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와 소피아 코폴라에 열광하는 까닭 [1]
2004-02-13
글 : 박은영
마피아 프린세스, 할리우드 ‘작가’가 되다

감독 소피아 코폴라는 어떻게 두 번째 장편작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로 평단을 쓰러뜨렸나

이제 관록의 행사가 된 최악의 영화상 ‘래즈베리 어워드’는 몇해 전 <씨네21>과의 서면 인터뷰에서 자신들이 자랑스러워하는 공적 중 하나로 “소피아 코폴라가 다시 연기하지 않겠다고 마음먹게 한 일”이라고 답한 바 있다. <대부3> 때의 이야기다.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딸로 태어났다는 우연이 메리 콜리오네라는 중요한 역할을 떠안을 만한 특권으로 이어져선 안 된다고 믿은 반대파들은 쾌재를 불렀다. 소피아 코폴라의 연기는 정말이지 너무나 어설펐다. 아버지는 분별이 없고, 딸은 재능이 없다고, 평단도 관객도 몰아세웠다. 래즈베리 어워드는 소피아 코폴라에게 그해 최악의 신인스타상과 최악의 여우조연상, 두개의 트로피를 선사했다. 래즈베리 어워드의 자부심대로, 이후 소피아 코폴라는 카메오 출연 이상의 연기는 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14년이 흐른 올해, 소피아 코폴라는 최고의 영화상 ‘아카데미 어워드’의 극성스런 구애를 받고 있다. 감독 겸 작가로 크레딧을 올린 두 번째 영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로 작품상과 감독상과 각본상 후보에 올라 있고, 주연배우인 빌 머레이도 남우주연상 수상이 유력한 상태다. 소피아 코폴라는 감독상을 두고 클린트 이스트우드, 피터 위어, 피터 잭슨 등 쟁쟁한 선배들과 겨루게 되는데 특히 그는 아카데미 사상 최초로 감독상을 수상하는 ‘여성’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모으며, 현지언론을 들뜨게 만들고 있다.

이런 돌풍은 지난 베니스영화제에서 첫선을 보인 순간 예견된 것이었다. 배우로 성공한 중년의 남자와 20대 초반의 젊은 주부가 도쿄에서의 고독하고 권태로운 나날 속에서 서로를 ‘발견’하는 과정을 섬세하게 포착한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는 영상과 연기와 음악의 기적적인 조화를 보여준다.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비포 선라이즈>와 데이비드 린의 <밀회>에 비견되는 이 영화에 대한 평단의 반응은 열광 그 자체다. 냉철한 비평가인 로저 에버트가 “나는 이 영화가 좋다”며 아이처럼 투항하는가 하면, <뉴욕타임스>가 “그는 미국의 가장 창의적이고 유망한 여성감독”이라 상찬하기에 이른다. ‘아버지 등에 업힌 가망없는 연기자’라는 판정을 받았을 때만큼이나 격렬하고 절대적인 반응이다. 소피아 코폴라에게는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불과 두편의 영화로 평단을 녹다운시킨 그의 저력은 무엇일까. 로열 패밀리의 혈통? 아버지와 남편의 외조? 와신상담의 세월? 쉽게 짐작한 것은 정답이 아닌 경우가 많다.

1971년 <대부>의 빡빡한 촬영 중에 태어난 소피아 코폴라는 아버지에게 하루의 ‘출산 휴가’를 허락한 효녀였다. 비토 콜리오네처럼 자신의 비즈니스에 일가 친척을 두루 등용하며 ‘이탈리아식 가족 사랑’을 과시하곤 했던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는 생후 3개월이 된 딸 소피아를 <대부>의 세례받는 아기로 출연시켰다. 아버지의 영화에 조단 역으로 얼굴을 내밀고, 슈퍼 8mm 비디오카메라로 자신의 일상을 기록하는 것은, 어린 소피아에게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의 유년을 지배하는 기억은 <지옥의 묵시록>의 헬리콥터 장면이나 도쿄에서 만난 구로사와 아키라나 칸영화제의 흥성스러움 같은 것들이다. “어느 날 문득 우리 가족 중에 영화인 아닌 사람이 없다는 걸 깨닫게 됐다. 저녁 식사자리의 화제도 누가 어떤 영화를 어떻게 찍고 있다더라 하는 얘기뿐이었다. 20년간 ‘산교육’을 받은 셈이다.”

