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강제규의 대단한 혹은 대담한 도전, <태극기 휘날리며> [1]
2004-02-13
글 : 남동철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전쟁과 육박전을 펼친 전쟁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스펙터클과 멜로, 폭발하다

지금 한국영화는 죽은 자들의 세상이다. 유골로 남은, 아니 뼛조각조차 찾을 수 없는 역사의 흔적들이 원혼이 되어 스크린을 떠돌고 있다. 지난해 <살인의 추억>에 이어 최근 <실미도>가 그랬고 이제 <태극기 휘날리며> 차례다. 마침내 공개된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관객은 다시 과거의 유령과 만나야 한다. 1950년 한국전쟁, 동생을 살리기 위해 악마가 됐던 형의 귀환은 결코 추억이 될 수 없던 망각의 세월을 불러낸다. 살아남은 자의 죄의식을 간직한 사람이라면 흐르는 눈물을 어쩔 수 없는 슬픈 역사가 <태극기 휘날리며>라는 이름으로 지금 이 자리로 불려온 것이다.

감정적 폭풍을 불러일으키는 형제의 멜로드라마

실제로 <태극기 휘날리며>의 시사회장에는 눈이 빨개지도록 훌쩍이는 이들이 많았다. ‘한국영화 사상 처음 보는 초대형 전쟁액션영화’라는 간판을 내세우고 있지만 <태극기 휘날리며>의 정서적 핵을 이루는 것은 전쟁의 처연함이나 스펙터클의 쾌감이 아니다. 대신 <태극기 휘날리며>가 택한 길은 한국인의 집단무의식을 파고드는 쪽이다. 그 무의식은 가난 속에서도 가족을 위해 모든 기득권을 포기했던 부모세대에 대한 부채의식이고 동정심이며 연민이다. 어리석기 짝이 없는 희생을 아무 의심없이 행했던 사람들, 세상은 그들을 잊었지만 영화는 그들을 되살린다. 한국전쟁은 그 부활의 극적인 계기다. 영화는 전장의 총성과 폭발음이 잦아드는 순간마다 자꾸 못살았지만 서로 아끼며 살았던 지난날을 돌이켜본다. 전쟁터에 끌려온 동생을 어머니 품에 돌려보내려는 형은 이렇게 말한다. “너 공부시키려고 학교 관두고 구두통 메고 다녀도 한번도 후회한 적 없어. 어머닌 시장통에서 허리 한번 못 펴고 국수 팔아도 너 땜에 힘든 줄 모르고 살아.” 신파영화에 어울리는 대사지만 그게 마음을 움직인다는 걸 부정할 수도 없다. <태극기 휘날리며>는 그런 영화다. 나를 위해 자기 것을 포기했던 부모와 형제가 떠올라 너도나도 엉엉 울고싶어지는 것이다. 영화는 이런 감정적 폭풍의 진원지를 진태, 진석 두 형제의 멜로드라마에서 발견한다.

묘하게도 <태극기 휘날리며>는 한국전쟁을 이야기하면서 이데올로기나 정치문제에 관해서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형제의 갈등이 빚어지는 지점도 이데올로기와 무관하다. 그들의 문제는 전적으로 가족애에서 비롯된다. 영화에서 형은 가부장의 책임을 지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그가 안간힘을 쓸수록 사랑하는 동생과 가족들로부터 멀어진다. 내 목숨을 담보로 동생을 살린다는 방법이 무모한 탓이지만 형은 그걸 자각할 수 없다. 개인은 거대한 전쟁 앞에 무력하고 전쟁은 그런 개인을 이용한다. 그를 전쟁영웅으로 만들고 무공훈장을 주면서 지금처럼 조금만 더하면 동생을 제대시켜주겠다고 부추긴다. 변해가는 줄 모르고 그는 괴물이 된다. 살인기계가 되고 학살자가 된다. 처음엔 가부장의 책임감과 가족에 대한 사랑에서 시작했지만 남은 것은 망가진 영혼이다. 문제는 그런 사연을 아는 사람이 오직 동생뿐이라는 데 있다. 늦었지만 동생은 형을 만나야 한다. 흉측해진 형을 동생만은 안아줘야 한다. <태극기 휘날리며>는 한발 늦게 연인의 진심을 알게 되는 사랑영화를 닮았다. 솔직한 마음을 전하기 위해 그들은 온갖 장애물을 헤치고 달려간다. 실제로 이 영화에서 장동건과 원빈이 나누는 감정적 교감은 <실미도>에서 봤던 남성적 연대감이 아니다. 앳된 원빈의 두눈에 자주 눈물이 고이는 동안 장동건은 무언가 할말을 삼키는 속깊은 남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비련의 남녀처럼 조화를 이루는 두 남자의 연기는 전쟁액션보다 강한 흡인력으로 비극의 정점을 만들어낸다.

