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강제규의 대단한 혹은 대담한 도전, <태극기 휘날리며> [2]
2004-02-13
글 : 김봉석 (영화평론가)
사진 : 오계옥
<태극기 휘날리며> 감독 강제규 인터뷰

전투가 아닌 전쟁을, 그 살떨리는 느낌을 담았다

-<쉬리> 이후 4년 만에 만든 영화다. 마침 <실미도>가 한창 1천만을 향해 달리고 있는 상황인데, <태극기 휘날리며>를 대중에게 선보이는 기분이 어떤가.

=시사 직전까지 작업을 하느라고, 아직 반응을 접수할 마음이 안 생긴 것 같다. 아직은 별 마음이 없다. <실미도>는 영화 자체의 미덕과 함께 <쉬리> 이후 계속 성장해온 영화계의 정점이라는 느낌이 든다. 하루아침에 된 게 아니잖은가. 신뢰를 주고, 어떤 가치를 던져주고, 쌍방의 호흡에 의해서 시장이 계속 성장해온 것이다. 더욱 발전해야겠지만 고무적인 일이다. 어떤 단계를 뛰어넘는, 한계선들을 극복하는 과정이라고 본다.

-한국전쟁 당시의 유골을 찾는 다큐멘터리에서 출발했다고 들었다. 그런 모티브를 포함해서 <태극기 휘날리며>를 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어떤 것을 말하고 싶었는가.

=내가 어떤 장점이 있고, 한국 영화계에서 뭘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쉬리> 이후에 할 작품도, 좀더 적극적으로 우리의 것을 다른 나라에 알리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처음에 생각한 것은 SF였다. SF에 아시안적인 것이 결합되어도 설정상 별 무리가 없고 하니까, 우리쪽 사람을 많이 등장시켜서 공통분모를 만들어보자고, 그 작업을 한 2년 정도 했다. 그러다가 다큐멘터리를 봤다. 하지만 그걸 보고 갑자기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니고. 집안에서도 외삼촌은 베트남전에, 아버지는 한국전쟁에 참전했었고 이야기도 많이 듣고 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언젠가 영화를 하겠다, 라고. 그뒤 구체적인 접근을 못하고 있던 차에, (다큐멘터리가) 한국전쟁을 새롭게 들여다보는 방향제시를 해줬다. 전투와 작전 중심의 영화를 생각하고 있다가 바뀐 거다. 막연하게 거리감을 두고 있었던 전쟁이 살갑게 다가왔다. 내가 모르고 있었구나, 그러면서 들여다본 건데 준비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겪은 한국전쟁은 우리 민족이 5천년간 겪은 전쟁과 수난 중에서도 전무후무한 거란 걸 알았다. 그 아픔의 덩어리가 얼마나 크고 상처덩어리가 얼마나 큰가를. 자료를 보면서 느낄 수 있었고 이걸 표현해야 하는 거구나. 총격이 문제가 아니고, 전쟁의 의미를 재확인, 발견하게 된 계기가 됐다. 생각해오던 전쟁이 아닌 우리의 전쟁의 이야기를 해야겠다, 라고.

-<실미도>도, <태극기 휘날리며>도 우리 역사의 어두운 부분이다. 그런데도 젊은 관객에게 <실미도>가 어필했다. <태극기 휘날리며>는 어떻게 받아들일 것 같은가, 또는 어떻게 받아들였으면 좋겠는가.

=세대마다 좋아하는 가요가 다르긴 하지만, 거기에도 어떤 공통분모 같은 게 있다. <살인의 추억>이 잘됐고 <쉬리> <공동경비구역 JSA> 다 비슷하다. 취향의 차이는 존재하지만 그것을 초월하는 지점이 있고 그 지점은 바로 인간이라는 공통분모다. 재미, 감동, 울림, 떨림, 내 오감을 만족시키는 자극의 느낌을 발견하는 거다. 영화라는 것이 세계 공통 언어가 될 수 있는 것도 오감을 어떻게 만족시킬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코미디가 시장을 평정하고 있을 때, 상식적으로는 전쟁영화를 이렇게 돈 많이 들여서 할 수 있겠느냐고들 했다. 하지만 재미를 좇든 감동을 좇든 착각해선 안 된다. 만족을 좇는 것이지 재미를 좇는 것이 아니다. 만족시키는 코미디는 언제 나와도 성공한다. 그런 부분에서 흔들려서는 안 된다.

