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범죄의 재구성> 감독의 사기사건 취재수첩 [1]
2004-04-06
땀냄새 나는 사기꾼들, <범죄의 재구성>으로 들어가다

머리냐, 아니면 발이냐.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두 가지 방식을 두고 사람들은 우열을 가리고 싶어한다. 물론 어떤 것이 더 좋은 창작방법인지 딱 잘라 말하긴 어렵다. 발에 땀나게 뛰어다녀서 모은 이야기와 머리가 쥐나도록 짜낸 이야기에는 나름의 쾌감이 있는 법이니까. “대한민국 대표은행이 털렸다”는 카피를 앞세운 <범죄의 재구성>은 시나리오 작업 때부터 감독과 제작자가 함께 파트너를 이뤄 전설적인 사기꾼들을 실제로 만나면서 취재한 내용을 캐릭터에 버무려낸 영화다. 예고편만 보더라도 박신양, 염정아, 백윤식, 이문식 등 주요 배우들이 맡아 연기한 캐릭터들의 개성의 충돌이 한껏 부각된다. 4월15일 개봉을 앞두고 믹싱 작업을 하느라 정신없는 최동훈 감독을 졸라서 받아낸 시나리오 취재기는 영화를 맛보기 전에 한 숟갈 뜨는 애피타이저로는 더없는 선택이 될 듯하다.

프롤로그-1997년, 사기와의 첫 만남

1997년. 어느 백수가 대학을 졸업했다. 모름지기 지식인의 자세는 주경야독이라고 배워왔던 백수는 낮이면 목동 보습학원에서 ‘국어! 떴다 최 선생’이란 직함의 아르바이트를 하고, 밤이면 어떻게 영화감독이 될까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백수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전세보증금 1800만원을 떼인 것이다. 집주인은 백수에게 줄 돈으로 시 소유지에 있는 판잣집 한채를 샀고, 다음달에 돈을 받기로 한 백수는 기다렸고, 다음달에 집주인은 그의 돈을 다른 빚쟁이한테 갚아버렸고, 그 다음달엔 법대로 하자고 맞장을 떴다. ‘이건 틀림없는 사기다’고 확신한 백수는 변호사를 찾아갔다.

“제가 사기를 당했거든요”

“사기로는 못 거니까… 그냥 숨긴 재산이나 찾으세요.”

그때부터 목동의 ‘국어! 떴다 최 선생’은 집주인의 숨은 재산을 찾아다녔는데, 세상에 어려운 일 중 숨은 재산을 찾는 게 제일 어렵다는 걸 백수는 알게 되었다. 하지만 전 재산을 잃은 슬픈 백수는 포기하지 않는다. 백수는 집주인을 미행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런데 미행이라는 게 숨은 재산 찾기 다음으로 어려운 탓에, 백수는 몇 차례 집주인을 잃어버렸고, 급기야는 들켜버리고 말았다. 백수는 그때 알았다. 미행하다 들키면 창피하다는 걸. 결국, 백수는 1800만원을 돌려받지 못했다. 변호사 말에 의하면 사기란, 고의적으로 속여먹는 것이다. 백수가 당한 건 살다보면 가끔 일어나는 재수없는 사건일 뿐이었지만, 백수는 여전히 자신이 사기당했다고 여긴다.

1999년 또는 2000년쯤. 백수 옆동네 망원동에서 유명하다면 나름대로 유명하다고 할 수 있는 ‘노랑머리 사건’이 발생했다. 노랑머리 아줌마는 4년 동안 동네 아낙들에게 친동생, 친언니보다도 인정 많고 살갑게 굴었다고 한다. 어느 날 노랑머리 아줌마는 비디오가게 아줌마에게 50만원을 꿔갔는데, 다음날 넉넉한 이자까지 쳐서 돌려주었다. 다음달쯤 300만원을 꿔가서 역시 넉넉한 이자와 함께 돌려주고, 그 다음달에는 생선가게 아줌마와 슈퍼 아줌마의 돈을 빌렸다. 4년 동안 망원동 아줌마들이 빌려준 돈은 5억원이 넘었고, 노랑머리 아줌마는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백수는 노랑머리 사건을 들은 이후, 노랑머리 사기사건이라는 시나리오를 15신까지 썼다가 백수의 친구인 또 다른 백수가 재미없다고 씹어대자 과감하게 그만 썼다.

한국은행을 어떻게 사기치냐고?

‘떴다 최 선생’을 그만둔 백수는 이후 전국에서 6만명이나 본 영화의 연출부 생활을 했고, 싸이더스에서 영화화되진 않았지만 두편의 시나리오를 썼던 작가생활을 거쳐 이제 감독지망생이 되어 있었다. 그때가 2001년 10월이었다. 이화여대 후문에 위치한 산딸기 분식점에서 차승재 대표와 점심을 먹은 뒤 백수는 후미진 카페에 들렀다. 그리곤 사기꾼 이야기를 건넸다.

“차 대표님. 죽이는 얘긴데요. 뭐냐면… 사기꾼들이 사기를 치다가 자기네들끼리 배신을 하는 얘깁니다. 결국 복수극인데….”

“끙∼.”

차 대표, 소파에 몸을 기댄다. 부정적인 반응일까? 조금 더 인텔리적으로 말하자.

“이 얘기는 사기꾼들의 사랑과 음모와 배신을 소재로 해서 잿빛 도시에 흐르는 음울한 정서를 하드보일드하면서 쿨하게 다루는 복수극. 캬~ 장 가뱅이랑 알랭 들롱! 아니면 로버트 레드퍼드나 폴 뉴먼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래서 누굴 사기치는데?”

“한국은행!”

“한국은행을 임마 어떻게 사기치냐? 사람들이 안 믿어, 그런 거는.”

“실제로 당한 적이 있어요. 96년, 구미에서, 9억원이, 사기꾼들한테.”

“끙∼.” 차 대표, 소파에서 몸을 뗀다. 긍정적인 반응이다.

“실제로? 음… 잡혔어?”

“안 잡혔습니다. 얘네들이 어떻게 한국은행을 사기쳤냐면….” 차 대표는 내 장황한 설명을 죽∼ 듣는다.

“그래? 써보자!”

글 최동훈/ <범죄의 재구성>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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