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꾼, 사람냄새나는 나쁜놈들
한달쯤 뒤, 차 대표가 S라는 친구를 소개해준다기에 사무실에 갔다.
“미안하다. 오늘 S랑 저녁먹기로 했는데 어제 구속됐단다.”
“S는 어떤 사람인데요?”
“S? 그 새끼가 진짜 나쁜 놈이지. 니가 지금까지 만난 애들은 S에 비하면 다 착한 애들이야.”
“하! S아저씨를 꼭 만났어야 하는데.”
"대한민국 여자들한테 S만큼 착한 놈이 없어. 여자가 손발 차다면 영지버섯 사줘, 뭐 먹으면 여자 입에 떠먹여주고, 식당 같은 데선 신발도 신겨줘. 그리고는 결혼한다고 돈 빌려서 결혼식엔 안 가고 포커 쳐. 돈 갚으라면 원투 스트레이트로 때리고.”
A는 눈매만으로도 은근히 사람을 주눅들게 만드는 보스 기질이 다분했는데 자신은 구두상품권을 위조한 적이 없다고 딱 잘라 말한다. 대신 10대 시절에 가계수표를 위조한 적은 있었는데 푼돈이었단다. 그리고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지 않는다. 그러고보니 나에게도 10대 시절 회수권을 위조한 친구가 있었다. 그리 나쁜 친구는 아니었던 걸로 기억한다. S는 한희작 선생의 만화주인공처럼 생겼고 말을 더듬는다. 그런데 어떻게 여자를 잘 꼬실까? 일단 그것부터 궁금해진다. 자신은 언제나 불쌍한 여자만 꼬신단다. 예전에 어떤 여자한테 300만원 정도 훔쳐 써서, 그것 때문에 구치소까지 갔는데 그 여자가 다시 변호사 고용해줘서 빼준 적이 있다면서, 자기가 사기쳤던 여자들은 전부 어딘가 이상한 데가 있다고 낄낄거린다.
S는 예전에 T와 A를 수술시켰다가(역: 속여서 끝장내다) 서로 사이가 틀어졌는데, 차 대표는 S가 학교졸업(역: 출감) 하자마자 둘을 화해시켰다. 이제는 모두들 오랜만인지라 사는 얘기들을 쉴새없이 퍼부어대며 포커를 친다. 이 아저씨들 모두 차 대표 어릴 적 친구라는 게 약간 코믹하고 생경한 풍경처럼 다가왔다. 26개의 영화를 만든 사람과 학교를 들락달락하는 건달들. 그들은 모두 <범죄의 재구성>에 등장할 만한 사람들이었다. 폴 뉴먼과 로버트 레드퍼드처럼 멋있는 사기꾼이 아닌, 진짜 평범한 사기꾼들. 구라발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번 돈은 대부분 경마나 포커로 날리는 사람들. 노래 한 자락 할라치면 처량하고 구슬프게 최희준의 노래를 부를 줄 아는 사람들. 그냥 동네 통닭집에서 만날 수 있는 그저그런 아저씨들. 그때, 차 대표 방에서 본 <미드나잇 카우보이> 포스터가 언뜻 스쳐간다.
사기의 본질을 깨닫다
식목일 버전이라고 나름대로 희망 섞인 이름을 붙인 시나리오가 나왔을 때, 차 대표는 나에게 대한민국 포커계의 일인자 K를 만나게 해주었다. K는 명문사립대 일어과를 나와, 일찍이 포커계로 입문. 전문 포커인으로 자리매김하다가 한때 150만부가 팔렸다는 포커입문서를 썼던 사람이다. 허름한 사무실에선 인터넷 포커 사이트를 만드는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었고, 바쁜 와중에 시간을 내준 K가 앉자마자 속사포처럼 이야기를 시작한다.
“나는 동훈씨 시나리오 실망이야.”
“어떤 점이요?”
“여기 40페이지 보니까 사기꾼이 싹~ 접근을 하네. 근데 사기꾼은 이렇게 안 해. 내가 먼저 접근해서 한다고 사기가 되는 게 아냐. 찾아오게 만들어야지. 만일에 동훈씨가 50억원 정도 가진 부잔데 내가 동훈씨를 사기치려고 찍었어. 그럼 일단 동훈씨에 대해서 조사를 쫙~ 한다구. 지금 감독 데뷔하려고 사기꾼 시나리오 쓰고 있구나? 오케이! 차승재한테 슬쩍 찾아가서 내가 사기꾼들 많이 만났다는 얘기를 흘려. 그럼 승재가 얘기 한번 들어보라고 나한테 보낸단 말야. 동훈씨가 나 의심해? 아이큐 200이 넘어도 의심 못해. 동훈씨가 날 만났지? 그럼 이미 끝난 거야 그거는. 내가 이런 얘길 하나 해줄게.
