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해체에 나선 남성감독들, 장도에 오른 여성감독들 [1]
2004-01-30
글 : 김소영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김소영 교수, <올드보이> <지구를 지켜라!> 의 거센 숨결을 듣다

2003년 한국영화를 진단하는 연속기획, 이번주에는 김소영 교수가 바톤을 건네 받았다. <동갑내기 과외하기>와 인터넷 소설을 통해 새롭게 등장한 관객의 문제를 사유했던 영화평론가 정성일(<씨네21 436호 참조)에 이어 김소영 교수는 <올드보이> <지구를 지켜라!> <그 집 앞> 등의 문제작들이 이룬 비상한 성취와 한계를 명료하고 유려한 시각으로 분석했다.

<올드보이> - 당신의 꿈은 복제된 것이다

2003년의 경향, <올드보이>와 <지구를 지켜라!>로부터 시작하자. 코드명: 나는 네가 꾸는 꿈 혹은 너는 내가 꾸는 꿈!

<올드보이>에는 의미화 과정을 붕괴시키는 전략들이 있다. 서사적 시퀀스, 비주얼을 끊임없이 자체 훼손시켜, 방금 단단해지려고 했던 영화의 진정성, 숭고함 내지 그럴듯함을 해체시키는 것이다. 대수(최민식)가 내뱉는 문어체 말투, 때아닌 농담, 벽지와 머리모양, 감금된 건물 복도에서의 전자게임 같은 액션 시퀀스 등이 보여주는 과잉 스타일. 돌연히 끼어드는 환상과 망상(지하철에서 미도(강혜정)는 큰 개미를 보고 대수는 팔에서 기어나오는 그것을 본다). 이렇게, ‘모든 단단한 것이 산화되어 대기 속에 녹아드는’ 그것을 다시 조물해내는 영화적 전략이 가리키는 것은 두말할 필요없이 재현의 권위에 대한 불신이며 조롱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생각의 방식이다. 모든 것을 대충 수습하며 기껏해야 하루를 시간의 단위로 살던 대수는 15년을 영문 모른 채 감금당한 뒤 마침내 쇠젓가락으로 판 탈출구를 만든다. 바로 그 순간 마술사 보조가 들어갈 것 같은 상자에 담겨 다시 외부로 풀려나온다. 또한 가까스로 과거의 수수께끼를 풀었다고 생각하는 그 ‘영웅적‘ 순간, 자신의 감금자인 우진(유지태)에게 ‘재미없다’라는 평가를 받는다(영화평론으로 치자면 별표 1개, 혹은 Thumbs down- 돼먹지 않았어! ). 또한 대수는 우진에게 질문의 방식을 바꾸라는 충고까지 듣는다. 즉, 왜 15년간을 감금했는가보다는 왜 15년 만에 풀어주었는가? 결국 대수는 자신이 자유의지로 쓰고 해결했다고 생각한 부분마저 우진이 쓴 시나리오였음을 알게 된다. 우진의 복수극은 대수로 하여금 자신과 유사한 트라우마를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우진이 연출한 드라마에 한번도 아닌 두번, 세번씩 꼼짝없이 걸려들었음을 알아채는 순간, 대수는 혀를 자르고 말 그대로 주인에게 꼬리치는 개가 된다. 자유의지 자체가 무위함은 물론, 하위 인간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대수의 15년의 생활은 우진이 꾸는 복수의 판타지를 그대로 실현하는 것이다. 박찬욱 감독의 1992년 전작의 제목 ‘달은 해가 꾸는 꿈’을 빌려 말하자면 “나는 네가 꾸는 꿈, 너는 내가 꾸는 꿈”이다. 그 자기결정성 없는 비주체화 혹은 비천한 하위주체로의 주체화 과정의 확인, 악몽 중의 악몽인 것이다.

영화는 물론 잘 알려진 것처럼, 일본의 원작만화를 바탕화면으로 사용하고 있지만, 아버지와 딸 사이에 대한 근친상간에 대한 한국의 전설을 연상시킨다. 아버지가 딸을 탐하자 딸은 아버지에게 인두겁(뜻풀이- 사람의 탈이나 겉모양)을 쓰고는 차마 하지 못할 일이니 소의 껍질을 쓰고 음매 음매 소 울음소리를 내며 산을 기어오르라고 한다. 아버지는 딸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시나리오를 그대로 행동으로 옮겨 산을 기어오른다. 딸은 절벽을 뛰어내리고 아버지는 소로 변한다. <올드보이>에선 아버지 대수로 하여금 개처럼 땅을 기며, 꼬리를 흔들게 한다. 오이디푸스건, 인두겁에서 소로 변한 아버지건 <올드보이>는 신화적 판타지 근친상간을 우리 모두가 문명의 억압 때문에 꾸게 되는 꿈, 즉 오히려 권력이 우리에게 명령해 꾸는 꿈으로 보여준다. 피식민자는 식민자의 꿈을 복제하고 반복하는 것이다. 대수는 우진과 그 누나와의 근친상간 관계를 자신의 딸과의 관계에서 복제하고 반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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