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고독이 몸부림칠 때> 촬영일지 [1]
2004-03-12

초짜 감독이 고참 배우들 모시고 몸부림칠 때<고독이 몸부림칠 때> 이수인 감독의 층층시하 좌충우돌 제작일기

첫 영화를 세상에 내놓는 일은 천지신명이 물심양면으로 도와도 허리가 휘는 작업이다. 나 혼자 이 악문다고, 나 혼자 재미있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 더 힘들다. 그리고 고독하다. 친숙한 연극무대를 떠나 신인 영화감독이 된 <고독이 몸부림칠 때>의 이수인 감독에게는 유난히 데뷔 여정에 동행이 많았다. 매체를 넘나들며 누가 감히 뭐랄 수 없는 공력과 경력을 쌓은 베테랑 연기자들은 천군만마처럼 든든한가 하면 문중 어르신들처럼 어렵기도 했다. 넘치는 애드리브 아이디어에 벅찬 날도 있었고 연출할 수 없는 ‘선수’들의 에너지를 포착했다 쾌재를 부를라치면 고장난 장비가 재를 뿌리는 날도 있었다. 속으로는 몸부림쳐도 언제나 낙천적이었던 데뷔 감독의 몸살 기운 어린 촬영일지를 훔쳐보았다.

6월8일_ “선생님, 굿 아이디어… 는 다음 작품에서^^”

시나리오 독회. 이번이 두 번째다. 몸이 안 좋아 첫번 모임에 못 나왔던 김무생 선생도 참가했다. 주현, 양택조, 송재호, 선우용녀, 김무생, 이주실, 박영규, 진희경…. 처음으로 주역급 배우들이 다 모인 날이다. 두 아역배우를 빼놓고는 진희경이 제일 어리다. 목소리 크고 활달한 진희경이 맨 구석에 얌전히 앉아 숨도 크게 못 쉬고 ‘찌그러져’ 있다. 노땅들은 신이 났다. 푸하하 킬킬 켈켈, 무슨 할말이 그리도 많은지 지치지도 않고 침을 튀겨댄다. 누구는 주민증을 까가면서 바득바득 자기가 한살 위라고 우겨대고, 누구는 입봉 연도를 따져가며 자기가 대선배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산만하기 이를 데 없는 잡담과 수다. 참견하기 좋아하는 박영규 선배가 중간중간 끼어들어 보지만 똘똘 뭉친 고참들 앞에서 즉시 심한 따돌림을 당한다. ‘쟤는 여기 왜 왔냐?’, ‘누가 쟤한테 말 걸었냐?’ 그런 표정들이다. 모자만 안 썼다 뿐이지 분위기는 완전히 예비군 훈련장이다. 어쨌건 다들 기분은 울트라 하이 업이다. 1시간도 넘게 오간 수다는 결국 ‘연기 생활 30년 만에, 한 시절을 함께 풍미해왔던 우리가, 이렇게 똘똘 뭉칠 날이 오다니, 참으로 놀랍고 감격스럽지 아니한가!’라는 유쾌한 주제를 다시 확인하면서 마무리가 된다.

리딩이 시작된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도 서로에게 지지 않으려는 ‘라이벌’들의 신경전은 치열하다. 각종 오버도 심심찮게 난무한다. 누군가가 갑자기 떠오른 아이디어를 슬쩍 꺼내놓으면 우르르 다들 한마디씩 보태면서 정신없이 신나한다. 상당 부분은 이른바 ‘쌈마이’ 아이디어다. 말도 안 되는 얘기도 더러 있다.

“오, 선생님 그거 정말 좋은 아이디어입니다. 요번에는 좀 그렇고… 선생님 다음 작품에서는 그거 꼭 하세요.” “요번에는… 하지 말자고?” “네.” 풀 죽은 반응이 돌아온다. “재밌는데….”

6월18일_ 주현 vs 박영규, 제1라운드!

다시 독회. 다들 아주 재미있어 한다. 자기 안에 있는 개구쟁이 기질을 새삼 발견하고 그걸 드러낼 수 있다는 게 신나는 모양이다.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몰입하는 모습들이 아름답기까지 하다. 누구나 나이를 먹는다.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삶이 시시해지거나 추해지는 건 아니다. 어쩌면 철모르는 젊음이야말로 오히려 나약하고 남루한 것일지도 모른다. 청춘은 그저 추억할 때만 아름다운 게 아닐까. 나의 20대를 떠올려본다. 참담한 혼란과 정신박약의 그 시절이 나는 별로 그립지 않다. 그때 나눈 사랑만 빼고. 이런저런 잡념에 막 빠져들려는 찰나 갑자기 박영규 선배의 크고 빠른 목소리가 들린다.

주현 선생이 대사를 끝마치자마자 “형, 그 대사 그거 무지하게 중요한 건데 그렇게 읽으면 재미 하나도 없잖아. 나 같으면 이렇게 할 것 같애” 하면서 남의 대사를 갖고 마구 시범을 보인다. 그다지 나아 보이지 않는다. 저래도 되는 건가, 10년이 넘는 연배 차인데, 단둘이 있으면 또 몰라도. 얼른 주현 선생의 표정을 살핀다. 역시 자존심 엄청 망가진 기색이 역력하다. 그래도 꾹 참고 고개까지 끄덕여가며 경청하는 주 선생. 박영규 선배는 시범을 보이는 걸로도 모자라 남의 캐릭터 분석까지 장황하게 곁들인다. 워낙 솔직하고 직선적인 성격이다. 그래도 그렇지, 자기 대사나 좀 잘하지 웬 참견이람.

한참 뒤, 박영규 선배가 꽤 민감한 대사 몇 마디를 막 끝마칠 무렵 주현 선생이 한마디 한다. “야, 영규야, 그 상황에서 그 대사가 그게 그렇게 막 큰소리로 화를 내고 할 대사냐? 스스로 한심해 하면서, 응, 안으로 삭이면서 해야 되는 거 아니냐? 감독님은 어떻게 생각해요?” 절치부심, 복수의 타이밍을 엿보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어쨌건 이 시점에서는 약간의 정리가 필요하다. “뭐 모범 답안이 있는 건 아니지만, 방금 대사는 주 선생님 말처럼 조금 복잡한 뉘앙스로 들리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어쩌고저쩌고….” 가만히 있던 양택조, 송재호, 김무생 선생들도 나서서 한마디씩 거든다. 다들 주현 선생 편이다. 차제에 박영규 선배의 기를 좀 꺾어놔야겠다는 공감대가 만들어진 분위기. 노땅 연합군의 일사불란한 지원에 주 선생의 입이 보일 듯 말 듯 벌어진다.

이수인/ <고독이 몸부림칠 때>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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