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한국영화의 ‘소년성’에 대한 단상 [2]
2004-04-06
글 : 허문영 (영화평론가)

2. 소년들은 무엇으로 사는가

몇몇 비평가들은 한국영화가 고아의식에 사로잡혀 있다고 지적한 적이 있다.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까지 개봉된 이 시점에서 보면 그것은 극복돼야 할 결함이라기보다는 한국영화의 중요한 징후이자, 많은 한국영화의 장르적 성격과 밀접하게 연관된 구성적 요소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고아의식이라는 용어는 소년성으로 대체하는 것이 좀더 유용할 듯하다. 성공한 한국 대중영화들에는 영웅성의 자리를 소년성이 차지하고 있다. 이 소년성이 한국 장르영화의 불안정하며 변칙적 성격을 결정하는 핵심적인 요소다.

여기서 소년성은 주인공들의 신체 연령이 아니라 영화의 이야기 속에서 드러나는 그들의 욕망과 그들이 맺는 관계의 성격을 지칭한다. <실미도>의 설경구, <공동경비구역 JSA>의 이병헌을 일반적인 의미에서 소년이라 부를 수는 없지만 그들은 어떤 소년성을 공유하고 있다. 원작 일본 만화의 제목을 그대로 옮겨온 것이긴 하지만 <올드보이>라는 제목은 그래서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늙었지만 여전히 소년인 것이다. 소년성에 몰두하는 한 어떤 장르이건 성장영화의 성격이 가미된다. 여기엔 위에 적은 영화들뿐만 아니라 <말죽거리 잔혹사> <지구를 지켜라!>도 함께 이야기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들의 소년성에는 반복적인 특징이 있다.

1) 아버지의 부재

<태극기 휘날리며>의 두 형제에겐 아버지가 없다. <실미도>와 <친구>에서 주인공의 아버지는 언급되거나 짧게 등장하지만 구체적인 캐릭터가 아니라 주인공에게 가난 혹은 뒷골목의 삶을 운명지어주는 하나의 기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건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부재한 아버지의 기능과 거의 같다. 다른 많은 한국영화들에는 <공동경비구역 JSA>처럼 아예 아버지의 존재가 등장하지 않거나 이야기상에서 구성적 요소를 맡지 않는다. 양상은 다르지만 <올드보이> <말죽거리 잔혹사> <지구를 지켜라!>도 여기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어느 경우든 소년은 홀로 남겨진다.

주인공이 어른이라면 이야기의 효율성을 위해 아버지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게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소년에겐 다르다. 아버지는 어디로 갔는가. 혹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위의 영화들에서 실은 아버지가 있다. 다만 공동체의 효과, 혹은 공동체의 흔적으로 존재할 뿐이다. 그 공동체는 나쁜 공동체다. 전쟁이란 참화를 예고없이 들이밀거나, 가난을 세습화하거나, 이데올로기의 이름으로 인간적 연대를 파괴한다. 아버지는 나쁜 공동체의 희생자이거나 무기력한 메신저에 불과하다. 아버지의 법을 집행해야 할 생물학적 아버지는 처음부터 없거나 그런 능력을 상실했고, 소년은 맨몸으로 나쁜 공동체에 내던져진다.

소년은 어떻게 남자가 되는가. 아버지의 법을 내면화하든가 아니면 스스로 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양자 다 성공하지 못한다. 공동체는 그를 받아들이지 않고(혹은 소년은 공동체에 편입되는 방법을 알지 못하거나 아예 관심이 없고), 아버지되기는 회피되거나 지연된다.

