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해체에 나선 남성감독들, 장도에 오른 여성감독들 [3]
2004-01-30
글 : 김소영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해체, 그 다음이 필요하다

자, 이제 내가 말하려는 것이 무엇일까? 한국영화의 2003년의 경향에 대해 패배주의적 진단을 하려는 것일까? 아니면 전 지구적 동시적 사유, 포스트 휴먼적 경향에 대해 말하려는 것인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아니, 아닌 것에 더 가깝게 쓰려고 한다. 한국영화의 경향은 분명 그 특수성을 가지고 있지만, 세계 영화사가 축적해온 그리고 동시다발적으로 펼치고 있는 관행, 장르, 양식, 그리고 사고의 진행방향과 비동시적 동시성을 가지고 있다. 한국영화 점유율이 50%가 넘었다고 해서 우리가 사실은 “순수한” 한국영화를 보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한국적”으로 사고하게 되는 것도 아니다. 앞서 이야기했듯 피식민은 탈식민적 전화의 과정으로 틈입하지 않고서는 식민을 복제하고 재생산하면서 그것이 자신의 것, 자신의 성취라고 상상하기 때문이다. 세계사적으로 비서구, 비헤게모니 국가로서의 “한국적”인 영화 사유란 바로 이 사슬, 이 매듭을 단절시킬 때 혹은 왜 단절시킬 수 없는지를 재현하는 순간에 출현한다.

이렇게 한편으로 매트릭스적 사유에 포획되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남한사회의 지정학적, 역사적 구체성을 통해 이 두 영화들은 시공간적 구체성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 기계와 인간의 대립이라는 <매트릭스>의 초역사적 단순구도를 넘어선다. 특히 <지구를 지켜라!>의 더블 코딩화- 광산촌, 노동쟁의, 교육실태, 화학중독 등의 남한 현대사의 재앙을 다루면서 그 희생자를 외계인이 DNA 실험 대상으로 삼는 이중의 의미화 과정은 남한사회 현대사의 지역적 특수성을 감싸안는 것이다. 다만 파국을 파멸로 이끌지 않고, 그 파국을 인식과 삶의 전화의 계기로 삼는 ‘호랑이의 공중으로의 도약’과 같은 사유가 더 필요하다고 느낀다. 2003년 <올드보이>와 한국영화는 고정된 의미를 끊임없이 회의하며 그로부터 미끄러져나가고 자체 훼손시키고 붕괴시키는 해체적 영화 만들기의 장도에 올랐으나, 새로운 사회, 역사에 대한 비전과 자기 성찰에는 못 미친다.

나는 네가 꾸는 꿈이라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 그 매트릭스로 이어지는 14cm의 튜브를 발견하는 순간이 전복의 계기를 제공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그것이 계급투쟁이나 반제투쟁 그리고 여성운동, 신사회운동, 생태계운동을 불러일으킨 계기였다.

모성과 도시공간에 대한 극한의 정치학

2003년에는 <질투는 나의 힘>의 박찬옥 감독, 의 이수연 감독, <여고괴담 세 번째 이야기: 여우계단>의 윤재연 감독, <…ing> 의 이언희 감독, 그리고 극장 개봉은 아직 하지 않았지만 <미소>의 박경희 감독, <그 집 앞>의 김진아 감독 등 여성감독들이 많이 등장했다. 그러나 페미니즘적 시각으로 이들 감독들의 작품을 분석하는 시각은 아직 충분히 등장하지 않았다. 비평담론이 구성되지 않으면 작품들의 사후의 삶이 누릴 수 있는 생의 시간은 짧아질 수밖에 없다. 이중 은 특히 그에 걸맞은 충분한 주목을 받지 못했다.

