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16일_ “송 선생님, 사투리 하향 평준화를 제안합니다”
아침부터 안개비가 섬 전체를 감싸고 있다. 그래도 괜찮다. 오늘은 목욕탕 장면이니까! 중달, 찬경, 필국(송재호), 물건리 불알친구 삼총사가 처음으로 함께 출연하는 신이다. 그런데 뒤늦게 도착한 양 선생의 몸상태가 말이 아니다. 허리와 엉덩이 부위 전체에 띠처럼 넓게 포진이 생겼다고 한다. 악명 높은 대상포진이다. 아픈 부위를 보니 상태가 심각하다. 그 고통을 무릅쓰고 남해까지 내려오신 거다. 어쨌건 보통 문제가 아니다. 거기다 종일 욕탕에 몸을 담그고 나면 증상이 더 악화될 게 뻔하다.
8월24일_ “공옥진 여사님 만수무강 하시라, 할렐루야”
바로 옆 교회에서 들리는 찬송가 소리다. 일요일도 아니고 수요일도 아닌데… 알고보니 부흥회란다. 제작부장이 어찌어찌 목사님한테 쪽지를 건네긴 했다지만 아무래도 집회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찬송가만 부르지 말아달라고, 통성기도만 자제해달라고, 사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공 여사는 언제 시작하느냐고 거의 5분 간격으로 물어보신다. 다행히 예상보다 일찍 집회는 끝이 났다. 제작부장 말로는 목사님이 각별히 마음을 써주신 결과라고 한다. 거기다 돌아가는 신도들에게, 송재호 장로님이 출연하시는 영화를 찍고 있으니, 기도하는 마음으로 최대한 조용히 귀가해줄 것을 당부하셨단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잘 찍어야겠다.
9월24일_ “덜 딴따라 같고, 적당히 궁상맞게!”
단 하루 동안의 서울 촬영. 간만에 와보는 종로3가 뒷골목이다. 중범이 술집에서 대머리 아저씨를 처음 만나는 장면이다. 오랜만에 집에서 자고 나온 날이건만 몸이 너무 무겁다. 몸살이 점점 심해지고 있다. 걸을 때도 신음소리가 절로 난다. 그러나 쉴 수 없다. 스케줄이 안 나오기 때문이다. 씨발, 도대체 왜들 그렇게 바쁜 거야? 촬영기사가 작전회의를 요청한다. 이렇게 스케줄이 밀리는 상황에서는 하루 전날 작전회의 하는 건 꿈도 못 꾼다. 처음에 짜둔 콘티를 기본으로 그날그날 현장에서 모든 걸 결정하는 수밖에 없다. 하긴 전날 작전을 다시 짜도 현장에 오면 늘 바뀌게 마련이다. 박기웅 촬영기사는 말이 참 빠르다. 어떨 땐 숨도 안 쉬고 말하는 것 같다. 오늘따라 말이 더 빠르게 느껴진다. 윙윙윙…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박 기사님….” “예.” “숨을 좀 쉬면서 말하는 게 어때요?” “아, 예. 전 괜찮습니다만….” “내가 안 괜찮아요. 작전이고 뭐고, 한컷 한컷 찍어가면서 봅시다.” “예… 뭐, 그러시지요.” 컨디션에 비해 촬영은 일사천리로 진행이 된다. 결과도 만족스럽다. 특히 대머리 아저씨 역할을 한 이원기(원필름 대표)씨의 연기 아닌 연기가 일품이다. 박영규 선배는 노래를 너무 잘 부른다. 밤무대 가수 같다. “너무 딴따라 같지 않아요?” “어, 그래? 알았어 알았어. 다시 해볼게.” 이번에는 너무 처절하다. “너무 궁상맞지 않아요?” “어, 그래? 알았어 알았어. 안 궁상맞게 해볼게.”
결국은 덜 딴따라 같으면서, 적당히 궁상맞은 노래가 나온다. 딱 중범이다.
10월2일_“선생님들… 밥먹고 합시다!”
드디어 마지막 촬영날이다. 진봉(김무생)의 집안. 진봉이 공기총을 닦다 오발 사고를 내는 장면과 중달이 몰래 찾아와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드는 장면을 연이어 찍어야 한다. 김무생 선생은 연기 구상을 치밀하게 해오는 스타일이다. 주현 선생은 현장에서 포착해내는 즉흥적인 감각과 순발력이 뛰어난 반면, 각 장면들이 드라마 전체에서 가지는 기능과 맥락에 대해서는 좀 약한 편이다. 그래서 나는 촬영 직전에는 늘 일대일 대화를 통한 브리핑을 꼼꼼하게 해왔다. 주 선생은 그 방식을 매우 신뢰하고 마음에 들어한다. 그래서 감독이 어떤 주문을 해도 일단 받아들이고 따라준다.
그런데 오늘은 뭔가 좀 삐걱거린다. 불필요한 애드리브가 너무 많다. “에이 선생님,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요.” 주 선생의 얼굴에 불만이 가득하다. 보름 전 담배를 끊은 이후로 주 선생은 유난히 예민해져 있다. 당황스럽다. 거기다 그 애드리브를 빼버리니까 뭔가 허전하고 빈약해 보인다. 얼른 대안을 찾아야 한다. 스탭들은 나만 쳐다보는 것 같다. ‘빨리 생각해야 돼, 빨리!’ 낑낑대며 머리를 굴려보지만 역시 떠오르질 않는다. 갑자기 배가 살살 아프다. 묘안이 떠오른다. “저기… 우리… 밥먹고 합시다!” 스탭들의 표정이 행복해진다. 곡절 끝에, 그래도 예상보다 훨씬 빨리 마지막 촬영이 끝난다. 기대만큼 감동적이진 않지만 크랭크업은 역시 짜릿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