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용서의 드라마로 돌아온 배창호의 신작 <길> [2]
2004-03-26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사진 : 정진환

‘원형질적인 것’과 ‘배창호적인 것’

배창호 감독은 <황진이> 이후 자신의 영화가 변화했다고 늘 말한다. 거기에 한번의 전환을 더 덧붙이자면, <젊은 남자> 이후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꼬방동네 사람들>(1982)로 시작한 필모그래피는 <고래사냥>(1984)을 기점으로 흥행사로서의 80년대를 지났으며, <황진이>(1986) 이후 적지 않은 실험작 목록을 남겨놓았다. 그러나 명백히 <천국의 계단>과 <젊은 남자>는 젊은 세대들의 감성에 밀착되지 못했다. 오히려 그 다음이 지금의 <길>을 설명할 수 있는 궤도이다. 그는 자신의 세대적, 또는 내적 감성으로 회귀했다. <러브스토리>에서부터 <정>과 <흑수선>을 지나 <길>까지 젊은 세대들을 뒤쫓기보다는 과거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으면서, 그가 말하고 싶어하는 “한국적인 것 속에 있는 배창호적인 것, 우리 원형질적인 것” 안으로 관객이 들어오기를 바라고 있다. ‘원형질적인 것’과 ‘배창호적인 것’. 이 말이 덩어리째 들린다. 그는 <길>에서 가장 고민스러웠던 부분으로 산길을 내려오는 라스트신의 편집을 꼽았다. “봄이 오는 들판을 걸어가는, 또는 염전길을 걸어가는 주인공의 모습으로 그릴 수도 있었다. 한 장면만으로는 괜찮을 수 있었다. 재촬영하기 위해서 염전길까지 갖다왔다. 하지만 맞지 않아서 쓰지 않았다. 조금만 감정을 더 주면 강요하는 것 같고, 덜 주면 모자란 것 같았다.”

보통 사람과의 소통을 믿는다

배창호 감독은 사람들이 못미더워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왜 도대체 <길>이라는 그런 “진부한 제목으로 영화를 만드느냐”고 물을 걸 충분히 짐작한다. 하지만 그는 “이 이야기가 시시한 것을 안다. 근친상간을 주고 상처를 주고 이래야 요즘 세상에서 되는데, 나는 인간의 악을 이 영화에서만큼 정도로 표현하면 됐다고 판단한 거다. 더 큰 악을 넣어도 소용없다”라고 말한다. 영화의 주인공 태석은 지난 시절 득수와의 모든 관계를 용서한다. 자신을 기다린다는 말을 듣고 찾아간 아내의 집. 그러나 태석은 이미 늙은 아내와 성장한 아들과 그의 며느리가 될 사람이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것을 보고 나서 뒤돌아 다시 길을 떠난다. 이 시시한 이야기의 틀은 말 그대로 그가 생각하는 원형질적인 용서의 드라마다. 때문에 자극은 없다. 또, 배창호적으로 풀어내는 용서와 길떠남은 더이상의 자극없이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기를 바라는 마음의 표현이다. 그의 영화 <길>이 추구하는 것은 바로 ‘보통의 진리’이다. 보통의 언어로 말해서, 극장을 찾는 관객이 한편의 영화를 보며 그 영화에 담긴 철학과 미학을 모두 이해하며 보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들 대부분이 기뻐하는 것은 그 안에 담겨 있는 그 보통의 진리때문이다.

“흔히 인생을 ‘길’에 비유한다. 우리 삶을 살아가는 것은 길 위의 나그네 같다는 것이다. 나는 영화를 안내인이라고 생각한다. 길을 떠난 나그네들이 갈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맬 때 희미하게나마 길을 비춰 주는 작은 안내인의 역할이 영화의 이상적인 직분이라고 여기고 있다.” 그의 에세이집에 쓰여 있는 말이다. 배창호 감독이 그 길로 초대하고 싶은 사람은 어쩌면 평범한 당신일 수도 있다.

:: 배창호 감독과 ‘길’

우리 모두 길 위의 인생 아니겠나

배창호 감독의 ‘길’에 대한 관심은 유별나다. 그는 이번 영화와 동일한 제목인 페데리코 펠리니의 <길>을 보았던 어린 시절 감동에 대해 자주 언급한다. 한편, 에세이집 <창호야 인나 그만 인나: 배창호 감독의 영화 이야기>에서는 길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이렇게도 말한다. “나는 유독 ‘길’을 비유로 한 문학작품이나 영화를 좋아한다. 내가 만든 두편의 로드무비인 <고래사냥>과 <안녕하세요, 하나님>도 모두 인생이라는 길 위에 선 나그네로서의 우리의 모습을 그린 작품들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많은 시들 가운데서도 특히 로버트 프로스트의 두 작품 <잠들기 전에 가야 할 먼 길>과 <걸어보지 못한 길>을 좋아한다. 두 작품 모두 삶의 여행의 의미를 느끼게 해준다.” 스스로 밝히듯 그는 이미 오래전에 길 위에 있는 여행자들을 주인공으로 한 두편의 영화를 만들었다(여기에 <고래사냥>의 후속작 <고래사냥2>를 추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괴짜 도인(안성기)과 어수룩한 대학생(김수철), 그리고 창녀촌에서 구해낸 순진한 시골처녀(김미숙)의 동행기를 그린 <고래사냥>은 주제가를 히트시키며 1984년 당시의 청춘들을 스크린으로 불러들였다. 또, 1987년에 만든 <안녕하세요, 하나님>에서는 뇌성마비 장애자(안성기)와 늙은 괴짜시인(전무송), 미혼모(김보연)가 함께하는 여행기를 역시 그렸다. 한국 영화사에는 ‘길의 영화’(혹은 서구식으로 로드무비)라고 부를 만한 영화들이 있는데, 이만희 감독의 <삼포가는 길>, 이장호 감독의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와 같은 영화들이 그것이다. 배창호 감독의 영화세계가 줄곧 그 길의 영화사와 연관되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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