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빅 피쉬>의 감독 팀 버튼과 나눈 가상대화 [1]
2004-03-05
글 : 김혜리
<빅 피쉬>의 감독 팀 버튼과 나눈 꿈의 대화

팀, 당신의 표정이 낯설어요

영화를 낙으로 삼은 1990년대 젊은이들에게 다정한 영웅이었던 쿠엔틴 타란티노, 리처드 링클레이터, 구스 반 산트, 팀 버튼 같은 감독들의 최근 사진은 우리를 흠칫 놀라게 한다. 기억 속 재기발랄한 영화 청년들의 얼굴에 어느덧 내려앉은 희미한 주름과 나잇살은 묘한 충격이다. 때로는 용모뿐 아니라 영화도 세월을 헤아리게 만든다. 팀 버튼(45)의 신작 <빅 피쉬>는 20여년 동안 하나의 브랜드를 이룬 팀 버튼 영화의 비주얼을 이어받고 있으면서도, 어딘가 태도가 이질적인 영화다. 타지에서 알 수 없는 경험을 하고 돌아온 친구처럼 생김새는 그대로인데 표정이 낯설다. “왜 이렇게 변했죠?”라는 질문에 감독들은 종종 “당신의 선입견일 뿐 나는 그대로다”라고 대꾸해 우리를 머쓱하게 만든다. 그래서 우리가 진실로 그를 알았는지 찬찬히 돌아보게 한다. 무엇이 변했고 무엇이 변하지 않았는가? 만약 <빅 피쉬>가 버튼의 트레이드 마크와 동떨어진 프로젝트라면, 그가 거절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가상의 대화를 통해 추리해보았다. (<빅 피쉬> 프리뷰는 여기에) 편집자

죽음이 임박한 늙은 아버지의 곁을 지키기 위해 아들이 귀향한다. 부자는 말을 섞지 않은 지 오래다. 평생 입만 열었다 하면 허무맹랑한 모험담과 농담만 쏟아내고 진실이라곤 털어놓은 적 없는 허풍선이 아버지에게 아들은 최후의 희망을 걸어본다. “아버지가 말한 거짓과 말하지 않은 진실들을 화해시키고 싶어요. 왜 이야기들을 자꾸 꾸며냈죠? 아버지는 정말 누구죠?” 영화 <빅 피쉬>의 파란만장한 스토리는 그렇게 시작한다. 그리고 영화는 소원한 채로 영영 이별할지도 모르는 부자의 현실과 아버지가 쓴 환상적 자서전을 오가며 헤엄친다.

<빅 피쉬>는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환상과 현실의 공존에 대한 감동적인 드라마다. 유일한 문제라면, 우리가 팀 버튼의 영화에서 기대하는 바가 감동이나 가족애가 아니라는 사소한 불만뿐이다. 공평하게 말해서 그것은 관객 잘못만도 아니다. 이처럼 화려한 몽상의 이미지로 가득한 영화를 ‘직설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황당한 일일지 몰라도, 팀 버튼의 기준으로 볼 때 <빅 피쉬>는 당황스러울 만큼 직설적이다. 과거 팀 버튼이 내던지듯 자신의 악몽을 노출했을 때 아무 해몽없이 만족했으나, 그가 이렇게 변명하려는 기색을 보이자 궁금증이 솟았다. <빅 피쉬>를 본 그날, 나는 어떤 방의 꿈을 꾸었다. 침대에는 <빅 피쉬>의 앨버트 피니 대신 머리를 헝클어뜨린 팀 버튼 감독이 누워 있었다. 그의 상태는 별로 좋지 않아 보였다. 그럴 만도 하다. 냉정한 이들은 <에드우드> 이후 그의 영감이 고갈됐다고 단언하기도 했고, <슬리피 할로우>에 열광한 팬들조차 <혹성탈출>은 난감한 침묵으로 맞았다. 사실 <빅 피쉬>도 “2003년 메이저 스튜디오가 만든 메이저 감독 영화 중 최악” 운운하는 혹평 가운데 허우적거리고 있다. 지친 감독의 휴식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지만 언제 깰지 모르는 것이 꿈인지라, 침대 옆에 앉은 나는 <빅 피쉬>의 당돌한 아들처럼 물었다.

“솔직히 당황스러워요. 현실을 상징하는 아들과 판타지를 상징하는 아버지의 갈등이, 아들의 이해로 마침내 화해에 도달하는 드라마라니. 이건 스티븐 스필버그씨나 로버트 저메키스씨에게 맡겨도 되는 것 아닌가요? 전작들과 <빅 피쉬>는 비교하자면 당신의 옛 여자친구 리사 마리와 지금 애인 헬레나 본햄 카터만큼 느낌이 달라요. 정말 사람들이 말하듯 더이상 들려줄 당신만의 이야기가 떨어진 건가요?”

자신을 드러내는 고백조의 영화라면 이미 팀 버튼은 <에드우드>를 만든 적이 있다. 실존한 다른 감독의 전기물이었음에도 <에드우드>는 팀 버튼 이외의 연출자를 떠올리기 힘든 영화였다. 반면 <빅 피쉬>는 <에드우드>보다 <캐치 미 이프 유 캔>이나 <포레스트 검프> <백 투 더 퓨처>의 형제처럼 보인다.

