 모순을 마주해야만 하고 얻고자 했던 사랑은 버려야 할 거짓을 토해야 하는 자리가 되어간다. 그것은 결국 신데렐라도 화장실에 간다는 사실을 직면하는 것이며, 백설공주도 생리를 한다는 사실을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귀여니의 세계를 철저하게 그려내면 그려낼수록, 그 세계는 매우 폭력적이고도 음란한 현실에 점점 더 가까워질 것이다. 같은 이야기를 반복할 때, 그 반복 속에서 그것이 원래 이루어진 자리를 버릴 때, 그 안에서 우리가 보아야 하는 것은 악순환이다. 한국영화는 그 악순환의 역할을 피해야만 한다. 그것이 사실상 한국영화에 도착한 새로운 관객의 욕망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물어볼 수 있다. 당신들은 영화에서 무엇을 보기를 바라십니까? 아니, 차라리 (같은 말이지만) 무엇을 바라고 있다고 생각하는 당신이 정말 바라는 것은 그것이 거기 없기를 바라는 것은 아닙니까? 영화는 그것을 보고자 하는 사람을 만족시키면 안 된다. 그때 귀여니의 세상은 비탄과 추악함에 빠질 것이다. 그냥 그렇게 보는 사람을 불만족스럽게 내버려두어야 한다. 그래서 그 연애의 비참함을 마주 볼 수 없도록, 그 욕구 불만의 상태에서 여전히 환상 속을 헤매도록 버려 두어야 한다. 바로 여기에 새로운 한국영화 관객의 ‘새로운’ 욕망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대상이 결국에는 원인이라는 것은 그 연애의 멋있는 유일한 진실이다. 그러므로 그 사랑하는 남자, 그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가정된 독자들, 그래서 그 편지를 받아본 수신자들을 스크린 앞에 불러왔을 때, 감히 그 상자를 열어보이면 안 된다. 단지 그것에 대해서는 은유적으로만 말해야 한다. 그러니 귀여니의 슬픔에 동감하기 위해서라면 은유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새로운 욕망에 보내는 내 방식의 응원이다. 정말 그녀의 욕망은 멋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귀여니가 빨리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함께 세상을 살아가는 19살 소녀의 삶이 행복해져야 비로소 내 삶도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다. 그게 당연한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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