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한 말이지만, 좋은 시나리오는 좋은 영화의 필수 요소다. 영화의 뼈대이자 토대라 할 수 있는 시나리오가 탄탄하기만 하면 캐스팅이나 연출력, 자본 등 다른 요소의 장애를 어느 정도 뛰어넘을 수 있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시나리오를 쓰는 일은 만만치 않다. 시나리오 작업은 가장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이며, 가장 힘이 많이 드는 일일지도 모른다. 시각장애 여성과 버스 운전기사의 풋풋한 사랑 이야기 <안녕! 유에프오>(감독 김진민)의 경우도 다르지 않았다. 1996년 12월 단편 옴니버스 시나리오에서 출발해 2004년 마침내 영상으로 옮겨지기까지 8년 동안 작가들의 피를 말리고 애간장을 태웠으며, 사소한 기쁨과 무한한 좌절을 맛보게 했던, 이 예사롭지 않은 제목의 <안녕! 유에프오> 시나리오의 ‘제작’ 과정을 이해영, 이해준, 김지혜, 세 작가의 시점으로 만나본다.
1996년 12월
이해영_ 8월의 <투캅스3> 시나리오 공모전에서 보기좋게 낙방했다. 그렇다고 너무 기죽진 말자. 아이디어는 샘솟고 의욕은 넘친다. 게다가 요즘 쓰는 단편 옴니버스영화의 시놉시스는 왠지 느낌이 좋지 않은가.
이해준_ 〈365번째 날>이라…. 괜찮다. 12월23일부터 31일까지 8일 동안 세 커플이 얽힌다. UFO를 믿는 남녀가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는 에피소드나 버스 운전사와 창녀가 얽히는 두 번째 에피소드 등 재밌을 것 같다. 이제 영화사와 접촉하는 일만 남았다. 흐흐.
1997년 4월
이해준_ 충무로에 전혀 연줄이 없어 어디에 고개를 들이밀지 고민하다가 몇년 전 인사를 한 적 있는 기획 홍보사 래핑보아를 주먹구구식으로 찾았다. 이곳 대표의 친구라는 김승준 감독님이 관심있게 보는 눈치다. 그럼, 어떻게 쓴 시나리오인데….
이해영_ 엥? 아무리 시놉시스지만, “크리스마스 이브, 함박눈이 쏟아지는 서울의 밤거리. 재회의 포옹을 하고 있는 두 남녀. 그들의 머리 위를 날아가는, 거대한 UFO 편대…”라는 마지막 장면의 두줄에만 관심을 갖다니…. 그래도 이 두줄을 바탕으로 장편을 써보지 않겠냐고 한다. 드디어 기회가 온 거다.
1997년 6월
이해준_ 〈365번째 날>의 세편 중 UFO와 버스 운전사 이야기를 합쳐 장편을 구성하고 있다. UFO에 대해 다시 고민 중이다. UFO란 게 ‘미확인 비행물체’ 아닌가. 그러니까 정확히 모른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사람에 따라 다 다르게 보일 수 있을 거다. UFO를 보면서 여러 사람이 각자 다른 꿈을 꿀 수도 있지 않을까.
이해영_ 서울 외곽 지역의 좁은 골목을 떠올려보자. 직각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면 전선도 얽혀 있고 다닥다닥 붙은 지붕 사이로 좁은 하늘이 보일 거다. 그 하늘에서 눈이 내리는데 굉장히 큰 UFO가 지나가는 거다. 생활고에 찌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도 사치로 느낄 그런 사람들에게 UFO는 크리스마스 선물 같은 의미가 아닐까. 게다가 우울한 세기말이 다가오는데.
1997년 7월
이해준_ 래핑보아를 드나들던 김대우 작가(<정사> <반칙왕>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가 시나리오를 보곤, “2∼3신을 제외하곤 쓸 게 하나도 없다”고 혹평했다. 이야기에 기승전결도 없고, 왜 UFO인지 모르겠다는 거다. 충격, 실망, 우울.
1998년 1월
이해영_ 7개월째다. 7번째 버전까지 만들고 탈진에 가까운 상황에 또다시 우울한 소식이 들려온다. 래핑보아가 더이상 작품을 진행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먹고사는 문제를 고민해야 할 때다.
1998년 5월
이해준_ 전에 운영하던 안암동의 커피숍으로 돌아갔다. 해영은 이스트필름 기획실로 들어갔다. 일보전진을 위한 이보후퇴인가.
이해영_ 이스트필름에서 가족코미디를 준비하는 조감독 김진민 형을 만났다. 인간적이고 잘 맞는다. 술도 많이 먹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1998년 추석
이해영_ “너무 재밌다.” 처음엔 귀를 의심했지만, 분명 칭찬이다. 귀성차 부산에 내려가는 김진민 감독이 “심심풀이 읽을 거리를 달라”고 해 〈UFO를 기다리며> 시나리오를 줬는데, 뜻밖에 좋은 반응이 돌아왔다. 그런데 코미디 프로젝트가 엎어졌고, 김진민 감독은 송능한 감독의 <세기말> 조감독으로 들어간단다.
1999년 5월
이해준_ UFO여, 안녕. 해영과 공동작업했던 <신라의 달밤>이 영화사 봄의 눈에 띄었다. 작가 계약서라는 것을 난생처음 썼다. 으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