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이해영_ <신라의 달밤>이 제작사를 옮겨 좋은영화로 갔다. 이후 맡은 멜로영화 <피아노> 각색은 뭔가 잘 안 됐지만, 김지운 감독의 <커밍아웃> 시나리오를 각색했다. 한석규가 출연할 뻔하던 〈11월의 비>, 임필성 감독의 <남극일기> 등의 각색도 맡았다. 허허. 이제 우린 잘 나가게 된 거다. 그런데 김진민 감독은 임상수 감독의 <눈물> 조감독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2000년 연말
이해준_ 싸이더스의 김무령 프로듀서가 와인파티를 연다면서 홍대 앞의 한 바로 해영과 나를 초대했다. 유난히 어두웠던 그곳엔 영화계 사람들이 득시글거렸다. 아, 명함이라도 챙겨왔어야 하는데, 하며 후회하는 와중 임필성 감독이 손목을 잡아끈다. “저기, 저쪽 테이블에….” 그가 가리킨 곳에 미모의 여인이 앉아 있다. <인디안 썸머>라는 영화의 시나리오를 썼다는 김지혜라는 이름의 시나리오 작가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깊은 인상을 갖게 됐다.
2001년 4월
이해영_ 김진민 감독이 데뷔를 준비하면서 〈UFO를 기다리며>를 거론했다. 이미 3년 전에 우리가 쓴 시나리오를 충무로에 돌렸단다. 이런이런. 그렇게 밖에 내돌리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건만. 이제 우리는 잘 나가는 작가인데 주가라도 떨어지는 것 아닌지 몰라. 그런데 싸이더스의 김재원 프로듀서란 분이 좋아했다는 거다. 게다가 “한번 써봐라”고 이야기까지 했단다.
2001년 6월
이해준_ 〈UFO를 기다리며>를 본격적으로 수정하기 시작했다. 회의를 거듭했지만, 3년 하고도 5개월 전과 똑같은 장벽에 부딪힌다. 왜 UFO인가, 그리고 기승전결은 왜 이리 부실해 보이나. 또다시 들춰보니 왜 그리 낯뜨거운지. 대사며 이야기톤이며 왜 이리 달짝지근할까. 설탕 바른 멜로처럼. 게다가 주인공들 사이에 절실함 같은 것도 찾아볼 수 없다. 그때 상당한 미인으로 ‘기억되는’ 김지혜 작가가 떠올랐다.
김지혜_ 이해영, 이해준 작가, 그리고 김진민 감독을 만났다. 시나리오를 받아보니 희한한 점이 있었다. <인디안 썸머> 전에 내가 썼던 시나리오와 비슷한 점이 많은 거다. 내 시나리오에서 주인공은 스스로 외계인이라고 생각하는 인물이고, 조용필 노래가 나온다는 점도 같다. 그리고 세명을 만나기 전날, 김무령 PD에게서 “네가 하면 잘할 것 같다”는 이야기도 들었던 터다. 아주 흔쾌히 승낙했다. 그런데 두 작가의 표정이 이상하다. 왜 그럴까?
이해영_ 김지혜 작가를 만나는 순간, 2000년 말의 그 바의 조명이 매우 어두웠다는 게 기억났다. 그리고 꽤 취했었다는 사실도…. 험험.
2001년 7월
김지혜_ 내가 미쳤지. 두 작가가 하도 힘들어 하기에, “그렇게 괴롭다면 내가 해볼게요” 하고 덥석 집어오긴 했는데, 왜 그랬을까 싶다. 게다가 “2주 만에 끝내겠다”는 말은 왜 했을까. 그나마 여주인공을 시각장애인으로 설정한 건 다행이다. 그런데 두 작가는 <품행제로>라는 프로젝트도 함께한다는데, 혹시 내게만 이 책임을 떠넘긴 건 아니겠지.
2001년 8월 14일
김지혜_ 가제를 〈UFO〉로 바꾼 이 시나리오에서 완성된 것은 62신뿐. 나머지는 트리트먼트 상태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두 작가와 감독에게 원고를 도로 넘겼다. 다시는 “2주 만에 끝내겠다” 따위의 객기는 부리지 않으리라.
이해영_ 그때 그 술집이 어두웠던 것은 여전히 유감이지만, 역시 김 작가를 만나기 잘했다. 우리가 고민했던 문제들을 거의 해결해줬다. 경우라는 여주인공은 장애인이지만, 보통 사람과 다름없이 씩씩하고 쿨하다. 버스기사도 풋풋하고 귀여운 인물로 다시 태어났다. ‘설탕’도 많이 제거됐고, 주인공들의 절실함도 살아나는 것 같다. 이제 시나리오로서 제대로 틀을 갖춘 것 같다. 배경도 구파발로 확정했다. 김 작가네 집이 연신내라고 했지? 그래서 잘 아는 것 같다. 역시….
2001년 8월 15일
김지혜_ 휴, 다행이다. 시나리오를 써놓고 구파발이 번화한 곳이면 어쩌나, 걱정이 돼서 가봤더랬다. 그래도 아직은 사람같이 사는, 따스한 정이 느껴지는 그런 곳이었다. UFO 동호회에 가입하기도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나리오에 쓴 ‘다섯개의 원이 흩어졌다 모였다 하는’ UFO는 실제로 북한산 인근에서 목격된 사례인데, 동네 분위기와도 잘 맞는 것 같았다.
2001년 12월
이해영_ 김 작가로부터 넘겨받은 지 어언 4개월이 지났지만 진전이 없다. 고작 40신만 덧붙였을 뿐이다. 중대결단을 내렸다. 김진민 감독이 사는 화양리로 찾아가 맥주를 사주며 어려운 말을 꺼냈다. “저… 그러니까… 이거 도저히 안 되겠어요. 포기해야겠어요.” 그 사이에 너무 힘들었던 건지 김지운 감독의 <메모리즈>에서 또 조감독을 했던 김진민 감독, 고민하는 모습이다. 참 답답하겠다. 작가가 세명씩이나 있는데 뭐 제대로 나오는 게 없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