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개의 눈을 가진 한사람
영화 <아들>은 다르덴 형제의 영화형식과 주제의 집적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약속>에서 <로제타>로, 다시 <아들>로 그들은 점점 더 발전한다. 따라서 <약속>과 <로제타>가 어떤 영화인지를 함께 짚는 것이 필요하다. 우선 <약속>. 이 영화는 처음으로 다르덴 형제의 이름을 공공연히 알렸다.
<약속>은 불법으로 이민자들을 밀입국시켜 자신의 건축 작업에 부려먹는 악덕 알선업자 아버지와 그것이 잘못인 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악행에 동참하게 된 14살짜리 소년 이고르의 이야기이다. 어느 날 경찰들이 들이닥치자, 도망치던 아프리카 이민자 남자는 건물에서 떨어지고 만다. 정신을 잃어가던 남자는 이고르에게 남겨진 부인과 아기를 돌봐줄 것을 ‘약속’해달라고 한다. 이고르는 약속한다. 하지만 남자를 발견한 아버지는 일이 커질 것을 염려하려 아직 죽지도 않은 그를 흙더미 속에 던져버리고 생매장해버린다. 아버지는 남겨진 부인조차 사창가에 팔아넘기려 하고, 아들은 그녀와 아기를 도망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러나 끝내 아버지와 자신이 남편을 묻었다는 말을 하지 못한 채 망설인다.
<로제타>는 직업을 찾아 야수처럼, 다르덴 형제의 표현대로라면 “전사”처럼 돌진하는 10대 소녀를 주인공으로 한다(한편 다르덴 형제는 로제타가 카프카의 소설 <성>의 주인공 K처럼 보이기를 바랐다고 한다). 로제타는 소녀의 이름이다. 그녀는 다니던 직장에서 해고통보를 받았다. 영화는 거기서 시작한다. 도시에서 떨어진 캠핑촌에서 근근이 살아가는 그녀에게 그것은 사형선고나 다름없다. 알코올 중독의 어머니는 술 한병을 얻기 위해 주인집 남자에게 몸을 내어주기를 마다지 않는다. 삶은 점점 더 고달파진다. 그러다가 로제타는 와플 가게 종업원 리케를 알게 된다. 그는 로제타를 친구로 대하고, 아르바이트도 소개해준다. 하지만, 그녀는 안정된 직업이 필요하다. 끝내 로제타는 사장에게 리케의 부정을 고자질하고, 그의 자리를 차지한다.
<아들>은 알려진 대로 청소년 재활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목수 올리비에가 자신의 아들을 죽인 16살짜리 소년에게 오히려 목공 기술을 가르치게 된다는 내용이다(원래 올리비에의 직업은 목수가 아니라 요리사였다. 하지만 다르덴 형제는 주인공이 칼을 집는 순간마다 복수의 행위를 연상시키는 상징성에서 벗어나고자 목수로 직업을 바꿨다). 처음에는 왜 올리비에가 그토록 소년에게 관심을 갖는지 관객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아는 순간 벌목장으로 소년을 데리고 가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과연 그가 소년에게 복수할 것인가 하는 자문에 빠진다.
강약의 차이는 있지만 다르덴 형제는 이 세편의 영화에서 꾸준히 같은 틀을 사용한다. 시종일관 음악은 배제된다. 점프컷은 도처에 널려 있다. 인물들의 대사도 많지 않다. 대신 한 발짝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핸드헬드’로 쫓아가는 카메라는 금방이라도 곧 찢어질 것 같은 포커스 아웃과 흔들림으로 가득 차 있다. 그렇다면, 도그마가 아닌가라고 누군가 생각할지 모르지만, 도그마의 형식이 선언함으로써 필요해진 것이라면, 다르덴 형제의 형식은 필요하기 때문에 선택된 것이다. “눈앞에 존재하지 않을 뿐 아니라 우리를 비껴가기도 하고,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그런 것들을 만들어내는 작업. 가능성들을 헛되이 보내버리면 안 되는 작업”이라고 다르덴 형제는 극영화를 정의한다. “다큐멘터리를 만들 때는 현실과 부딪쳐야 한다. 있는 사실을 조작하거나 움직이는 일은 안 될 말이다. 극영화에선 그걸 변형하는 일이 가능하다”라고 그 차이를 설명한다. 그러나 “우리는 다큐멘터리의 그 측면을 극영화에도 반영하려고 애쓴다. 우리에게 굴하지 않는 뭔가를 찍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을 보여주거나 모든 것을 보지 않으려고 한다. 다루기 쉽지 않은 ‘저항감’이 우리가 찍고 있는 대상에 진실과 생명을 부여해주는 것이다”라고 그 연계를 설명한다.