-전쟁영화는 전투가 반복되면서 지루하기 쉽다. 계속 변화를 주고 리듬도 줘야 하는데, 전투장면들을 연출하면서 어떤 생각이었나.

=<블랙 호크 다운>을 보면 사실 전투가 많지 않다. 예를 들어 작전이 있고, 그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면 큰 전투로 가면서 브리지로 작은 전투가 조금 있는 것이다. 결국 스토리텔링에 따라서 달라진다. <태극기 휘날리며>는 1950년 6월25일부터 한국전쟁의 히스토리를 따라가면서, 주요한 전투들이 모두 보여진다. 그런데 그 전투들이 아무리 현란하고 멋있는 총격이라도, 반복되면 관객 입장도 즐겁지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을 했다. 시나리오 쓸 때부터 위치 안배나 전투의 느낌, 형식도 많이 다르게 했다. 어느 지점에 개각도를 쓰고 이미지 셰이크를 쓸 것이냐 고민도 했고, 장소에 대한 부분 역시 평지에서 시가전할 때의 동선하고 고지와 산악에서 동선 모두 다르다. 계절에 따른 변화도 있고, 포격을 뚫고 전개되는 전투나 육탄전이 위주인 전투의 사운드도 각각 다르다. 시각적 변화를 주기 위해서 농가, 탄광촌 등으로 로케이션에서 악센트를 주기도 했다. 이를테면 총격전도 곡선이냐 직선이냐가 다른데 평양은 직선이다. 스트레이트로 달리고 터지고 선 자체가 직선의 형태로 가니까 느낌이 다르다.

-가장 마음에 드는 장면을 든다면.

=아무래도 평양에서 벌어지는 시가전과 지형 지물을 이용하여 공군과 지상군이 결합한 형태의 전투가 벌어지는 두밀령 전투다.

-포로로 잡힌 인민군 둘을 싸움시키면서 열광하던 군인들이, 진석이 들어가 함께 치고받자 분위기가 서늘해지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그 장면은 어떤 의도인가.

=작게는 진태, 소대원이고 우리 국군이라고 할 수 있다. 전쟁을 겪어나가는 과정 속에서 점점 마취되고 자기 이성을 상실하게 되고 논리를 벗어나는 행동을 하게 된다는 거다. 형제의 갈등에서 중심축은 변색되어가는 형을 현실로 끌어내리려는 동생의 감정과의 갭이다. 계속 하지 마라, 형 왜 그래, 말로만 한다 이거지. 두 사람의 갈등이 계속 말로만 진행되다가, 마침내 자기 몸으로 개입해서 들어오는 그런 지점이다.

-진태가 인민군에 입대했다는 것을 안 진석이, 그를 찾아가는 것은 어떤 이유인가. 편지 하나로 과거의 모든 응어리가 풀린다는 것은, 너무 단순하다는 생각이 든다.

=서비스가 약했구나. (웃음) 실질적으로 두 형제가 안고 있는 증오의 깊이 자체가 그리 심각한 게 아니다. 내가 마음을 바꾸기에는, 치명적인 오해나 갈등의 상황이 존재한다면 그걸 풀어야 한다. 그런데 형의 광기를 쳐다보면서, 진석의 이면에는 형에 대한 철저한 증오나 배신감이 아니라는 거다. 일종의 앙탈 같은 것이지. 형은 왜 그러는 건데, 미친 새끼, 라고 말하지만 전쟁이라고 하는 상황 속에서 진석은 형을 이해하려고 하는 거다. 남처럼 형에 대해 이야길하고 있지만, 얽혀 있는 갈등의 덩어리 자체가 치유될 수 없는 무엇이 아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는 애정의 베이스가 있다. 같이 싸우던 병사의 말처럼, 이진태가 왜 인민군 영웅이 됐을까. 보도연맹 때문에 약혼녀가 죽고 동생도 죽었다고 생각했으면 돌 수 있을 거다. 그러면서 밤에 형의 편지를 꺼내 보게 된 계기도 될 거다.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의 편차가 있겠지만.