<4인용 식탁>은 유아살해라는 극한의 상태를 아이 출산과 양육에 요구되는 모성과 동시적으로 출현하는 극심한 우울증, 가난에 의해 촉발된 양축에 놓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여자 연(전지현)과 남자 정원(박신양)이 보아야만 하는 세계를 다룬다. 무엇보다도 극한의 문제를 신중하고 다면적으로 처리해내는 것이 놀랍다. 그러나 특히 뛰어난 것은 아파트, 지하철을 비롯한 도시공간의 미로인 듯도 하고 폐허인 듯도 한 서로 관계되어 있으면서 철저히 고립된 주거공간들, 그 사이를 잇거나 끊어내는 길들을 한숏 안에서 그리고 컷과 컷의 연결 속에서 노련하게 재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냉담한 공간에서 무방비로 의식을 잃고 쓰러져버리는 연의 모습은 이루 형용 못할 안타까움을 자아낼 수도 있었다.

조용규의 촬영은 이수연 감독의 연출과 편집에 맞물려 일상의 공간들을 정확하고 섬뜩하게 잡아내며, 아파트의 외부에서 실내를 들여다보는 시점 시퀀스, 빗물처럼 떨어지는 사람들의 컬러 처리 등은 조금 오버되긴 했지만 매우 인상적이다. <4인용 식탁>은 도시공간의 정치학이라는 면에서 <캔디맨>에서 다루어지던 시카고라는 도시공간의 역사적 정치학, 아프리칸 아메리칸인들이 살고 있는 게토지역을 재개발하면서 벌어지는 부패와 그 공간에서 출몰하는 과거의 유령인 캔디맨을 상기시킨다. 또, 동시에 양더창의 <타이베이 스토리>에서 타이베이라는 현대 도시공간에서 평행적, 비평행적으로 일어나는 미스터리와 살인, 범죄, 불륜 등을 연상하게 한다. 에는 그러나 캔디맨의 온 도시를 불태울 것 같은 과거에서 현재를 견뎌온 증오와, <타이베이 스토리>의 대만 동시대를 분석적으로 진단하는 냉철함은 없다. 은 극한의 주제를 공간적 탐사와 재배치를 통해 정교하게 풀어내는 것에 비해 끝으로 갈수록 이상하리만큼 에너지가 약해진다. 연의 히스테리와 비전은 자신을 파괴하는 것으로 끝나버린다.

빛나면서 서툰 그녀들과 함께

김진아 감독의 <그 집 앞>은 가인과 도희라는 여자들의 엇갈리고 맞물린 삶의 조각들을 다룬다. 집 안에 갇혀 섭식 장애에 고통받는 가인, 그리고 아이를 임신한 채 미국의 집을 떠나 한국에 돌아온 길 위의 여자 도희에 대한 여성주의적 작품이다. 가인이 수영장에서 헤엄치는 장면을 편집에서 뒤집어 그녀의 가녀린 몸을, 은빛 생선처럼 포착한 장면이나 임신 중절 결정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주저하면서, 끊임없이 담배를 피우고 마스터베이션을 하는 도희의 몸을 롱테이크로 잡은 마지막은 김진아의 다음 작품에 기대를 갖게 만든다. 여성주의적 문제틀을 제시하고, 이리저리 얽혀 있는 여성의 욕망을 정면으로 마주한다는 의미에서 그녀는 진정으로 오랜만에 등장한 페미니스트 감독이다.

마지막으로 박경희 감독의 <미소>는 정말 미소 같은 영화다. 비상의 별처럼 빛나는 순간이 없는 것도 아니나, 그 비상은 약간의 상처를 남긴 채 일상으로 착륙한다. 카메라를 든 여주인공(추상미)이 경비행기를 타고 서툴게 하늘을 나는 장면은 참 좋다. 그리고 난파된 비행기 위에서 추위에 떨며 오지 않는 구조대를 기다리는 장면도 마음에 닿는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은빛 생선마냥 헤엄치거나, 길없는 길을 나서고, 서툴게 경비행기를 운전하는 그녀들과 함께 2003년을 떠나 2004년을 바라볼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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