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한국영화의 ‘소년성’에 대한 단상 [1]
2004-04-06
글 : 허문영 (영화평론가)

“한국영화는 지금 소년기의 막바지에 다다랐다.” 승승장구 관객 1천만 시대를 열고 있는 지금, 영화평론가 허문영씨는 한국영화의 현재를 이렇게 진단한다. 한국영화가 산업적 절정기에 있다는 일반론만으론 쉽게 납득하기 힘든 이 주장은 서로 다른 영화들의 내적 논리를 종횡으로 엮은 예민한 통찰의 결과다. <공동경비구역 JSA>부터 <태극기 휘날리며>까지 관객의 폭넓은 호응을 얻었던 다수 한국영화가 갖고 있는 서사구조의 특징은 한국영화의 현실을 직시하는 데서 미래를 내다보는 것까지 아우른다. 이 글을 통해 한국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어떤 경향을 함께 들여다보자.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가장 의아스런 장면은 이 영화의 결말이다. 노인이 된 오늘의 진석이 형의 유골 앞에서 오열하는 장면으로 끝날 듯하다가, 곧이어 한국전쟁 직후에 집으로 돌아온 청년 진석이 그의 가족들과 만나는 장면이 등장한다. 카메라는 공중으로 솟아오르며 황량한 폐허 한가운데 홀로 남겨진 진석의 모습을 비춘다. 이것이 결말이다. 어떤 사건도 벌어지지 않으며, 새로운 정보도 없는 이 장면은 이야기상으로 사족일 뿐 아니라 오늘의 서울에서 시작한 영화의 도입부와 조응하지도 않는다.

왜 이런 결말을 택했을까. 밋밋한 풍경 안에서 울먹거리는 노인의 모습보다 거대한 스케일로 재현된 서울의 폐허와 원빈이라는 스타의 용모가 합주하는 스펙터클로 끝맺고 싶어서일까. 아니면 전쟁을 과거완료형으로 남겨두려는 감독의 욕망 때문일까.

동기야 무엇이건 이 인상적인 결말은 <태극기 휘날리며>라는 영화 전체를 하나의 이미지로 수렴한다. 그것은 홀로 남겨진 소년이라는 이미지다.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정점에 이른 이 이미지야말로 1990년대 후반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 관객을 사로잡았던 영화들을 관류하고 있는 이미지다. 그리고 그것은 한국영화의 르네상스 도정에서 가장 흥미로운 주제 가운데 하나다.

1. 왜 영웅이 아닌 소년인가

일반적으로 성공적인 장르영화, 특히 액션영화는 공동체가 직면한 문제 해결을 위해 헌신하는 영웅의 이야기를 통해 대중의 불안을 달래고 대리 만족을 제공한다고 가정돼왔다. 언어학자 로빈 라코프의 말의 빌리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리는 창과 칼을 들고 들판에 나가 우리를 위해 싸워줄 아빠, 왕, 신, 영웅, 챔피언을 원하고 있다.” 장르영화는 자신의 주인공을 이런 인물로 그려냄으로써 대중의 잠재적 요구를 만족시킨다. 어떤 문화권이든 최고의 흥행작들 중에서 이런 영웅담을 찾기란 어렵지 않다.

<반지의 제왕>에선 모든 종족 가운데 가장 왜소한 호빗족의 남루한 소년이 지상의 안녕을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영웅의 역할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마침내 완수한다. 초역사적 상상력에 의해 변주되긴 했지만 고전적 영웅서사의 패턴을 채용하고 있는 셈이다. <매트릭스> 시리즈의 네오, <스파이더 맨>의 거미 인간, <엑스맨>의 선한 돌연변이들 역시 인간 공동체를 위해 싸우는 영웅들이다. <춤추는 대수사선>의 형사, <모노노케 히메>의 공주 역시 이 범주에 속한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소개됐으며 자국에서 대단한 선풍을 일으킨 타이 액션영화 <옹박>도 부락의 위기 극복을 위해 도시로 나선 청년의 무용담이다(이 영화는 프랑스에서 400여개의 스크린을 통해 개봉되며, 한국에서 곧 개봉될 예정이다). 장르의 고전기가 끝난 지 오래지만 각국의 많은 대중영화들은 여전히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는 영웅들에게서 대중적 교감의 통로를 찾고 있다.

시선을 한국영화에로 돌리면 사정은 전혀 달라진다. 성공한 한국의 장르영화에서 공동체 영웅은 오히려 희귀한 존재다. 2000년대 최고의 흥행작 4편인 <친구> <공동경비구역 JSA>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만 놓고 봐도 이 점은 분명하다. 주인공들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지닌 결함과 균열 때문에 고통스런 상황에 직면하지만, 공동체의 문제 자체엔 관심을 갖지 않는다. <실미도>에서처럼 주인공이 국가권력과 정면충돌하는 순간에도, 그들의 목적은 공동체의 문제 해결이 아니라 자신들의 존재를 승인받는 것이다. <태극기 휘날리며>의 진태는 공동체의 문제엔 일말의 관심도 기울이지 않으며, 사랑하는 동생이 살해됐다고 판단하자 적의 편에 가담한다.

드문 예외가 <쉬리>다. 주인공의 직업부터 국가정보기관 요원이며, 그는 국가적 재난을 초래할지도 모를 테러를 영웅적으로 막아낸다. <쉬리>가 국내에서 성공한 한국영화 가운데 해외에서 비할 바 없이 좋은 흥행성적을 올린 사실은 이 영화의 영웅서사가 지닌 보편성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위에 적은 영화들만큼의 흥행성적을 올리진 못했지만 <공공의 적>도 이런 예외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흥미로운 건 전작에서 다분히 고전적인 영웅을 채용했던 <쉬리>의 강제규 감독, <공공의 적>의 강우석 감독이 전혀 다른 유형의 주인공을 내세운 <태극기 휘날리며>와 <실미도>로 기록적인 흥행성적을 올렸다는 점이다). 〈2009 로스트 메모리즈>와 <튜브> 등은 고전적 영웅을 등장시켰지만 성공하지 못한 사례들이다.

전부는 아니지만, 공동체에 헌신하는 남성영웅이 아니라 홀로 남겨진 소년에 몰두한 한국영화들이 대대적인 성공을 거둬왔다는 점은 분명하다. 물론 이것이 한국 장르영화들의 미성숙을 뜻하는 건 아니다. 하나마나 한 이야기지만 주인공의 성숙도와 영화의 질과는 무관하다. 오히려 고전기 장르의 진화 패턴을 보면, 공동체에 무심하거나 사악한 공동체와 단절한 채 단독자의 길을 걷는 주인공은 대개 진화의 마지막 단계에 등장한다. 공동체로부터 버림받은 두 전설적인 무법자의 도피 여정을 그린 <내일을 향해 쏴라>(1969)는 고전기 영웅 존 웨인이 스크린에서 거의 사라진 뒤에 만들어졌다.

그러나 영웅은 언제나 되돌아왔고, 상업적으로 성공한 영화목록의 다수는 영웅담이 채워왔다. 한국영화에선 그렇지 않았다. 위대한 영웅이 아니라 가련한 소년에게 이만큼 열렬하고 광범한 대중적 갈채를 보내는 곳은 아마도 한국 외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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