-배우들의 연기는 어땠는가. 상당히 궁금했는데, 장동건과 원빈의 어울림은 상당히 좋았다.

=<은행나무 침대>에서 한석규가 상투를 틀고 가야금을 치는 장면이 나오는데, 관객이 와 웃더라. 웃으면 안 되는 장면인데, 굉장히 당황했다. 찍는 사람과 보는 사람이 감정의 차이가 있구나, 느꼈다. 동건이가 영화에서 구두 딱 하고 등장하는데, 관객이 장동건의 어떤 모습으로 믿어줄 거냐 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시작부터 무리수라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사실은 시작만 관객이 받아들여주면 그뒤는 자신있었다. 의상, 헤어스타일, 메이크업 등 사전에 엄청나게 설정에 공을 들였다. 반면 진석은 비슷하게 머리하고 교복 입히니까, 딱 그 모습이었다. 너 그걸로 계속 피난가, 하고 끝냈다. 장동건이나 원빈이나 워낙 잘생겼지 않나. 그런 부분이 부담스러웠다. 다행히 관객이 거북스럽지 않게 받아들이는 것 같다. 결국은 관객이 그들에게 감정이입하면서 2시간20분을 가는 건데. 같이 사전에 리허설 많이 하고 대화 나눌 때도 제일 많이 이야기를 했다. 한 30% 찍었을 때는 정말 형, 동생 같았다. <태극기 휘날리며> 틀 속에, 형제로서 몸에 밀착되어 자기 것이 됐구나, 그러면서 조금 안심했다.

-<태극기 휘날리며>를 찍으며 가장 힘들었던 점은.

=시작할 때 상황이 안 좋았다. 그때 블록버스터라고 하는 영화들이 줄줄이 참패를 하고 있었고. 우리 영화도 시도는 좋은데 무리, 무모하다는 걱정의 시선이 있었다. 겨울장면을 찍어야 하는데 돈이 잘 안 모여서 곤란한 때도 있었다. 겨울장면 3월 초에 끝내야 하는데, 못 찍으면 꼬박 1년 넘어가는 거였다. 기획 자체에 대한 편견도 있었다. 전쟁영화는 너무 올드하다, 10대 20대가 관심도 없다고들 했다. 보편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편견으로부터의 탈출, 그런 사람들을 설득하고 이해시키는 게 힘들었다. 촬영하면서는 제작비가 많이 드는 영화들의 부정적인 모습들을 보면서 뭔가 좋은 모델을 제시하고 싶었다. 돈이 많이 드는 영화는 나쁘고 뭐 그런 이분법적 사고가 아니라 기획이 얼마나 소중하나. 목적이 얼마나 구체화돼서 시장에서 보여지는가 등등. 모범적인 프로덕션을 하자 뭐 그걸 것들 말이다. 대작영화들이 주체할 수 없게 예산이 증가하고 하는 시행착오를 봐왔지 않은가. 그래서 이 영화는 백서로 만들어서 후배들에게 제작 과정의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있는 틀거리가 되게 하자고 진행을 했고, 잘 도와서 정확하게 136회에 끝났다. 보충촬영까지. 기상이나 100% 로케이션영화기 때문에 날씨가 안 도와주면 안 되는 것인데도 잘됐다. 처음에 20% 정도 절약을 했고 하다가, 태풍, 장마로 20% 까먹은 건데 결과적으로는 딱 맞는 게 됐다. 그게 <태극기 휘날리며>가 진정 인정받을 만한 부분이다. (웃음)

-<은행나무 침대> <쉬리> <태극기 휘날리며>로 점점 스케일이 커지는데. 우연인가 욕망인가.