몇년 전에 압구정동에서 빌딩 세개 가진 회장님이 한명 있었는데 이 양반이 심심풀이로 포커를 좋아해. 마귀들(타짜)이 이 사람을 찍은 거야. 한놈이(P라고 부르자) 일단 회장님 다니는 헬스클럽에 가서 그냥 3개월 동안 같이 운동하면서 안면만 터놔. 그러다보면은 회장님이 포커 한 게임 같이 하자고 제안을 해온다고. 근데 그때, P는 예전에 포커로 한번 크게 덴 적이 있어서 안 한다고 일단 사양을 해. 대신 조용히 치고 싶으시면 밤에는 자기 사무실이 비니까 거기서 치라고 한다고. 그렇게 한 3개월 사무실 빌려주면 미안해지거든 사람들이. 계속 같이 치자고 해. 그럼 P가 한번만 쳐보겠다고 하더니 돈을 다 따버려. 그리고는 그 자리에서 돌려줘. 자기는 포커로는 거의 지지 않는 사람이니까 끼면 매너가 아니라고 하면서. 그럼 회장님이 P를 달리 보거든. 햐~ 인간이 됐네 이러면서. 그때 마귀들 두명이 헬스클럽을 또 들어가. 안면 터. 그리고 포커판에 껴. 계속 따는 거지. 회장님은 계속 잃고. 사람이 돈이 아무리 많아도 포커판에서 지는 건 못 참게 돼 있어. 고스톱은 게임이지만 포커는 승부야. 이겨야 하는 거거든. 결국 회장님이 P를 찾아. 자기는 실력이 안 되니까 P보고 대신 쳐달라고 그래. 판돈은 자기가 대준다고. 꼭 이기고 싶다고. 그럼 P는 몇번 사양하다가 회장님하고 같이 포커판에 들어가서 마귀 두명이랑 승부를 벌여. 동훈씨! 그럼 그 포커판이 어떻게 됐겠어?” 그때, 나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K가 들려준 이야기에는 사기의 본질이 담겨 있었다. 찜쪄먹을 사람이 오게 만드는 것. 거기까지가 진짜 사기다. 이걸 공사한다고 한다. 일단 테이블에 앉으면 게임은 끝난다. 문제는 어떻게 테이블에 앉힐 것이냐다. 테이블에 앉히기 위해서 1년 공들이는 건 예사다. K는 신이 났는지 얼마 전 일어난 골프 사기 얘기를 들려준다. 마지막 승부를 위해서 1년 반 동안 공사했단다. 생각해보니, 망원동 노랑머리 아줌마는 4년 동안 공사를 한 것이다. 적어도 4년 동안은 법없이도 살 사람이었고, 푼수처럼 퍼주길 잘하는 시골여자였고, 애 못 나서 고민하는 평범한 옆집 여자였고, 돈 빌려주면 언제나 정확한 날짜에 3부이자를 타게 해주는 은인이었다. 내 전세보증금 1800만원 떼어먹고도 시 소유 무허가주택까지 산 아줌마는 내가 갈 때마다 아팠고 어제 밥을 굶었다고 엄살을 떨었다. 그 사람은 이미 나의 채권자가 아니라 가련하고 나이든 아줌마였다. 모범생인 나는 절대 돈을 받아내지 못한다.
에필로그-혓바닥부터 구로동 샤론 스톤, 그들은 진짜다
그들은 모두 훌륭한 영화배우였고, 완벽한 연기를 한 것이다. 사기꾼은 접시라고도 불리지만 영화배우라고도 한다. 영화 <스팅>에는 이런 장면이 있다. 가짜 사설경마장을 만들고 일당들을 모집하면서, 오디션을 본다. 그리고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묻는다. 한 사람이 “난 영국신사 흉내를 낼 줄 압니다” 하고는 엄지손가락으로 수염을 쓱 문질러 다듬는다. 그 사람은 팀원이 된다. “옆방으로 가서 옷을 갈아입으세요.” 사기라는 건 테크닉이 아니다. 심리전이다. 반드시 누군가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뒤, 나는 몇번씩 속초에 가서 시나리오를 고쳐 썼다. 17고가 만들어졌을 때 더이상 로버트 레드퍼드나 폴 뉴먼이 아닌 “범죄의 재구성”에 걸맞은, 땅에 발을 디디고 있는 인물들이 만들어졌다. 혓바닥, 김 선생, 얼매, 제비, 휘발류, 구로동 샤론 스톤이 그들이고 난 그들을 사랑한다. 2003년 9월. 촬영에 들어갔다. 하지만 난, 배우들에게 내가 만났던 사람들에 대한 추억을 얘기해주진 않는다. 왜냐하면 그건 단지 시나리오 안에 뉘앙스로 남아 있을 뿐이기 때문이고 재창조하는 배우들이 있고 지켜보는 내가 있을 뿐이다. 2004년 1월 촬영이 끝났고, 영화는 개봉만을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