군인의 시점으로 만들어진 한국영화 최고의 스펙터클

물론 <태극기 휘날리며>는 주인공 둘만 있으면 되는 멜로드라마가 아니다. 한국영화로는 유례없는 거대 제작비를 투자한 이 영화가 만들어낸 스펙터클은 화면의 기술적인 완성도에서 지금까지 한국영화 가운데 최고라고 자신할 만하다. 특히 전쟁장면 가운데 가장 처음 나오는 낙동강 전투는 전쟁의 무시무시한 공포를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이 대목에서 적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아군 참호에 포탄과 총알이 쏟아져 사지가 찢기고 사방에서 흙과 피와 살점이 튄다. 일방적인 수세에 몰린 군인의 시점이라면 의당 그랬을 것이다. 다큐멘터리 같은 사실성에 착안한 전투장면은 전체적으로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오마하 상륙작전 장면을 연상시킨다. 들고찍기로 생생한 현장감을 살리고 개각도 촬영으로 운동감을 증폭시키는 것이다. 주목할 만한 전투장면 중 또 하나는 총검을 꽂고 벌이는 육박전이다. 아군과 적군이 마구잡이로 뒤엉킨 살육의 현장인 육박전은 한국전쟁의 성격과 인물들의 이념적 혼란을 대변한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 <블랙 호크 다운> 등 최근 할리우드 전쟁영화의 스펙터클에 비하면 아직 부족하지만 다른 한국영화에서 볼 수 없던 근사한 화면을 만들어낸 제작진의 노고는 칭찬받을 만하다.

논쟁을 비켜간 전쟁영화, 강제규식 진보성

<쉬리>의 대북관에 비판적 태도를 보였던 이들에겐 <태극기 휘날리며>가 한국전쟁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도 관심거리일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한국전쟁이 정치와 이데올로기 문제를 피해갈 수 없는 전쟁이기에 더욱 그렇다. 영화는 관찰자로 동생 진석의 시점을 택함으로써 논쟁을 비켜간다. 18살 소년의 눈에 비친 전쟁은 이유없는 살육과 적의로 가득 차 있다. 북한과 남한, 양쪽의 양민학살을 번갈아 보여주면서 어느 쪽도 완전한 선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만약 이 영화가 정치적 주장을 갖고 있다면 그건 모든 것이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니 이해하고 용서하라는 것이다. 진태의 광기가 보여주듯 무지몽매한 대부분 사람들은 정치적 격변의 꼭두각시로 이용당했을 뿐이다. 그 결과 괴물이 된 진태는 현실의 북한을 환기시키는 인물이 된다. 이건 아주 순진한 주장이지만 <태극기 휘날리며>를 대중영화로 구제하는 길이기도 하다. 영화는 분단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당대의 계급문제나 정치상황에 대해서도 침묵을 지킨다. <태극기 휘날리며>의 휴머니즘은 딱 그 정도까지 작동하는 것이다. 하긴 강제규 감독의 영화에서 그 이상을 기대하는 건 무리다. 그는 상업영화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 한에서만 진보적일 수 있다. <쉬리>가 반공드라마로 비친 것과 달리 <태극기 휘날리며>는 반공드라마의 색채가 거의 없지만 그건 감독의 생각이 달라진 탓은 아니다. 정치적 입장은 강제규 감독의 영화적 목표에 맞게 조정될 뿐이다. 아마도 강제규 감독 영화의 두 가지 키워드는 ‘감동’과 ‘스펙터클’일 것이다.

강제규의 키워드, '감동'과 '스펙터클'

<쉬리>도 그랬지만 <태극기 휘날리며> 역시 두 가지 고지를 목표로 정밀하게 조립된 작품이다. 상업영화라면 당연한 목표 아닌가 싶지만 따지고보면 한국 감독 가운데 이런 목표를 수미일관 밀고간 인물은 오직 강제규다. <실미도>의 성공 때문에 강우석 감독과 비교가 되지만 실상 강우석과 강제규가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음은 작품 목록만 비교해도 금방 알 수 있다. 코미디 전문감독으로 이름을 알린 강우석 감독과 달리 강제규는 데뷔작 <은행나무 침대>부터 판타지와 멜로가 혼합된 영화를 만들었다.

