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해체에 나선 남성감독들, 장도에 오른 여성감독들 [2]
2004-01-30
글 : 김소영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지구를 지켜라!> - 우주를 끌어들여 남한 현대사를 폭파하다

이제 <지구를 지켜라!>를 보자. 이 영화에서 병구(신하균)는 안드로메다 외계인으로부터 지구를 지키지 못하면, 지구가 멸망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극중 인물 병구의 이러한 믿음에 처음부터 공유, 공감할 관객은 물론 아무도 없다. 병구의 가공할 고문도구, 신신 물파스 하며 그의 정신병력 경력, 심지어 병구의 젤소미나(극중 이름 순이)도 병구를 믿지 않고 떠나는 마당에야. 영화는 스릴러, 코미디, 순이 주연의 멜로드라마, 게다가 다큐멘터리풍의 장면들까지 동원해 홀로 지구수비대를 자청한 병구의 이야기를 한편으로는 한국 근대사의 열악한 노동조건과 교육의 희생자라는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이해하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바로 그것으로 기인한 광증으로 환원하게 한다. 이 영화는 다른 영화들처럼 관객이 영화적 개연성을 받아들여, 불신을 유예시킴으로써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에 대한 불신의 지속이 영화를 연속하게 한다. 그러나 악덕기업주 강 사장이 실제 안드로메다인 꾸오아아떼꾹임이 밝혀지며 지구폭발이 일어나는 마지막 순간, 관객은 지구의 인간을 뛰어넘는 창조자 강 사장/외계인의 의지가 지구문명의 시작이요, 끝임을 알게 된다.

관객이 병구의 말을 믿었건 믿지 않았건, 영화의 결말은 인간의 의지와는 상관없다. 예의 병구의 개인적 고통, 말하자면 광산 사고로 죽은 아버지, 노동쟁의 중 맞아죽은 여자친구, 화학공장에서 일하다 꾸오아아떼꾹에 의해 유전자 실험을 당하고 식물인간이 된 어머니, 이 모든 비극도 지구인 병구의 전면적 저항의 힘이 되지 못한다. 지구의 완전한 파국을 맞지 못하는 것이다. 영화 형식상으로 보면, <올드보이>와 마찬가지로 이 비극적 에피소드들은 어처구니없는 상황 코미디 속에 기회를 타, 함부로 들어가버린다(‘틈입’이라고 하지요- 뜻풀이1). 말하자면 이렇게 진지하고 엄숙하게 뜻풀이를 하며 쓰는 순간, 난 사실 <지구를 지켜라!>의 파안대소(즐거운 표정으로 한바탕 크게 웃는다는 의미지요- 뜻풀이2)는 아니지만, 웃을 때와 유사하게 근육을 찌그러트리게 하는 다사다난(여러 가지로 일도 많고 어려움도 많음- 뜻풀이3)한 유머를 전달하지 못하고 있다. 영화를 말로 풀어내야 하는 평론의 운명이란(그래서 평론가 정성일과 김소영은 무지 영화를 만들고 싶어하나보다). 아뿔싸! 꾸오아아떼꾹, 뻐꾹쩌꾹!(뜻풀이 못함)

평론가의 고통은 사실 아무도 관심이 없으니 일단 접어두고, 지구 문명이 외계인의 어처구니없는 목표 설정에 의해 시작된다는 플롯은 사실 커트 보네거트의 유명한 1959년 소설, <타이탄의 사이렌>에 의해 사려 깊게 제기되었다. 빛나는 경구 같은 문장으로 가득 찬 이 소설은 지구의 모든 문명은 살로라는 드라파마도리안 외계인의 우주선에 부품을 전달하기 위해 건설되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즉 살로에게 그 부품을 전달하게 위해 우주공학을 꽃피울 요량으로 인간은 수학과 물리와 철학을 하고 근대화, 산업화를 감행해 공장을 돌린 것이다. 2차 세계대전시 작가의 참전 경험이 모태가 된 이 소설은 그러나 견딜 수 없는 패배론적 회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만심에 대한 경고로 끝난다. 즉 어떻게 우주의 목적에 부합할 수 있을 것인가를 걱정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인간 서로에게 친절하게 대할 것인가를 걱정하라는 것이다. 즉 우주, 그 외부로 탐사를 떠날 것이 아니라 내부의 외부, 그 타자성을 보라는 것이다.

내부의 타자성을 보라

내가 <지구를 지켜라!>에 대해 약간 유보적 입장을 갖는 이유는 그 우주적인 막다른 골목에서의 재앙, 지구파괴가 우주적 규모의 역설로 보이기보다는, 사유의 한계로 보이기 때문이다. 각종 장르적 장치와 한국 현대사, 가족사의 구체성, 그리고 외계의 개입까지 동원해 재현의 한계까지 밀어붙인 것은 물론 감탄할 만하다. 그러나 그것을 되감아 내부의 외부성을 탐사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를 상정해 내부를 폭파하는 것은 용감무쌍하긴 하나 윤리적 사유는 아니다. 그야말로 사유의 막다른 골목, 일방통행로인 것이다. 파국이 파멸로 전화되지 않게 하기 위해선 그 파국이 전환의 계기가 되어야 한다.

<올드보이>에서 드러나는 자기의지를 삭제해가는 정교한 함정, 나는 결국 네가 꾸는 꿈 혹은 네가 명령하는 것을 자기의지로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것, 또 그 안에서 인간은 신화적 원형을 반복한다는 것. 그리고 <지구를 지켜라!>에서 외계인에 의해 결정되는 지구와 지구인의 운명. 이 두 영화 모두 재현적 공간 위에서 보면 매우 절절한 남한의 역사와 현재, 그 구체성을 담고 있지만 크게 보면 <매트릭스>식의 사고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잘 알려진 영화지만 두 영화와의 비교를 위해 다시 도입하자면, 매트릭스는 인간을 살아 있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컴퓨터 프로그램이다. 말하자면 인간이 태양을 파괴했기 때문에 기계는 태양에너지 대신 인간의 몸에서 에너지를 취하는데, 문제는 인간농장의 액체 속에 잠겨 있는 인간은 진짜 같은 가상현실이라도 주지 않으면 금방 목숨을 잃기 때문에 에너지로서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뒷머리에 14cm가 조금 넘는 튜브를 끼워 매트릭스와 연결시킨다. 매트릭스는 거대한 컴퓨터 프로그램의 시각적인 재현인데, 이것이 너무 리얼하여 인간은 삶을 지속하며, 기계에 에너지를 공급하게 된다. 매트릭스에 저항하는 인간들은 바이러스들이다. 그리고 바로 그 저항의 드라마의 영구회귀가 매트릭스에 좀더 안정적인 에너지를 제공하는 것이다. <올드보이>에서 대수를 15년간 죽지 않고 견디게 하는 것은 복수에의 의지다. 그러나 실은 대수의 생존은 우진의 존재를 위한 것이다. <지구를 지켜라!>에서 병구 역시 복수혈전에 불탄다. 그러나 병구만이 아니라 인간과 지구 자체의 운명이 외계인의 손끝 하나에 달려 있다. 저항에 불타는 자유의지가 있을 수는 있으나, 우주라는 더 큰 프로그램을 움직이는 외계인을 당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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