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범죄의 재구성> 감독의 사기사건 취재수첩 [2]
2004-04-06

첫 취재, 구미에는 결혼사기가 많다…

첫 번째 취재처는 구미경찰서. 한국은행 사기사건을 담당했던 경찰은 쉽게 협조를 해주지 않는다.

“범인도 못 잡은 걸 뭘 알라카고 참…. 더이상 얘기는 못해주고 마~ 그냥 커피나 한잔 마시고 가쇼!”

“그래도 용의자들은 있을 거 아닙니까?”

“용의자가 있다 커면 그놈이 범인일 수 있지만, 용의자가 없어. 80년대 초에 서울 영등포에 있는 뭐 은행에 비슷한 수법으로 했던 사람들까지 다 뒤져봤는데 다 죽고 읎어. 그래도 우린 계속 수사하고 있어. 내가 잡으면 연락할게.”

영화 취재를 왔다고 하자 신기한가보다. 여럿이서 모여들더니 한마디씩 거든다.

“나는 뭐꼬 그… <처녀들의 저녁식사> 그런 영화가 젤로 좋드만.”

“<무사> 찍은 영화사라구? 일본놈들 상대로 무사 한번 찍었으면 좋겠어. 그런 걸 찍어야지 무슨 사기꾼 얘길? 사기꾼들 별거 없어. 그냥 아저씨, 아줌마야.”

“이쪽 구미서는 결혼사기가 젤 많다. 여기 공단 아가씨들 신용카드 기본이 다섯장이라카이. 뼈빠지게 일해가 남자 뒷구멍으로 다 처넣고 그래싸도 그기 사기인지 몰르고 사랑이란다.” 한국은행 사건보다 결혼사기 디테일만 듣다 왔다.

다섯달 뒤. 나는 차 대표에게 미스터리와 스릴로 가득 찬 나의 초고를 이메일로 보내고, 사무실로 찾아갔다. 그때 차 대표는 사무실에서 두 아이의 손을 잡고 온 아주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나중에 알게 됐지만 그들은 차 대표 어릴 적 친구의 가족이었고, 차 대표는 곧 감옥에 들어갈 친구의 변호사를 선임하는 일을 도맡아 하고 있었다. 아주머니와 아이들이 나온 방에 내가 들어간다.

안산에서 진짜 선수를 만나다

“플롯은 괜찮은데, 감독이 모범생 같아가지구 사기꾼 얘기 쓰겠냐? 구라발도 약하고 인물이 영 땅에 붙질 않아서리….” 내가 모범생 소리를 듣다니. 잠시 감동한다. 15년 만인가? 16년 만인가?

“아니… 저기… 캐릭터가 한번에 만들어집니까? 계속 다듬어야죠. 근데 어떤 캐릭터가 제일 약한데요? ”

“다 약하던데.” 감동이 싹 가신다. 어떻게 다 약할 수가 있지?

“내가 사람들 좀 소개시켜줄 테니까 좀 만나봐라. 내 친구 중에 어렸을 때 구두상품권을 위조했던 놈이 있었는데….” 차 대표. 여기저기 전화한다.

“oo이는 뭐하냐?… 아직 감옥에 있구나. 00이는? 결국 그 여자랑 도망갔어? 그 새끼 언제 인간 돼냐?” 말없이 앉아 있으려니 심심하고 눈돌릴 데도 없어 벽을 쫙 훑는데, 더스틴 호프먼과 존 보이트가 초라하게 담배를 피우고 있는 흑백 포스터가 보인다. 알랭 들롱이냐? 존 보이트냐? 잠시 갈등한다.

“안산에 가서 저녁이나 먹자.”

“안산? 안산이면 경기돈데… 지금요?” 차 대표는 말 나오면 해야 하는 양반인지라, 곧바로 안산으로 향했다.

“경마장이 뚝섬에서 과천으로 이사갈 때 이사비 자기 혼자 다 냈다”는 주유소 사장님 T를 안산 횟집에서 만난다. 진짜 사기꾼을 만나는구나 하고 잔뜩 기대했던 나는 T를 보고 잔뜩 실망한다. 너무 평범한 아저씨였고 나에게도 깍듯이 ‘아우님’이라고 존칭을 써준다. 대충 술이나 한잔 먹고 갈 생각으로 회만 깨작거리고 있는데, T의 첫 번째 결혼 이야기부터 캐릭터의 진가가 나오기 시작한다. T는 작은 무역회사 사무실을 내고 지방대학교에 여직원을 뽑겠다고 서류를 보내달라고 했다. 여러 학교에서 날아온 서류를 쫙 훓어본 뒤, 가장 집안에 돈이 많고 예쁜 졸업생을 뽑았다. 무역회사래야 실제로 하는 일은 없고 매일 단둘이서 사무실에 있다보니 예쁜 졸업생은 T에게 호감만 늘어갔다. 둘은 그렇게 결혼했다. 술판이 흘러갈수록 이야기는 흥미있어진다. 젊었을 적 T는 운전면허증도 없이 앰뷸런스 운전기사로 취직한 적이 있고, 그 병원에서 원무과장까지 했었다고 한다.

“하여튼 승재야! 그때 S새끼가 나를 수술시킨 거야. 나도 중상입으니까 호박에서 김나지. S새끼 산소호홉기 딱 떼주고 학교 졸업하니까 사는 게 궁짜 끼고 좀 춥드라. 그래도 나! 요새 접시는 안 돌린다.”

“하 이놈 봐라. 그럼 니 뭔 재미로 사냐?”

“나이먹으니까 구라발도 약해지고 힘도 달려서 착하게 살고 있지.” 내가 끼어든다.

“저기… 접시가 뭐죠?”

“우리 아우님 손목 힘 좋아서 글은 잘 쓰게 생겼는데 몽타주가 딱 모범생이네. 접시가 뭘로 만들어졌어?”

“접시요?… 사기로 만들어졌… 아! 사기!”

T는 술자리가 끝나고 차 대표한테 기름 한번 쏘겠다며 자기 주유소에 들렀다 가란다. 그런데 웬일인지 차 대표는 극구 사양한다. 시간이 지난 뒤, 신문에는 안산에서 솔벤과 톨루엔을 30% 섞은 가짜 휘발유를 파는 주유소를 적발했다는 기사가 나오고, T 아저씨가 구속됐다는 보도가 나왔다. 그러나 취재는 계속됐다. 카드깡을 한다는 아저씨, 사설경마장을 차릴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아저씨들을 만난 날이면 나는 잔뜩 술에 취한 채 집에 들어와서 그 아저씨들이 어떻게 말하고 웃고 욕하고 행동했는지에 대해 소상히 메모를 휘갈겼다. ‘그 새끼들이 서로 똥구멍을 맞춰서 날 수술시켰다니까…. 카드깡으로 2억원을 벌었다는데 다 경마로 날렸지. 마사회가 30% 먹잖여? 나는 10%만 먹는 사설경마장을 차릴 건데 어쩌구 저쩌구…. ” 모범생은 변화하고 있었다. 친구들은 내가 말하는 방식이 사기꾼 같아졌다고 하고, 내 시나리오에는 점점 욕이 많아졌다.

글 최동훈/ <범죄의 재구성>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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