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아들>의 다르덴 형제를 주목해야 하는 까닭 [1]
2004-02-27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약속> <로제타> <아들> 공동연출한 다르덴 형제의 영화미학

‘등 뒤’를 쫓아다니며 모든 것을 보는 방법

페드로 알모도바르, 첸카이거, 짐 자무시, 기타노 다케시, 마뇰 드 올리베이라, 알렉산더 소쿠로프, 그리고 데이비드 린치. 1999년 칸을 찾은 거장들의 이름은 수두룩했다. 그러나 데이비드 크로넨버그를 수장으로 한 심사위원단은 장 피에르 다르덴, 장 뤽 다르덴 형제의 <로제타>(1999)에 상을 선사했다. 여주인공 에밀리 드켄은 여우주연상까지 받았다. 사람들은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미 <약속>(1996)으로 작은 유럽 영화제들을 순회한 경험이 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다르덴 형제는 그저 갑자기 떨어진 별똥별일 뿐이었다. 2002년 다르덴 형제는 <아들>(2002)로 다시 칸을 찾았다. 그러나 황금종려상은 로만 폴란스키의 <피아니스트>에 돌아갔다. <아들>의 배우 올리비에 구르메가 남우 주연상을 받은 것이 전부였다. 3년 전 황금종려상을 빼앗겼던(?) 데이비드 린치가 심사위원장이었고, 일부 호사가들은 크로넨버그의 <스파이더>와 다르덴 형제의 <아들>이 외면당한 것은 혹시 린치의 심술이 힘을 발휘한 것 아니겠느냐고 의심스러워했다. 사실 이 형제가 상을 타거나 못 타거나 한 것이 중요한 건 아니다. 큰 사건이 되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 신뢰는 중요하다. 역설적으로 다르덴 형제는 이제 상을 못 탈 때마다 뭔가 있는 게 아니냐고 적극적인 옹호를 받을 만큼 영화적 신뢰를 쌓게 된 것이다. 과연 그들의 영화는 어떤 방식으로 그 믿음의 너비를 늘려왔는가? 그것을 ‘측량’할 시기가 우리에게도 온 것이다.

리얼리즘 개념에 갇히지 않는 리얼리즘

형 장 피에르 다르덴과 동생 장 뤽 다르덴은 1970년대 초 극작가 아르망 가티의 문하에서 연극을 배우고, 연기를 배우고, 비디오 매체의 유용성을 배웠다. 고향인 세렝으로 돌아온 형제는 시멘트 공장과 원자력 발전소에서 일해 마련한 돈으로 장비를 구입하고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시작한다. 그들은 스스로를 중요한 영화감독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주택단지, 파업현장, 공장들을 돌며 카메라로 그 현실에 개입하는 것이 의무라고만 생각했다. 이후 수십편이 넘는 비디오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1975년에 설립한 다큐멘터리 제작사 Derives는 그 영역을 더욱 확장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그러나 의외로 장대한 기록의 역사를 부추긴 처음 동기는 아주 소박하고 명료했다. “사람들이 서로를 잘 모른다. 어느 누구도 옆집에 누가 사는지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의 초상을 보여주고, 어느 일요일날 차고나 카페에서 그 작품들을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사람들 사이의 어떤 결속력을 형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아마도 이들 영화의 경향을 두고 ‘사회적 행동주의’(social activism)라고 규정하는 관점은 그 공동체적 수행력을 중요시하게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어느 인터뷰에서 다르덴 형제는 사회적 행동주의 영화를 고수하느냐는 질문에 도리어 “아니오”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반문한다. “그런데 당신이 사회적 행동주의라고 말할 때의 그 의미는 뭔가요?” 이들의 사회적 행동주의는 자신들이 살고 있는 땅에 대한 관심과 그곳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을 ‘개념에 갇히지 않고’ 말하는 것이다. 벨기에 동부 리에주, 직업을 잃은 노동력 20%가 빠져나가 철강 산업도시로서의 명성을 이미 과거에 넘겨주고 죽어버린 그런 도시. 그곳에서도 외곽에 위치한 세렝. 다르덴 형제는 “닫힌 그 공간의 종류를 재창조해야 한다”고 의지를 밝힌다. 그래서 극영화 <로제타>와 <아들> 역시 여기를 무대로 촬영한 것이다.

다르덴 형제의 첫 번째 극영화는 1986년에 제작한 <플러시>이다. 이후 두 번째 극영화 <당신을 생각해요>를 1992년에 만든다. 1994년에 설립한 극영화 제작사 FLEUVE 이후, 마치 핏줄처럼 닮은 세편의 영화 <약속>과 <로제타> <아들>에까지 극영화 작품은 모두 다섯편이 되었다. 그런데 우선 그 작업방식이 독특하다. 다르덴 형제는 “우리는 한 사람이지만, 눈은 네개”라고 표현한다. 두명이 공동연출을 할 때 상상 가능한 생산적인 분담 방식의 한 예를 드는 것으로 이 표현은 더 잘 설명된다. 주로 촬영과 편집을 맡는 장 피에르 다르덴과 사운드쪽을 맡는 장 뤽 다르덴은 촬영장에서는 한 사람은 모니터를 보고, 또 한 사람은 배우를 본다. 모니터 뒤에 있는 사람은 배우의 연기에 대해서 거론하지 않는다. 그러고 나서 자리를 바꾼다. 역시 모니터 뒤에 있는 사람은 침묵한다. 둘 사이의 의사소통은 필요없다고 한다. 말하지 않아도 의중을 이해한다고 한다. 그러니, 역으로 정말 ‘눈이 네개 달린 한 사람’의 역을 하게 되는 셈이다. 또 한 가지, 다르덴 형제의 독특한 연출방식의 예가 되는 것은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배우에게 요구하는 것은 결국 “육체적인 것”이라고 설명한다. 작업은 먼저 카메라맨 없이 시작되어, 많은 리허설로 동선을 구성해보고, 또 몇 가지 버전으로 바꿔본다. 이때는 대사에 대한 부담도 주지 않는다. 수차례 반복한 뒤 카메라는 돌아간다. 하지만 이제는 연습한 걸 정확하게 할 필요없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배우의 움직임과 디테일들이 살아난다. 그때에 가서야 대사를 시작하고 조정해나간다. 다르덴 형제는 배우가 육체로 말을 건네기를 원한다. 카메라는 그 살아 있는 ‘물질성’을 담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그들 식의 ‘리얼리즘’이며 다큐멘터리에서 극영화로 넘어오면서 발전되는 그들만의 요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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