생각을 읽은 것처럼 팀 버튼이 말문을 열었다. “그렇지만 <빅 피쉬>가 그들과 달리 미국 현대사의 주요 장면과 시대 분위기에 무관심하다는 점을 모르진 않았겠죠? 연대의 힌트는 영화관에 걸린 <지상에서 영원으로> 정도죠. 그리고 흥행 대가들을 거명했는데 혹시 <빅 피쉬>가 상업적 타협이라고 생각해요? <빅 피쉬>가 7500만달러짜리 영화로서 도박인 까닭은, 대스타가 없어서가 아니라, 내 트레이드 마크와 거리가 있는 영화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어요.”

적잖은 평자들이 <빅 피쉬>의 팀 버튼이 변했다면 2000년 이후 부모를 여읜 경험 때문일 거라고 지적한다. 버튼은 <혹성탈출> 로케이션 헌팅 중이던 2000년에 아버지를, 지지난해에 어머니를 연달아 잃었다. 하지만 이도 좀 맥빠지는 해설이다. 일찍이 할머니 손에서 자란 팀 버튼은 영화 속 몬스터보다 엄마가 무섭다고 말했던 사람이다. ‘반항아’ 팀 버튼 안에 깃든 윗세대의 과거에 대한 그리움과 동경을 찾자면 굳이 사생활까지 갈 필요도 없다. 어떤 동시대 영화보다 무성영화와 해머 호러의 세계를 희구하는 그의 영화 속에서 팀 버튼은 빈센트 프라이스, 레이 해리하우젠, 페데리코 펠리니 같은 ‘아버지’들에게 무한한 존중과 애정을 끈질기게 표해왔다. 아는 척하는 나를 팀 버튼이 일축한다. “생전에 어땠건 부모의 죽음은 누구에게나 동요를 일으켜요. 그보다 내가 최근에 아빠가 된 걸 알죠? 분만실에 들어갔는데 웬 퍼렇게 질린 핀헤드(머리에 바늘이 잔뜩 꽂힌 호러 캐릭터)가 누런 오물을 뒤집어쓰고 나오더라구요. 평생 이상하다 괴상하다는 말에 둘러싸여 살았지만, 내 아이야말로 최고로 그로테스크했어요. 그러니 부자관계는 내 전문 영역 밖이라는 말 따위는 관둡시다.”

핀헤드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빅 피쉬>에서도 팀 버튼의 ‘프릭쇼’는 계속된다. 늑대인간, 양을 잡아먹는 거인, 유리 눈의 마녀, 다리가 한쌍뿐인 샴쌍둥이 자매, 사람 잡는 나무는, <빅 피쉬>가 변화는커녕 의심할 여지없는 팀 버튼 표 영화라고 믿는 관객의 근거가 된다. 그러나 이 캐릭터들에게 주어진 반경은 분명 달라졌다. 지금까지 환상 안에 살며 현실을 외계를 엿보듯 곁눈질했던 팀 버튼은 <빅 피쉬>에서 판타지를 판타지라 부른다. 거짓말로 분류하고 액자에 가둔다. 이제 와서 객관적 진실은 환상에 비해 과대평가됐다는 선언을 새삼 하고 싶었을까? 그런 면에서 <빅 피쉬>는 영화 <스탠 바이 미>에서 고디가 친구들에게 들려주는 기상천외하고 엽기적인- 그래서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는- 이야기 속 이야기와 닮았다. “잠깐. 내가 기이한 캐릭터들을 편애한다고 그들이 비현실적이라는 점을 모른다는 뜻은 아니죠. 기억 안 납니까? <배트맨> 때도 난 ‘이건 박쥐로 변장한 남자 이야기다. 뭐니뭐니해도 웃긴 거다’ 라고 말한 적이 있죠.”

그렇다면 고쳐서 말해보자. “<피위의 대모험> <가위손> <유령수업> <배트맨>에서는 괴짜 아웃사이더가 정상성의 세계에 편입하려고 하다가 실패해요. 그런데 <빅 피쉬>는 반대예요. 강고한 것은 아버지가 지은 판타지의 세계고 부적응과 소외를 겪는 것은 현실주의를 말하는 아들이지요. 정상적인 것이 약자의 위치에 서면서 증오와 서스펜스는 사라져버렸어요. 그러나 그렇게 이룬 화해는 거짓 아닐까요?” 벌떡 일어난 팀 버튼은 유명한 버릇대로 방 네 모서리가 닳도록 왔다갔다하기 시작한다(그는 세트 안에서 3주간 200마일을 걸은 기록도 있다). 일찍이 그의 스탭들은 버튼의 종종걸음이 극히 중요한 것 아니면 질문을 아예 봉쇄하는 방어책이라는 점을 간파한 바 있다. 마침내 그는 귀찮아하며 보도자료용 메모를 꺼내 읽는다. “<빅 피쉬>는 리얼한 것과 판타스틱한 것, 진실과 진실이 아닌 것, 부분적으로 진실인 것 모두가 마침내 어떻게 모두 진실해지는가를 말하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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