2) 사라지는 여인들

소녀가 아니라 소년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소년은 공동체의 일원으로 정식 수용되기도 전에 홀로 내던져졌으나 생물학적 성장은 완료됐다. 사회적으로는 소년이지만 육체적으로는 남자인 것이다. 한국영화의 소년들에게 여인들은 성욕의 대상인 동시에 미지의 이름이다. 소년은 여인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거나 그녀의 성기만 바라본다. 이것이 내러티브상으로는 여인이 부름에 답하지 못하거나 자꾸 사라지거나 아니면 오직 성기의 기능으로만 등장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여인이 가족의 일원인 경우에조차 그러하다. 이는 정신분석학적으로는 아버지의 부재와 연관돼 있다. 근친상간을 금한 아버지의 법이 미약했으므로 소년의 욕망은 충분히 억압되지 못한 것이다.

<친구>에서 준석의 결혼생활이 짧게 비칠 때 그는 구제불능의 마약중독자였다. 아내는 아내의 위치에 서지 못하고 준석에 의해 아무 남성에게나 다가갈 수 있는 성기로 취급된다. 그가 가까스로 마약중독에서 벗어났을 때, 아내는 재판정에서 잠깐 얼굴을 비칠 뿐 더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어머니는 처음부터 말을 할 수 없는 존재로 설정된다. 진태의 약혼녀는 희생자로 그려질 뿐이며, 진석은 형의 유골 앞에서 눈물 흘리지만 그녀의 유골에 대해선 말하지 않는다. <실미도>에서 여인은 성기를 유린당하며 카메라의 시야 밖에서 비명을 지른다.

<말죽거리 잔혹사>에서도 어머니는 언급되지만 등장하지 않으며 여자친구는 여신과 성기 사이를 불안하게 오간다. 드물게 아버지가 되어도 문제가 생긴다. <올드보이>에서 내러티브에서 누이와 딸은 처음부터 자신의 자리에 있지 않고 소년/남자에게 성기로 다가온다.

3) 애타게 형제애를 찾아서

나쁜 세상에 홀로 남겨진 소년은 이제 자신이 속할 수 있는 유사가족을 찾아나선다. 이것이 같은 처지의 소년들과의 강렬한 연대로 나타나며, 많은 한국영화들은 소년들의 형제애의 추구와 실패를 이야기의 줄기로 삼는다. 형제애의 비극적 실패야말로 이 영화들이 가진 정서적 호소력이 핵이며 관객 1천만 시대를 가능케 한 무기다. 메가 히트를 기록한 많은 한국영화들이 남성 멜로드라마 혹은 남성 신파의 외양을 띠게 되는 경위다.

<친구>에서 이상한 점은 주인공들 스스로 정의한 오래 두고 가까이 사귄 벗이라는 정의에 들어맞는 친구는 하나도 없는데도, 특히 상택과 준석은 서로에 대한 지극한 애정을 변함없이 보존한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그 둘의 우정이 빚어내는 정서적 힘은 굉장하다.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형제라는 점을 감안해도 진태의 진석에 대한 태도는 우애를 넘어 거의 동성애처럼 보일 만큼 강렬하다. <공동경비구역 JSA>의 네 병사의 우정과 <실미도>의 북파요원들 사이에 형성되는 동지애 역시 목숨을 걸 만큼 절대적인 가치이며, 공동체의 가치는 고려조차 되지 않는다. 이들을 홀로 내동댕이쳤으며, 형제애라는 마지막 구원마저 파괴하는 것은 공동체의 질서 혹은 공동체의 숙명이다.소년에게 공동체는 이해할 수 없는 사탄이며 역사적 시간은 악몽이다.

이들과 다른 선택을 한 소년이 있다. <지구를 지켜라!>의 병구다. 놀랍게도 가장 초라하고 덜떨어져 보이는 병구만이 홀로 남겨진 자신의 문제를 공동체 전체의 문제와 연관시켜 파악하는 능력과 공동체의 구원을 위해 헌신할 의지를 지녔다. 그러나 소년이 자신의 소년성을 뛰어넘으려 한 결과는 처참했다. 유일한 영웅이었던 그의 노력은 무참하게 실패했고, 영화의 흥행성적도 끔찍했다. 병구는 너무 일찍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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