세계의 ‘저항감’을 포착하며 구원을 묻는다
혹시나 여기서 그들이 사용하는 저항감이라는 표현을 오해해서는 안 된다. 이건 세계에 대해 갖추어야 할 카메라의 올바른 저항적 태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허구를 만들기 위해 가공하려는 카메라의 행위에 맞서거나 걸림돌이 되는 실제의 그 물리적인 한계성을 같이 포괄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것이 거기에 있으므로 그것을 찍는다, 라고 우리는 바꿔 말할 수 있다. 이것을 전제로 다르덴 형제의 카메라는 대상의 ‘움직임’에 매달린다. 그것이 다르덴 형제가 말하는 아무것도 보지 않거나, 모든 것을 보는 방법이다. 사회의 ‘주변’에 있는, 혹은 윤리적인 갈등에 놓인, 그래서 더욱더 안절부절못하는 그들의 ‘등 뒤’를 쫓아다닐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이런 형식적인 태도가 다르덴 형제의 극영화를 공동 자멸극, 혹은 윤리적 패배에의 자극적인 이야기 함정에 빠지지 않으면서 구원적인 문턱에 치닫도록 만든다.
그래서 <약속>과 <로제타>와 <아들>의 마지막 장면은 공통적으로 같은 상태에 이른다. 죄에 대한 용서. 그러나 관계회복에 대한 여전한 유보. <약속>의 이고르는 아프리카 여인 아시타에게 모든 사실을 고백한다. 이고르와 아시타는 뒷모습을 남긴 채 길고 긴 전철 지하도를 아무 말 없이 걸어간다. <로제타>의 로제타는 친구를 배반한 것에 힘들어한다. 무거운 가스통을 들고 집 안으로 들어가다 리케를 보고는 주저앉아 울고 만다. 리케는 그녀의 뒤로 다가와 말없이 손을 내민다. <아들>의 올리비에는 소년을 벌목장으로 데리고 간다. 그러나 끝내 복수극을 펼치지는 않는다. 다르덴 형제는 인물의 입장을 바꿔가면서 질문에 대한 대답을 만들어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는 알지 못할 것이고, 영화는 끊기는 듯 갑자기 끝나버린다. 물론 그 역량을 갖고 있긴 하지만 다르덴 형제가 사회구조를 비판하기 위해서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라고 단정지어서는 안 된다. 그 반대로 서슴없이 브레송에 비유할 필요도 없어 보인다. 다르덴 형제는 자신들이 “탈계급화된 사람들”을 다룬다고 말한다. 그 구도에서조차 밀려난 이고르와 로제타와 올리비에 같은 사람들. 말을 바꿔볼까? 세상의 ‘꼽추’들을 이렇게 열심히 쫓아다니는 감독들도 그리 많지는 않다. 그러기에 <아들>의 방문은 반갑기만 하다.
다르덴 형제의 페르소나, 올리비에 구르메
평범한 얼굴로 빚어내는 퍼즐
다르덴 형제는 <아들>의 제작일지에 이렇게 적어 놓았다. “스토리라인이란 불투명하고 수수께끼 같은 캐릭터를 말한다. 아니 캐릭터라기보다는 배우 그 자신이다. 올리비에 구르메! 그의 몸, 그의 목덜미, 그의 얼굴, 안경 너머로 사라지는 그의 눈. 우리는 다른 몸, 다른 배우에 의존해서 이 영화를 상상할 수조차 없다.” 어떤 면에서 <아들>은 온전히 올리비에 구르메를 위해서 만들어진 영화이다. 장 피에르 다르덴과 리에주 예술학교에서 만나 이들 형제의 작업에 합류하게 된 올리비에 구르메는 전작 <약속>에서는 불법 이주 노동 알선업을 하는 아버지로 등장했고, <로제타>에서는 와플 가게 사장으로 잠시 출연했다. 그리고 <아들>에서는 자신의 이름 그대로를 사용하며 목수 역을 맡았다(올리비에 구르메의 이전 직업들 중에는 수리공과 목수도 끼어 있다). 다르덴 형제는 <로제타>가 끝난 뒤 올리비에 구르메를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를 한편 만들겠다고 장담했고, <아들>로 그 약속을 지켰다. 다르덴 형제의 올리비에 구르메에 대한 칭찬은 끝이 없다.“올리비에의 가장 특별한 점은 그가 전혀 특별하지 않다는 점이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런 외모고, 어떤 인물이라도 될 수 있다. 중립적인 느낌이랄까. 올리비에의 눈초리, 시선 역시 매우 독특해서 <아들>에서는 그의 눈을 가지고 시도한 것도 좀 있다. 옆쪽이거나 정면이거나 일정한 포지션에서 보면 눈을 없앨 수가 있다.” 그러고보면 약간 벗겨진 머리에, 돗수 높은 안경 너머로 숨어버린 작은 눈 때문에 그의 얼굴은 가끔씩 그저 ‘형상’인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눈에 띄는 외모는 아니지만, 특출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는 올리비에 구르메는 “퍼즐 그 자체”라는 평까지도 얻어내고 있다. 긴장으로 넘치는 <아들>의 고요함이 올리비에 구르메가 지닌 그 묘한 매력에 빚지고 있는 것으로 인정한 2002년의 칸영화제는 그에게 남우주연상을 안겨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