=하고 싶은 이야기 구조를 좇아가다 보니까 우연히 그랬다. 다음에 하고 싶은 것도 좀 크다. 규모가 큰 영화를 해야 된다는 건 없지만 자꾸만 그렇게 되는 것 아닌가, 싶다.

-<쉬리>에서 한석규와 김윤진이 서로를 겨누는 장소는 어딘가의 뒷골목이 아니라 남북축구시합이 열리는 거대한 스타디움이다. 진석과 진태가 뒹굴고 싸우며 돌아가자고 애원하는 장소는, 휴전을 앞두고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현장이다. <쉬리>나 <태극기 휘날리며>나 모두 연인이나 형제 같은 일반적인 감정을 다루지만, 가장 극적인 상황으로 끌어내고 싶어한다. 그건 욕망 아닌가.

=그럴 수 있겠다. 상황을 가져올 때 이야기든 인물이든 감정에 걸맞은 상황과 배경이 존재하는데, 그런 걸 즐겨하는 것 같다. 그 사이즈가 애매하고 어중간한 것은 개인적으로 싫어한다. 전쟁영화 속에서 움직이는 인간의 감정의 보폭은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차이만큼 크다. 일상과 전쟁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합법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 아닌가. 살인하면 사형당하거나 무기징역당하지만. 전쟁에서는 게임처럼 죽여가는 것이니까. 그런 일상과는 다른 보폭이 마음에 든다는 거지. 그런 것들을 개인적으로 좋아한다.

-지금 우리에게 한국전쟁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새로운 세기를 맞은 지도 몇년이 흘렀다. 나는 21세기는 한반도에 반드시 일어나야 할 사건은 통일이라고 본다. 우리 시대의 제일 필연적인 숙제라고 생각한다. 통일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왜 우리가 분단되어 있지로 가야 한다. 전쟁이 일어났고, 그래서 나눠진 거다. 통일하려면, 그동안 한국전쟁이 남침인가, 북침인가, 니네들이 나빠, 라고 싸워왔는데, 이제는 그 전쟁에 대해서 이해하고 용서하고 화합하지 않으면 사실 통일이 어렵다. 질책이 아니라 보듬어줘야 하고 화합하고 용서해야 통일이 된다고 생각한다는 거다. 이 지점에서 전쟁에 대해서 들여다볼 시기가 됐다는 것이고.

-앞으로 계획은. 영화도 그렇고, 명필름과의 통합도 그렇고.

=지난해 3월에 다 한 거다. 지지난해 가을에 만났던 것이고, 계약서는 지난해 3월에 했다. 그 사이 일들은 이은 감독이 다 했어. 그쪽에서 많이 해왔고. 나는 연출만 하려고. 더이상 강제규필름이라는 조직의 리더로서 살림을 꾸리는 짐을 안 지고 싶었다. 작품을 많이 하고 싶고, 그러면 내가 좀 자유로워져야잖아. 배놔라 감놔라 신경쓰면 연출자로서 너무 많이 힘들어진다. 전에는 연출만 하라니까 저질러놓은 일이 많아서, 그때 이은에게 너가 알아서 해라, 그렇게 출발했던 거다. 이제는 아시아 시장 대비해야 한다. 시너지가 나도록 더 열심히 해야 한다. 세계시장으로 가자. 그러려면 너도 고만고만하고 나도 고만고만하고 그런 것말고 양질의 미래 지향적이고 돌파구를 만드는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 취지는 유효하고, 아직 형식은 결정되지 않았다. 통합법인이 될 수도 있고, 협력체제로 각자 이름 달고서 하나의 회사처럼 할 수도 있고.

사진제공 강제규필름, 인사이트 비주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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