코폴라 가문 소녀의 긴 항해

당시 영화계에서 코폴라는 정계에서의 케네디만큼 권세와 영향력을 보장하는 이름이었다. <대부>와 <지옥의 묵시록> 그리고 <아웃사이더> 등 일련의 브랫팩영화까지,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는 할리우드를 호령하는 거물이 돼 있었다. 물론 이런 ‘대단한’ 아버지의 딸로 사는 일이 즐겁기만 한 건 아니었다. “온 가족이 대중의 관심권에 포섭돼 있다는 건 정말 무서운 일이다.” 배우 지망생인 사촌오빠 니콜라스는 가문의 후광을 벗고 홀로 서겠다며 ‘케이지’로 성을 바꾸는 수선을 피우기도 했지만, 아직 진로를 정하지 못한 소피아는 자신의 정체성까지 부인하려들지는 않았다. 낯모르는 이들의 과도한 관심과 오해가 부담스러웠던 그는 나보코프의 소설과 안토니오니 영화에 탐닉하며 자신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 신중하고 사색적인 소녀로 성장해갔다.

하지만 아버지는 조용한 삶을 허락하지 않았다. 1990년 <대부3>에 마이클 콜레오네의 딸 메리로 내정돼 있던 위노나 라이더가 촬영을 코앞에 두고 출연을 번복하자, 딸에게서 배우의 가능성을 봤던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는 주저하는 소피아의 등을 밀어 카메라 앞에 세웠다. 결과는 참담했다. ‘내가 지금 뭘하는지 나도 모르겠다’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일관하다 극장 앞에서 쓰러지는 소피아의 연기에 쏟아진 혹평은 무장 해제된 타깃을 향한 기관총 사격을 방불케 했다. “배우가 되겠다고 생각해본 적 없다. 어쩌다 연기를 하게 됐고, 열여덟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냉혹한 비난을 들었지만 후회는 없다. 내가 할 일이 아니라는 걸 배웠으니까. 정작 힘들었던 건 본능적으로 부모에게 반항하게 되는 나이에 감독 아버지의 지시를 따라야 한 일이었다. 그게 가장 큰 도전이었다.”

<대부3> 전후로 소피아 코폴라는 대단히 정력적이고 부산한 성장기를 보냈다. 하고 싶은 일을 찾기 위한 긴 유랑이었던 셈이다. 사진작가와 디자이너와 다큐멘터리 감독 등을 지낸 어머니 엘레노아 코폴라는 딸의 갈지자 행보를 부추긴 당사자였다. <대부3>로 ‘배우’를 지워버리고도, 그의 직업 리스트는 여전히 길었다. 영화와 무관해 보이는 일들이 대부분인데, 가장 먼저 그를 매혹한 건 패션이었다. 십대 중반에 파리로 건너가 샤넬에서 인턴을 지낸 소피아는 열여섯에 의상디자인을 시작했고 스트리트 패션 브랜드 ‘밀크 페드’를 런칭했다. 아버지의 영화 <뉴욕 스토리>의 의상디자인에 부분적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의상에 대한 관심은 순수미술로 이어져, 칼아츠 회화과에 입학하기도 했지만, “시간이 걸리는데다 원하는 결과물을 얻어낼 수 없다”는 판단으로, 사진작가로 전향해 <보그> <얼루어> 등 패션지에서 일하기도 했다. 토크쇼를 기획하고 진행한 일도 있었다. 훗날 남편이 된 스파이크 존즈를 만나게 된 소닉 유스의 뮤직비디오 작업도 빠뜨릴 수 없겠다.

소피아 코폴라는 요즘도 비행기를 탈 때마다 직업란에 뭐라 적을지 고민이 많다. 가장 즐겨 쓰는 방법은 ‘학생’이라고 얼버무리는 것. 어느 것 하나 진지하지 않은 일이 없었지만, 소피아 코폴라는 “결국 영화로 돌아오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고 말한다. “아버지의 일을 물려받는다는 것에 대한 무의식적인 저항이 있었던 것 같다. 아버지의 그늘에 묻어가는 것과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깨닫고 선택하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으니까.” 1998년 오랜 방황 끝에 돌아온 영화 현장(단편 <릭 더 스타>)에서 소피아 코폴라는 단호하고 명쾌해져 있었다. “가장 놀라웠던 건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무시할 수 없는 보너스는 그간 소피아 코폴라의 전방위적 활동이 영화적 결실로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소피아는 한 가지 일을 파고드는 것이 정답인지를 궁금해했다. 난 흥미가 가는 일이라면 그게 뭐든 따라가보라고 권했다. 결국엔 그 많은 것들이 하나의 고유한 집합체가 되어 그애의 영화로 나타나고 있는 것 같다.” 고슴도치 아버지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증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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