단적으로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를 비교해보라. <실미도>엔 할리우드 액션블록버스터의 화면을 따라잡겠다는 의욕이 거의 없지만 <태극기 휘날리며>는 우리도 할리우드만큼 할 수 있다는 의지로 충천하다. 강제규에겐 너무 중요한 할리우드의 기술수준이 강우석에겐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강제규 감독이 차츰 제작비 규모를 늘려가고 대작에 집착하는 이유도 그의 영화적 이상이 할리우드의 수준을 따라잡는 데 있기 때문이다. <쉬리>를 만들 때부터 그는 당시 한국 영화계가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하던 제작예산을 들이밀었다. 지금와서 보면 우스운 금액인 순제작비 23억원이지만 그때만 해도 엄청난 위험부담이 있는 투자로 여겼다. <태극기 휘날리며>도 마찬가지다. 4년 전만 해도 한국영화에서 제작비 170억원을 들인 영화가 나올 것이라 예상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런 제작비 증가에 관해 강제규 감독이 자주 강조하는 말이 있다. “비슷한 제작비로는 비슷한 영화밖에 못 만든다. 한국영화는 이렇다는 고정관념을 깨지 않으면 한국영화는 자멸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런 그의 신념은 <쉬리> 이후 한국형 블록버스터가 유행처럼 번진 근거이기도 하다. 한국영화가 산업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대작이 필요하고 그런 영화라야 국제시장에서 경쟁력을 갖는다는 논리다. <쉬리>의 성공은 강제규의 믿음이 그릇되지 않았음을 입증했다. 작품의 완성도나 이데올로기에 대한 논란을 떠나 <쉬리>는 이후 한국영화의 산업적 지향점이 됐다.

스펙터클에 있어서 할리우드를 모델로 삼고 있지만 사실 강제규 감독은 액션 전문 감독이기보다 멜로드라마에 집착하는 감독이다. 데뷔작 <은행나무 침대>부터 <태극기 휘날리며>까지 강제규 영화의 중심에는 거대한 장애와 맞서는 연인들의 이야기가 있다. 아마도 그는 <쉬리> 이후 분단 현실이야말로 한국적 멜로드라마로 국제적 공감을 만들 수 있는 소재라고 본 것 같다. 남북 대치상황은 <쉬리>에선 상대의 가슴에 총을 겨눠야 했던 연인의 이야기로, <태극기 휘날리며>에선 전쟁의 회오리에 휘말려 파괴되는 형제의 이야기로 바뀌었다. 한 가지 안타까운 건 강제규 감독이 액션을 연출하든 스펙터클을 만들든 멜로드라마를 엮어내든 그안에 독창적인 것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어디선가 본 이미지를 그럴듯하게 이어붙일 뿐이라는 비판을 받을 만하다. <태극기 휘날리며>의 멜로드라마가 곤궁에 처하는 것도 이런 점이다. 곰곰이 살펴보면 상당한 무리수가 있는데 그런 허점을 감정을 강요하는 연기와 음악이 메우는 식이다. 그래도 관객이 강제규의 영화를 신선하게 받아들인 데는 스펙터클의 힘 외에 그가 악역을 잘 활용하는 감독이라는 점이 작용했을 것이다. <은행나무 침대>의 황 장군이 스타덤에 올랐던 것처럼 <쉬리>의 박무영이나 이방희도 관객의 가슴에 깊이 새겨졌다.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장동건이 맡은 이진태의 캐릭터도 마찬가지다. 전쟁의 광기에 휘말리는 이 어리석은 영웅은 희생적 삶을 살았던 아버지 세대의 대리물로 오래 기억될 것이다.

아시아의 할리우드를 향한 야심

아무튼 지금까지 강제규 감독의 행보로 볼 때 <태극기 휘날리며>는 미학적인 평가 이전에 대중적인 반응이 궁금한 영화다. 시사회 이후 영화인들이 모이는 자리마다 화제는 <태극기 휘날리며>의 흥행결과에 집중됐고 일단 개봉 초반 반응은 <실미도> 못지않은 폭발력을 보이고 있다. 나쁘지 않은 출발이지만 <태극기 휘날리며>의 진짜 목표는 강제규 감독이 여러 차례 밝혔듯 세계시장에서 어떤 평가를 받느냐다. 제작사인 강제규필름과 배급사인 쇼박스는 애써 <태극기 휘날리며> 시사회에 외국의 영화전문지 기자와 감독들을 초청해 ‘월드프리미어’라고 이름 붙였고 그들의 반응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영화업계 관계자들은 <태극기 휘날리며>가 국내에서 <실미도>보다 많은 관객을 불러모을지는 미지수지만 해외에서는 더 많은 판매실적을 올릴 것이라고 예상한다. 그 결과가 나오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테지만 강제규의 노선이 이번에도 성공을 거둔다면 한국의 영화산업은 다시 한번 아시아의 할리우드라는 목표를 분명히 할 것이다. 스펙터클로 세계시장의 문을 두드리려는 한, <태극기 휘날리며>는 지금 한국영화가 갖고 있는 잠재력의 최대치이다.

사진제공 강제규필름, 인사이트 비주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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